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는 해치라고도 한다. 머리에 뿔이 하나 있는 동물로 성질이 곧아서 잘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깨문다고. 관리의 부정과 비리를 탄핵하는 사헌부 관리의 흉배에 해치를 넣었고 해치관을 썼다.
광화문 앞 해태는 뛰어난 조각 작품이다. 제과회사 심벌로 쓰이는 등 다소 신선미가 떨어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솜씨가 범상치 않고 조형미가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이 해태 앞에서는 어떤 신하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니 왕권의 상징이었다.
근정전과 근정문의 계단에는 왕만이 다닐 수 있는 구역이 있다. 중심에 사각 답도(踏道)가 있고 좌우에 두 마리 해태를 배치했다. 계단석의 전면에 당초문을 조각하여 품격을 높였다.
이성계는 천도한 뒤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리는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경복궁 남쪽에 숭례문(남대문)을 지었다.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어 숭례문 인근에 ‘남지’라는 연못을 팠다. 관악산보다 낮은 북악산 자락의 경복궁에 크고 작은 불이 계속 나자 조정에서는 궁궐 남쪽 광화문 양 옆에 물기운을 몰아온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 석상 한 쌍을 세웠다. 이후 신기하게도 화재가 없어졌다고 한다.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지는 해태는 그 모양이 사자와 비슷하며, 몸에는 비늘이 있고 머리 가운데에 뿔이 달렸다. 해태 그림은 불을 억누르는 부적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조선의 정치학자와 풍수가들은 화마(火魔)를 경계하기 위해 세 가지 장치를 만들었다.
우선, 숭례문 인근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만들고, 숭례문 안에도 자체 우물을 팠다.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달아 화기를 막았고, 물기운을 몰아온다는 상상 속 동물 해태를 광화문 양 옆에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해태는 사헌부(司憲府)와 관련이 깊다.
사헌부는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원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는 대표적 법사(法司)이다.
그 사헌부의 관원들이 채관, 곧 해태가 장식된 모자를 썼다.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은 공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 문양―흉배(胸背)가 동급의 다른 관원들은 구름속에 학을 수놓은 데 비해 유독 해태를 수놓았다. 이렇게 사헌부와 해치가 관련이 깊은 까닭에 사헌부 대문 앞에 해태를 돌로 조각하여 세웠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보물 제811호)은 현재 4개가 서 있다.
6각형의 굴뚝 벽에는 당초 무늬의 학을 포함, 박쥐 봉황 나티 소나무 매화 대나무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나비 해태 불가사리 등의 무늬를 조화있게 배치했다.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사적 제171호)에서도 해태를 만날 수 있다.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 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고종도 영조의 고사에 의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원구에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황제가 되었으며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한 사실과 1902년이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자 보령이 망육순(51세)이 되는 해이므로 기로소에 입사(入社)한 사실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다”고 하였다.
비전(碑殿)의 기단 둘레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연꽃잎을 새긴 동자기둥 위에 받침돌을 설치하고 방위 따라 사신(四神)과 12지신상을 돌로 조각하여 배치했다.
남쪽에는 말과 주작과 해태가, 동쪽에는 토끼와 용이, 서쪽에는 닭과 호랑이가, 북쪽에는 쥐와 거북과 해태가 배치되어 있다. 비전 남쪽에 둔 삼문은 돌로 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다.
해태는 별전괴불(17족, 중요민속자료 제47호)에도 볼 수 있다.
괴불이란 어린아이나 부녀자들이 옷을 입고 그위에 장식하기 위해 차고 다니던 일종의 노리개로 네모진 비단 헝겊을 접어 꿰매어 그 속에 솜을 넣고 가장자리에 수를 놓아 아름답게 꾸민 후 비단끈과 매듭끈을 꿰어 몸에 달고 다녔다. 다른 말로 괴불주머니 혹은 괴불즘치라고도 부른다.
이 별전괴불은 별전(엽전), 옥(玉), 수놓은 주머니 등을 꿰어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 궁중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담긴 의미를 보면 동전은 지참금으로 오래 보전하기 위하여 노리개로 만들어 달았고, 남녀의 애정을 나타내는 나비, 영원 불멸의 상징인 매미, 부귀영화를 나타내는 박쥐 등을 엮어 중심의 복주머니에 모이게 하므로서 시집가서 많은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여인들이 몸에 달고 다녔다.
괴불은 어린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 옷을 입은 위에 장식하기 위해 차는 장식물이다.
괴불은 네모진 비단색 헝겊을 귀나게 접어서 꿰매어 그 속에 솜을 통통하게 넣고 가장자리에 수를 놓아 아름답게 꾸민 후 비단색 끈을 접어서 달고 매듭 끈을 꿰어 몸에 장식하는 노리개의 일종으로서 괴불주머니, 혹은 괴불줌치라고도 한다. 민가에서는 금은보석을 사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별전이나 오색의 비단 헝겊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로 정성껏 수놓아 만들었다.
한개의 괴불이 18작(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작의 길이는 대략 20~35cm 정도이다.
그 형태는, 맨 위에 8각형의 엽전이 매듭실에 꿰어 있는데, 바탕은 청색으로 테두리는 적색으로 칠보되어 있는 8각형에 상평통보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 상평통보는 1633년(인조 11년에 처음 만들어 쓰다가 1678년(숙종 4년)에 두번째로 만들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해서 쓰던 엽전이다.
이 엽전을 매듭줄로 매어 그 아래에 용두문 고리에다 연결하였으며 이 용두문 고리 밑으로 복주머니 형태의 동판이 걸려 있다.
복주머니 형태의 동판 전면은 백색바탕에 청색 해태 1마리가 중심에 칠보되어 있고 가장자리에는 새, 꽃, 나무 등의 문양이 적색, 황색, 녹색등으로 칠보 되어있다.
그 아래로 수복강녕, 부귀다남 등 길상적인 문자들이 청색, 녹색, 적색으로 칠보되어 새겨져 있다. 뒷면은 청색 바탕에 적색의 몸통과 녹색의 날개를 그린 박쥐 5마리가 칠보기법을 사용하여 동판에 음각되었으며, 중심부에는 황색 원형 속에 적색 만자(卍字)문양이 칠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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