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존재하는 문서는 그 언어 및 표기 문자 체계의 조합에 따라 문자를 써나가는 서자 방향이 다르다.
이 방법은 크게 가로쓰기 횡서와 세로쓰기 종서로 나누어진다.
가로쓰기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좌횡서와 그 반대로 쓰는 우횡서로 나뉘어지고, 세로쓰기에는 행갈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는 좌종서와 그 반대로 하는 우종서로 나뉘어진다.
문자가 정방형의 네모칸 안에 쓰여지는 형태는 한자문화권의 특징으로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편액(扁額)은 흔히 현판(懸板)으로 통칭된다.
대개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도 하지만 글씨의 경우 세로로 쓰기도 한다. 편(扁)자는 원래 서(署)의 뜻으로, 문호(門戶) 위에 제서(題書)함을 가리키며, 액(額)자는 이마의 뜻이다. 건물의 ‘이마에 건다’는 뜻을 따서 편액(扁額)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복궁 등의 궁궐이나 해인사 등의 사찰 같은 유적지에서의 현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은 가로쓰기 현판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숭례문 현판처럼 간혹 세로쓰기의 용례가 보인다.
우리 도성의 성문이나 궁궐의 문, 그밖의 각종 건축물엔 그 의미와 유래를 담은 현판이 걸려 있다.
8개의 도성 출입문이 완성됐으니 북쪽 문은 숙정문(肅靖門, 뒤에 肅淸門), 동북쪽 문은 홍화문(弘化門, 동소문), 동쪽 문은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동남쪽 문은 광희문(光熙門, 수구문), 남쪽 문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서북쪽 중간의 작은 문은 소덕문(昭德門, 서소문), 서쪽 문은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서북쪽 문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했다.
현판은 보통 가로쓰기에 3자 내외. 그런데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 현판은 가로로 쓰는 관행을 어기고 세로로 써서 내걸었다.
숭례문 현판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서체가 장중하면서도 단아하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 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세로 현판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화제와 연관성이 있는 듯 싶다.
숭례문(崇禮門)에서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낸다. 숭례는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가 된것이다.
한양은 풍수지리적 특성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허약하며, 조산(朝山)이 되는 관악산이 지나치게 높고 화기가 드세다는 약점을 지닌다. 특히 관악산은 그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가 화산(火山)의 기운을 지닌다.
따라서 남대문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인 ‘숭(崇)’자와 오행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예(禮)’를 수직으로 포개어 놓아 관악산이 뿜어내는 화기를 막고자 했다.
이렇게 되면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 다스린다(以火治火)’는 뜻을 온전하게 구현하게 된다고 믿게 된것이다. 하지만 지난 2월 11일 6백여 년의 위용을 자랑하던 숭례문은 한순간에 화마가 삼켜버렸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현판을 세운다 해서 무슨 화기를 막겠느냐”며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유독 숭례문 현판을 세운 까닭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한 논어에서 유래한다.
‘태백편(泰伯篇)’에서 공자가 남긴 말 중 하나로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는 말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유교의 가치 이념을 음양오행설에 접목해 서울성곽 문 이름을 지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들은 남쪽에 예(禮)를 배정해 이를 활용한 숭례문이란 이름을 지으면서 그 현판을 세우게 된 까닭이 바로 이 논어 구절 중 '입어례(立於禮)'에 있다는 권교수의 설명.
다시 말해,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로로 현판을 만드는 것은 건물 구조상의 문제 때문이라는 서예가 서홍식씨의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을 갖고 있는 대목이다.
금산사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을 보게 된다. ‘모악산 금산사’ 역시 세로 현판이다.
금산사는 인진왜란 때 뇌묵당 처영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중심지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유재란때 왜병들에 의해 모두 불태워졌는데, 그때 금강문만이 유일하게 불타지 않았다.
금산사 가람의 중심에 자리한 대적광전 외부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대적광전’ 현판도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선생이 1991년 세로로 썼다.
‘흥천사 명부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7호)’의 현판도 세로다. 붉은 바탕에 금(물)로 된 힘차고 당당한 세로 글씨는 고종 황제가 썼다고 한다. 역시 연산군 시절에 화재로 전소되면서 자취를 감춘 적이 있었다.
창덕궁 주합루 남쪽 정문의 ‘어수문(魚水門)’도 세로 현판이다.
어수문은 ‘삼국지’의 ‘촉지. 제갈량전’에서 유비가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 데서 ‘임금과 신하가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 긴밀히 의기투합한다’는 뜻에서 지어졌다.
창덕궁 대조전 후원 굴뚝의 중앙에는 ‘영세만세(永世萬歲), '만수무강(萬壽無疆)’이 세로로 쓰여진 까닭에 참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서도 세로로 쓰인 현판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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