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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사람

그 맑은 종소리 울려 퍼져 인간의 모든 번뇌 씻어 버려라

주철장 원광식


세상의 모든 번뇌 종소리에 담고

열일곱이었다. 나는 종을 제작하는 일을 하던 아버지 연배인 팔촌형님의 양자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해오시던 일을 형님을 거쳐 내가 물려받게 된 것이다. 종에 대한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엄한 교육을 받으며 기술을 전수 받았다. 나는 종을 만들며 살고 있었지만, 종은 아직 내 인생 깊은 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대 사찰과 교회가 늘어나면서 종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도 엄청 늘었다.
 돈 버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르고 종을 만들었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폭발 사고였다. 달궈진 붉은 쇳물이 나의 오른쪽 눈으로 튀어 올랐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잃은 슬픔에 젖어 세상 속을 헤매었다.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 건지 두려웠다. 그런데 1년 뒤 나는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덕사에서 한국 최대의 범종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나는 머리를 깎고 수덕사로 들어갔다. 3년 걸려 있는 힘을 다해 범종을 완성하면서 종 만들어 팔던 내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끝이 없는 길

끝이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 너머 산이라고 할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그곳에 내가 찾는 소리가 종의 모습으로 묻혀있다. 종을 제외시켜 놓고는 내 인생을 생각할 수 없어 나는 오늘도 그곳으로 향한다.
담장이 아무리 높아도 앞마당에 피어난 꽃의 향기를 막을 수 없고, 창문을 굳게 닫아도 스며드는 밤하늘의 달빛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 내게 종은 그런 존재다. 말하자면 꽃 피고 지는 일이거나, 사람이 살다가 죽기도 하는 그런 일. 그걸 막을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 없다. 간혹 바람이 불어오거나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종이 내게 준 꿈 때문이다.
지금도 종을 만들고 있지만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뿐이다. 종이 내는 소리에 스며들어 나를 찾기 시작하던 청춘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길을 처음부터 다시 걸어서 오로지 종을 위해 살고 싶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종을 만들다 죽고 싶다.



세상에 울려라, 천 년의 종소리

한국 종의 비밀은 신라의 종이 품고 있다. 신라의 장인들은 종을 만들 때 밀랍주조공법으로 만들었다. 섬세한 문양과 매끄러운 표면, 한국 종 특유의 웅장한 소리는 진짜 한국 종인 밀랍주조공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신라의 종을 꿈꾸기 시작했다. 밀랍주조공법이란 무엇인가.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돌아다니고, 경주 남산의 흙을 샅샅이 뒤졌다. 신라의 흙에 그 비밀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지 10여 년, 나는 밀랍주조공법으로 한국 종의 맑은 소리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비밀은 남산의 활석에 있었다. 활석은 모양을 만들기 쉽도록 무르고, 내화력이 좋고, 밀랍이 열에 녹아내리지 않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종을 만든 지 40여 년, 그동안 내가 만든 종은 모두 7000여 개. 고유한 우리의 전통 문화와 예술에는 너무나 창의적인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있다. 나는 한국인들이 우리의 종이 얼마나 우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소망한다.
   

▶글 : 이지혜    
▶사진 : 임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