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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서화로 그린 선조들의 자화상

인물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1606~69)는 초상화에 대한 관심을 자화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628경, 1629, 1640, 1652, 1658, 1661경~62, 1669년 등 평생에 걸쳐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모두에서 대상의 내면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서정적 연민을 엿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보스턴의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런던의 국립미술관, 빈의 미술사박물관, 런던의 켄우드하우스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자화상(自畵像, A Self-Portrait)’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를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영정을 자화상으로 남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 공재 윤두서(1668~1715)가 그린 자화상(윤두서상 尹斗緖像, 국보 제240호)은 정면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초상으로, 역대 조선의 초상 중에서 획기적인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이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 ‘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 ‘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선생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예술을 벗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그의 그림은 조선후기 회화의 선구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자화상은 사실적이면서도 화가의 내면을 깊이 꿰뚫는 듯한 얼굴 묘사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자화상은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그래서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 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과 함께 조선시대의 자화상의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강세황영정(보물 제590호)은 조선 후기 대표적 문인 서화가인 강세황이 직접 자신을 그린 자화상과 이명기(이명기 필본, 李命基 筆本)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강세황의 초상화 등 2폭의 영정이다.

 

 

 

 

 자화상의 크기는 가로 51㎝ 세로 88.7㎝이고, 다른 초상화는 가로 94㎝ 세로 145.5㎝ 크기이며, 모두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강세황(1713-1791)은 시,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자화상은 검은색 관모에 진한 옥빛의 도포차림의 모습이고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는 관복에 관모를 착용했다.

 자화상은 강세황의 7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다른 한 점의 그림은 입고 있는 옷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가 죽은 뒤 그의 자화상을 보고 영정 그림에 뛰어났던 이명기가 그린 것이다.

 한편 사모관대정장본(紗帽冠帶正裝本)인 전(傳) 이명기(李命基) 필(筆) 강세황(姜世晃) 초상화 역시 위에서 말한 자화상과 얼굴의 전체 각도에서부터 시선 처리까지 얼굴 모습은 똑같은 양태를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이 화상은 제기(題記)로 미루어 그의 71세상(歲像)임을 알 수 있는데, 어제제문(御製祭文)이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상(像)은 자화상을 보고 화사(畵師)가 사후 추화(追畵)한 본(本)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초상화는 화법상 완전히 명암법으로 그려졌는데, 의습처리(依褶處理) 역시 앉음새로 인해 그늘질 수 밖에 없는 흉배 밑과 양 무릎 사이, 나아가 흉배도 양팔과의 연접 부위(連接 部位)를 어둡게 시채(施彩)하여 소위 그림자에 대한 경험적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또, 조선왕조 전반을 통해서 초상화에서 거의 나와 있지 않던, 간혹 예외적으로 나온다 해도 아주 소홀하게 취급되던 손이 이 화상(畵像)에서는 얼굴이나 의복과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비례에 어긋남이 없이 손가락 마디마디의 생김새까지도 여실히 재현되어 있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조선시대 전반기까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회화사적으로 볼 때 의미 있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영정(金時習影幀, 충남 유형문화재 제64호)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초상화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21세 때에 수양대군(후의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불교에 입문하여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다 입적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교, 불교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여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신(傳神)’이 탁월하게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 코, 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는 현재 몇 점 밖에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원본을 본떠 그린 것이거나 덧칠을 한 것이 많은데, 이 초상화는 원본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그의 저서인 ‘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