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사람

드라마 속 벽돌 질감까지 신경쓰는 사람이 있다?!

무대디자이너 박수남
 


작 품 : <제중원> <천국의 계단> <하늘이시여> <조강지처>

방송 스태프의 영역도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무대, 소품, 의상 등으로 구분 짓기도 하지만 이를 총괄하는 팀장급을 가리켜 흔히 미술감독이라고 부른다. 박수남 SBS 영상미술본부 미술감독 역시 무대(세트)를 주로 담당하지만 미술 영역과 관련된 모든 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경력 15년 차의 베테랑이다. 최근 종영된 SBS드라마 <제중원>에서 시청자가 보는 세트와 소품 중에는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무대 디자이너는 방송 영상에서 화면으로 보여주는 그림 하나만으로 그 프로그램의 특성을 잘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프로그램의 시놉시스와 출연자의 수, 구성된 제작 포맷의 의도 등 컨셉에 정확하게 접근해 세트를 제작하고, 그 프로그램이 방송 컨텐츠의 고부가가치의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시청자에게 서비스하는 게 무대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 감각은 기본, 시놉시스를 적용하는 무대감독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아무래도 이 분야에는 회화, 동양화, 디자인, 실내장식학과, 무대디자인학과, 건축 미술 등 관련 학과 출신들이 대부분이죠. SBS에 입사하기 전 반 년 정도 다른 직장을 다녔지만 평소 관심 있던 드라마와 영화 관련 일을 외면할 수 없더라고요. 마침 공채시험이 있길래 도전해 봤는데,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네요.”

박 감독은 잠깐 다녔다는 직장에서 슈퍼그래픽이나 아파트와 관련된 모델하우스 도면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순수 회화에도 관심이 있던 그였지만 군대 제대한 이후에는 당시 운동권 관련 일을 맡아서 걸개그림을 그리거나 무대 디자인을 직접 담당하기도 했었다고. 지난 얘기긴 하지만 영상미술 관련 방송국 공채에 쉽게(?) 입사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사실 공채 시험을 위해서는 준비할 게 많죠. 기본적으로는 공간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드로잉도 할 줄 알아야 하고요. 저 같은 경우엔, 워낙 영화를 좋아했어요. 당시만 해도 하루에 영화 서너 편 정도는 가볍게 볼 정도였죠. 영화를 지속적으로 봐왔기 때문에 관련 분야에 대한 이해나 좀 더 깊게 해석할 수 있는 기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시 박 감독이 본 시험은 주인공이나 환경이 세트로 구현되는 게 적혀 있는 시놉시스 같은 걸 보고 그 주인공에게 필요한 공간을 나타내는 적용하는 실기시험이었다. 박 감독이 짧은 시간 안에 공채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평소에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험유형에도 자신의 관심이 접목됐는지도 모른다. 무대와 관련된 전반적인 이해와 전문성은 세월이 흘러도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당시에는 관련 스태프를 정기적으로 뽑았어요. 요즘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래서 그런지 자주 뽑지는 않아요. 필요할 때 수급하는 형식이라고 할까요. 수급이라는 건 경력자를 선발한다는 걸 의미하는데요, 신입사원을 뽑은 지는 꽤 된 것 같네요. 경력자는 타 방송국 출신이나 방송국에서 독립한 스태프들에서부터 조금 시야를 넓히면 케이블TV나 영화 쪽이 있겠죠.”


벽돌 질감에서 가구 배치에 이르는 섬세함
박 감독은 얼마전까지 SBS종영 드라마 <제중원>의 영상미술을 책임졌다. 지난 1월 2일 첫 전파를 탄 이 드라마는 지난해 9월 초 첫 촬영을 시작했다. 드라마, 예능, 보도, 교양 등 프로그램 성격에 따라서 무대(세트)를 준비하는 기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흔히 드라마의 경우에는 반 년 전부터 준비하게 된다고.

“시놉시스가 나오면 그것을 연구해서 연출가와 협의단계를 먼저 거칩니다. 야외촬영과 스튜디오촬영 등 필요한 세트를 고민하고 거기에 따라 필요한 소품도 준비하죠. 분장과 의상 담당자와 협업체제로 진행하기도 하고요. <제중원>처럼 일이 방대할 경우에는 미술감독의 영역 안에 분장과 의상도 포함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걸 다루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주로 무대(세트)와 소품 위주로 진행하게 됩니다.”


                            <그림3. 11.8%시청률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SBS종영드라마 '제중원'>


박 감독은 이번 <제중원>을 위해서 세트장 디자인 창의 모양에서부터 벽돌의 질감 표현까지 세심하게 관여했다. 세트의 구조에 따라서 어떤 소품을 채울 것인지 직접 선택한 것은 물론, 빈 공간에 어떤 가구를 배치할 것인지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술대 같은 경우엔 시대적 고증을 거쳐 관련 자료를 토대로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방송에서 드라마는 교양이나 예능에 비해서는 규모가 좀 큰 편이죠. 방송국에 속한 스태프는 어느 한 작품만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예능 일을 하면서 교양 프로그램을 동시에 맡기도 하고, 드라마를 진행하면서 중간 중간 교양이나 보도 등에 투입되기도 하죠. 전문적으로 보면 드라마가 됐든 교양, 보도가 됐든 똑같이 힘들죠. 다만 드라마는 길게 가기 때문에 역설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더 짧게 느껴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드라마는 짧지만 밀도 깊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예능은 비슷한 상황이지만 지구력을 필요로 할 때가 많은 것 게 다른 것 같아요.”

그럼 방송과 영화에서 미술감독의 역할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가 있을까. 방송보다 영화 관련 업무가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눠진다고 알려져 있다. 방송 시스템도 세분화되는 추세로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력이 넉넉한 상황은 아니다 보니 부족한 면이 있다고. 결국 인력구조에 따른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공통점은 업무적으로는 비슷하겠죠. 다른 점이 있다면 밀도 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아무래도 영화에서 다루는 게 좀 더 깊이가 있죠. 방송도 이제 HD로 고화질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큰 화면에서 보여주는 영화가 아무래도 좀 더 깊게 다룰 수밖에 없겠죠. 또 하나는 영화에서는 쪽대본 이런 게 없잖아요. 사전에 준비해서 철저하게 진행되는 반면, 방송에서는 작가의 대본이 늦게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결국 갈수록 시간이 촉박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죠.”

 


관심에서 시작된 지적 재산의 가치
박 감독은 무대 디자인과 관련해 가장 필요한 자질 중 하나로 ‘관심’을 꼽았다. 어떤 작업을 준비하게 될 때 거기에 따른 관심과 사전지식이 동반되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기본적으로 틈틈이 공부해야만 해요. 물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요. 어쩌면 직업병일 수도 있고 관심사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는데요, 평소에 준비과정 없다가 바로 달려들게 되면 이미 늦은 거죠. 사전에 세트, 소품, 디자인, 의상 등과 관련된 관심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만 합니다.”

덧붙여 그는 미술감독으로 살면서 가장 자랑스럽고 매력적인 일로 ‘지적 재산’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흔히 연기자들이 배우로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건 돈 주고도 못 하는 값어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번 <제중원>에서도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진행되는 경험은 실제적으로는 처음이죠. 물론 풀어내는 방법에서는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다양한 경험은 분명 소중한 ‘지적 재산’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돌아보면, 어떤 작품을 시작하기 전과 끝냈을 때 지적 재산의 차이는 실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아마도 이건 이 분야에 있는 스태프들이 자랑하거나 혹은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치겠죠.”

15년 베테랑 미술감독이 말하는 최고의 무대 디자인이란 그 기준이 우리의 시선이 아닌 카메라의 화각에 있었다. 단순히 눈에 좋게 보이는 게 좋은 무대(세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에 좋은 것보다는 카메라에 좋은 그림을 만들어주는 세트가 좋다고 할 수 있죠. 그러기 위해서는 카메라, 조명, 인물 동선 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해야 합니다. 이런 기본 위에서 카메라 화각 안에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서 욕심을 내자면 좀더 사실적인 무대라고 할까요. 예전에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 한 눈에 표가 났지만, 요즘엔 경험 있는 전문가가 봐도 세트촬영인지, 야외촬영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조명효과라든지 다른 요인을 읽어내는 능력도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끝으로 박 감독은 무대 디자인에 관심 있는 후배들에게 일의 강도는 힘들지만 그렇기에 더 큰 메리트가 있다는 말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힘든 만큼 성취도가 크다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쩌면 평생 한 길을 걸어온 전문가의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힘들죠. 많이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성취도도 더 크고 더 기분도 좋은지도 모르죠. 이 분야 스태프들은 우스갯소리로 시간 개념이 무디다고 해요. 한 회, 두 회 혹은 한 프로그램씩 진행하다 보면 몇 달이 훌쩍 지나가 있거든요. 어쩌면 날짜나 월별로 사는 게 아니다 보니 가는 시간엔 둔감하지만 새로운 시간엔 민감해지기도 하죠. 이 분야는 힘든 만큼 새롭게 경험할 때마다 공부가 되고 결국 자신의 자신이 되는 것 같습니다. 향후에 자기를 위해 풀어낼 수 있는 이런 자산이 쌓인다는 게 이 직업의 가능성과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를 높일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 싶다면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미술감독은 교양, 드라마, 예능, 보도 등 다양한 영역에서 무대라는 큰 틀을 만드는 동시에, 시청자를 위해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소품 위치까지 신경 쓰는 섬세함을 지니고 있는 팔방미인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박수남 미술감독 역시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방면에서 배우고 경험하며 실천했다. 편식 없는 왕성한 지적 욕구와 실험정신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미술감독인 것이다. 이제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시야를 주인공이 아닌 배경으로 잠시 눈길을 돌려보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스태프의 숨은 열정과 땀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찾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지 않을까.


* 박수남 SBS 미술감독 홈페이지 - http://www.park23.com

 
 

글,사진 :  이민영 purin1211@naver.com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