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 헌병보조원 재직 당시 투옥된 의병을 탈옥시키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경기도 양주, 포천에서 활동하다가 북간도로 망명 중 원산에서 체포되어 사형 순국한 강기동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 1909년 1월부터 1911년 2월까지 약 2년여에 걸쳐 반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선생은 의병에 투신하기 이전에 의병을 진압하는 일본 헌병의 보조원이었다.
1909년 고안헌병분견소에 의병들이 수감되고, 의병의 실상을 접한 선생은 자신도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09년 1월 15일, 옥문을 부수고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을 탈주시킨 후 총과 탄환을 탈취하여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 의병으로서 대일항쟁 대열에 동참했다. 창의원수부는 1909년 1월 한 달 동안 포천, 양주지방의 산악을 배경으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헌병보조원 시절의 정보를 바탕으로 효율적 군자금 확보책과 일본군대, 헌병, 경찰의 정보를 제공, 창의원수부의 반일투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이러한 공로로 투신한 지 1개월 만에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으로 임명됐다.
1909년 2월에도 창의원수부는 19회에 달하는 전투를 전개, 경기도 양주군 석곡면 ‘돌압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3월 31일, 의병대장 이은찬이 체포되어 처형되자 의진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에 선생은 4월 초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창의원수부 중군장’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하여 흩어진 의진을 수습하고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계획하여 의병투쟁을 계속하였고, 경기 동북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9년 10월, 일본군의 집중적인 ‘의병토벌’이 진행되자, 선생은 연기우 의병부대와 연합부대를 구성하고 전투를 전개했다. 대규모 전면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해 나가며‘분합작전’을 계속해 나가자 일제는 현상금을 내걸고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이듬해 9월부터 40여 일간‘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활동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에 선생은 독립군으로 전환해 대일항전을 계속하기위해 국외로 망명을 결심했다.
그러나 1911년 2월 북간도 방면으로 이동하던 도중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체된 선생은 4월 17일 서울 용산 일본군 형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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