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처단(황포탄의거)을 시도하는 등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사형을 언도받고 20여년의 옥고를 치른 김익상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비행사의 꿈을 품고 있던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비행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고 광동으로 갔으나 비행학교를 운영하지 않았 북경으로 건너가게 된다.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은 선생이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원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어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두와 밀정 등을 7가살(七可殺)로 규정하고 일제식민통치기관을 파괴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의열단 가입 후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한 것.
1921년 9월 9일, 북경에서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받아 국내로 들어온 선생은 9월 12일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하고 서울 남산의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폭탄을 설치하여 폭발시켰으며 선생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라고 하는 일제의 선전이 허구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으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조선총독부 폭파 이후 일제 고관 암살을 모색하고 있던 선생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거사를 계획했다. 이에 다나카는 이른바 ‘간도불령선인초토화 계획’의 구상 및 작전 계획을 총지휘한 일제 군부의 거물이었다.
선생은 1922년 3월 28일 중국 상해 황포탄 세관부두에서 다나카 대장을 기다렸다. 이윽고 다나카가 나타나자 총탄을 발사하기 시작했으나 다나카는 황급히 도망쳤고 폭탄마저 불발되어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선생은 피신 중 중국 순경에게 붙잡혀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수감되었다가 나가사키로 압송, 나가사키공소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선생은 재판 과정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의지를 밝혔으며, 사형 판결에 대해서도 상고하지 않는 등 법정 투쟁을 계속했다. 다행히 감형으로 20여년의 옥고를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된 후 선생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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