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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홍예(무지개)가 들어가는 문화재

 

 

홍예(虹霓, 무지개)는 일곱 색깔의 무지개로 희망과 복락의 상징물로 보여진다.

 무지개 모양의 문, 홍예문(虹霓門). 무지개 모양의 다리, 홍예교(虹霓橋). 숭례문(국보1호), 흥인지문(보물1호), 광화문의 석축(石築)엔 홍예문이 있고 불국사 백운교나 창덕궁 금천교는 다름아닌 홍예교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홍예’. ‘아치’라는 외래어로 더 익숙한 이 홍예가 우리 전통 석조건축에서 ‘약방의 감초’격이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 였을까.

 그 비밀은 무엇보다도 완벽할 정도의 견고함과 빼어난 아름다움에 있다. 홍예는 좌우에서 돌을 쌓아 올라가다 맨 위 가운데에 마지막 돌, 즉 이맛돌을 끼워 넣음으로써 완성된다. 이 이맛돌만 빠져나가지 않으면 홍예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건물이나 성벽이 무너져도 홍예는 건재하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홍예에선 돌과 돌 사이에 모르타르와 같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돌이 허공에 떠있는 셈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길쭉한 돌은 세워서 기둥으로 사용하면 강하다. 그러나 그 돌을 수평으로 눕혀 다리의 상판으로 사용하면 약하다. 휘어지거나 부러질 위험이 크다. 이것이 돌의 특성이다. 홍예는 이같은 돌의 특성을 제대로 간파해 돌을 아치형으로 쌓았다. 그러면 위에서 가하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붕괴 위험이 거의 없다.

 홍예를 ‘고도로 발달된 건축 구조’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축 재료가 별로 발달하지 않아 주로 돌을 사용해야 했던 그 먼 옛날, 선인들은 돌에 대해나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완벽한 건축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홍예의 멋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고풍스럽고 깔끔한 무지개 모양이 연출하는 빼어난 아름다움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홍예의 매력이다.

 

 

 ‘과학성과 미학의 조화’라는 특성 때문인지 홍예는 현대 건축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현대건축의 홍예는 콘크리트 등으로 무지개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돌을 붙인 것이 대부분.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홍예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다리는 어느 다리 일까. 창경궁에 있는 옥천교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을 지나면 맨 먼저 만나는 다리다. 여타의 궁궐처럼 북쪽에서 발원한 옥류천이 대궐을 휘감아 흐르도록 하고 돌로 만들어진 다리다.

 옥천교는 1483년(성종 14년)에 건립된 다리로, 두 개의 홍예와 그 사이에 귀면이 조각되어 있으며 다리 네 난간에는 돌짐승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원형 보존과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궁궐에 있는 다리로 유일하게 보물(제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사적 제3호) 화홍문(華虹門,일명 北水門 북수문)은 수원천을 가로 질러 세워져 흐르는 수원성이 관통하도록 만들어졌으며, 무지개 다리에 빗물이 배수되도록 7개의 누로를 조성했다.

 ‘화(華)’자는 회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로,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에서 피어나는 무지개빛이 화홍문을 한층 아름답게 하는데, 이를 두고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힘을 알것 같다.

 원곡 김기승이 쓴 화홍문 글씨 바로 아래로 무시무종 무늬 등이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화홍문 아래 좌우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니 백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울같이 맑은 물에는 공중에 달이 뜨면 물 속에 달이 잠겨 있고, 공중의 무시무종의 무늬도 달빛 아래 서로 만나 출렁거린다.

 청도 석빙고는 보물 제323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석조물이다.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깊이 파서 만든 저장창고인 석빙고의 바닥은 사각형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얼음이 녹아 생긴 물이 자연스레 석빙고 밖 개천으로 흘러들어가도록 설계돼 있다. 

 흙이 두껍게 덮여 있어 천장 구조물을 볼 수 없는 것이 원형이나 청도석빙고는 천장의 흙이 무너져 없어지고 반원으로 만들어진 홍예 4개만이 남아 있다. 돌을 잘라 둥글게 맞물린 천장 구조물인 홍예를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경북 경주시 진현동, 국보 제23호)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 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암사 승선교(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보물 제400호)는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 있다.

 

 

 흥국사 홍교(전남 여수시  중흥동, 보물 제563호)는 부채꼴 모양의 돌을 서로 맞추어틀어 올린 다리 밑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이루고 있다.

 영산 만년교(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보물 제564호)는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라고도 불리운다.

 건봉사 능파교(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보물 제1336호)는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며, 육송 정홍교(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 보물 제1337호)는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한 단칸 홍예교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조선시대 석조 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한루원(전북 남원시 천거동, 명승 제33호)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1419년(조선 세종 원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됐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했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홍예)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노면은 크고 작은 장방형 돌로 모자이크하듯 리듬있게 구성돼 있다. 

 금산사에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인 홍예문이다. 그 이름이 무지개를 뜻하는 것처럼 둥근 아치형을 그리고 있다.

 금산사 매표소에서 150여m 진입하면 흉물스런 형태로 방치되어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홍예문 일명 무지개문이 복원된다. 일부 돌무덤이 무너져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던 홍예문이 복원되는 것이다.

 김제시는 홍예문의 복원을 위해 국비 2억9천만원, 도비 6천3백만원, 시비 6천3백만원 등 총 4억2천만원의 예산을 확보 내년 말 완공을 목표로 복원 사업을 한다고 밝혔다.

 석성문, 견훤문으로도 부르는 홍예문은 금산산성과 함께 축조된 것으로,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유배 감시하기 위해 금산사에 감금하고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는 있으나 고증되지는 않았다. 

  축성 시기는 후백제 견훤왕 44년(AD 935년)경 금산사성을 축조할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때 견훤이 금산사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로 미뤄볼때 부왕을 안전하게 감금하기 위해 그의 장자인 신검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고증은 이뤄지지 않은 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본래의 모습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훼손된 바 있다.

 홍예문은 아취형 석문으로 장대석과 난석으로 축조됐으며, 현재는 크게 훼손 유실된 천정 부분에 긴 장대석 2개가 얹혀있고 가로 3m, 세로 2.7m정도의 석축이 남아있다.

 후백제 견훤왕 당시 돌로 쌓아 만들었다는 석문(石門)의 예스러운 모습은 마치 옛 정취를 흠뻑 느껴보라는 듯,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어서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다.

 완주 위봉산성(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사적 제471호). 이는 송광사에서 동북쪽으로 3Km쯤 가면 원래 외성이라 했다는 오성마을이 나오고 여기서 추줄산을 돌고 돌아 1.5Km쯤 오르면 서문에 다다른다.

 다행인 것은 문위에 있었다는 3칸의 문주는 자취를 감췄지만 높이 3m 폭 3m의 홍예석문이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점이다.

 이 산성은 1675년 7년의 세월동안 인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국토방위라는 목적보다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지만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 영정을 피난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국 동학농민혁명 때 태조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 산성축조의 목적을 달성한 바 있다. 지금은 극히 일부의 성벽과 동서북문 중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무지개문을 빠져나와 위봉마을을 지나면 옛날  52개의  말사를 거느린 호남의 모사(母寺) 위봉사가 있다.

 남원 교룡산성(전북 남원시 산곡동,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 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3120m이다.

 동쪽으로 계곡이 있어 가장 중요한 통로였고 현재 동문의 홍예와 옹성,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 산성을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축성의 택지나 형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백제의 축성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성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전기에는 군대의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