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 조선혁명당에서 비밀 연락활동을 전개하고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광복군으로 대외 선전 및 초모활동에 힘쓴 오광심(1910~1976)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한 선생은 1929년 정의부가 설립한 민족학교인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졸업, 통화현 반납배 배달학교 및 유하현 삼원포 동명중학 부설 여자국민학교에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29년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세력은 국민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산하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이 조직되면서 대일항전이 본격화됐다. 이에 선생은 배달학교 근무 당시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교직을 그만두고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혁명군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지하 연락활동을 하는 등 독립전쟁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 시기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백파 김학규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32년 상해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조선혁명군을 비롯한 독립군 일부가 관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에 선생은 부군 김학규와 함께 남경으로 파견되어 임시정부 측에 지원을 요청하고 관내지역 독립운동 상황을 본부에 전달하는 중요 임무를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변절자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낸 선생은 이후에도 민족 단일당 조직운동 및 조선민족혁명당 부녀부 차장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관내지역의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1939년 2월 광서성 유주에서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조직되었고 청년공작대에서 선생은 항일 투쟁의 내용을 담은 합창, 연극 및 벽보 제작 등의 활동을 통해 항일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후 선생은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했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전방인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하게 되자 선생도 서안에서 광복군 대원인 지복영, 조순옥 등과 함께 1년 반 동안 기관지 《광복》간행에 전념한다.
이후, 모병 업무 강화를 위해 광복군 서안 제3지대가 편성되자 선생은 서안보다 더 전선에 가까운 산동반도로 가서 모병 활동을 전개하는 등 대일항전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1945년 광복 후 상해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 처장 김학규를 도와 교포의 보호와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후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4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주요 어록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 민족 존망의 책임이 남녀 모두에게 있으며, 서반아 여성들은 자국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어깨에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가 남자 못지 않게 싸웠고, 중국여성들도 맹렬하게 항일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을 볼 때에 국망 30년 동안 조국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맹렬한 활동을 한 것은 주로 남자 동지들이고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니 남녀평등과 여권을 찾으려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져야만 하며, 바로 지금이 여자들에게 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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