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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유상곡수 유배거의 낭만

아주 먼 옛날의 정자도 없어지고, 이곳을 찾았던 옛 사람들도 다 떠났지만, 유배거(流盃渠)에 둘러앉아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지었던 멋은 한국인의 마음에 길이길이 남아 있다.

 

 

 유배거란 정원에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시설을 말한다. 유상곡수연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으로 당도하기 전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짓고 즐기는 풍류놀이로 우리나라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즉, 물 위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가 바로 유상곡수연이다.

 유상곡수연의 원류는 중국에 있다. 서기 353년 3월 3일 절강성 사오싱현 후이치산 북쪽에 란정(蘭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당시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 등 명사 42명이 이 곳에 모여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행하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 이때 읊은 시를 모아 서문을 왕희지가 썼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회기(蘭亭會記)의 난정집서(蘭亭集序)로 알려져 있다.

 음력 삼월 첫 사일(巳日, 뱀날)을 보통 상사일(上巳日)이라고 한다.

 유상곡수를 행하는 날이 원래 상사일이었으나 중국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조(曹)나라, 진(晋)나라 때 와서는 음력 3월 3일(삼월 삼짓날)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때가 되면 백성들이 액막이(수계)라 하여 물가로 모여드는 데, 이 때 유상곡수하여 술을 마시는 일이 행해졌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잔을 띄우면 흘러 돌아오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경북 경주 포석정지(사적 1호)는 바로 왕희지 등의 유상곡수연과 중국 왕궁의 유배거 시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창조해낸 신라 특유의 독특한 시설이다.

 포석성지는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현재 유배거의 머리 쪽에 큰 느티나무 뿌리가 수입구(水入口) 쪽을 밀어 올려서 높아진 상태이며 흘러 나가는 배수구 쪽은 포석계의 개울에 유실되면서 급속히 낮아져 있다.

 포석정지의 전복같이 된 유배거는 그간에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유배거에 인수(引水)한 물은 남산 포석계의 개울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대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이 유배거에 물을 담아 술잔을 띄워본 결과 술잔의 크기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술잔 속에 술을 담은 양에 따라 다르며, 절묘(絶妙)한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타원형의 수로를 술잔이 흐르는 시간은 약 10여분이 걸리었다. 이 시간이면 오언시나 칠언시 한 수는 쓸 수 있도록 했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보면 ‘헌강왕이 포석금에 놀러나와 남산신의 춤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했다’ 한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 4년(927년) 11월, 왕이 포석정에 나가서 잔치를 하고 놀다가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왕은 죽고 왕비와 신하들이 모두 함몰되는 비극의 기사가 실려 있다.    유상곡수연을 하는 장소의 풍치는 험한 산과 무성한 대숲과 맑은 개울이 여울을 이루는 그런 경승지이다.

 포석정지의 유적은 ‘어무상심무’라는 신라 춤이 생겨난 현장이며 시회(詩會)를 하는 청유(淸遊)의 장소인 것이다.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을 하던 놀이공간이 아닌,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이러한 시설은 왕족이나 귀족층의 놀이 시설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유배거는 중국 북경의 고궁(古宮)에도 있고 일본 나라시 평성궁유적에도 있으며, 조선의 창덕궁 옥류천의 소요암에도 있다.

 조선시대의 유상곡수연에 관한 기록은 인조 때의 문인 홍석기의 ‘만주유집’을 비롯한 여러 문집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처럼 유상곡수연은 시흥과 취흥을 즐기는 풍류놀이로 옛 선비들 사이에 애호된 것이다.

 ‘여러 신하들과 내원에서 꽃 구경을 하면서 시를 읊게 하다’는 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3월 20일 2번째 기사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이 내원(內苑)에서 꽃 구경을 하려고 시임과 원임의 각신과 아울러 그들의 자제들을 부르고, 또 일찍이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 약간 명을 특별히 불러서 39명의 숫자를 채웠는데, 이는 대체로 이 해가 계축년이고 이 달이 늦봄이어서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하는 뜻에서였다. 여러 신료들에게 명하여 내원의 여러 경치를 마음껏 둘러보게 하고 옥류천(玉流泉)이 굽어도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서 술과 음식을 내리고 각기 물가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게 하였다. 그리고 상이 진(晋)나라 사람들의 난정 모임에서 지은 시부(詩賦) 사언(四言), 오언 두 편을 여러 신료들에게 명하여 자신의 소장에 따라 짓게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그리하여 한 때에 태평 시대의 훌륭한 일이라고 전해졌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엔 고산 윤선도가 소요하며 자족을 얻던 세연정(洗然亭)과 곡수당(曲水堂), 세연지(洗然池),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한 낙서재(樂書齋), 사색의 터전인 동천석실(洞天石室) 등의 유적이 있다.

 곡수당은 낙서재 건너 계곡가에 있다. 그의 아들이 조성한 초당, 석정(石亭), 석가산(石假山), 연못, 화계(花階), 다리 등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이다.

 최근 유상대(流觴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현장(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577-2번지 일원, 감운정(感雲亭) 옆에 유상대유적비가 있다)에서 발굴조사를 하기도 했다.

 유상대지는 과거 통일신라시대의 학자로 정읍지역의 태산태수(칠보 등, 재임 890년 전후로 890-893년)를 지낸 고운 최치원 선생과 검산대사가 유상곡수연을 즐겼다는 곳이다.

 발굴 조사는 1995년 8월에 이어 2004년 4월 초, 레이저 전자 탐사를 통해 시굴조사를 한 결과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렬(石烈) 구조가 발견됨에 따라 시작됐다. 2005년 11월 8일부터 지난 2006년 3월 16일까지 5개월 동안 발굴하는 과정에서 동, 남, 북쪽 외각에서 석렬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북쪽 석렬 구조 남쪽에선 적심석(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으로 추정되는 유구(옛날 토목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 1기가 발견됐지만 기대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조선시대 조지겸, 조항진 등이 유상대에 정자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발굴 당시 조사된 유구는 1682년, 또는 1738년 당시의 유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신필화가 채용신선생이 그린 칠광십현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송정은 조선조의 광해군때 폐모사건에 항소한 세속 7광(七狂, 김대립, 김응윤,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 10현(十賢, 김응윤, 김관, 김감, 김급, 송치중, 김우직, 송민고, 양몽우, 이탁, 김정)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에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이라 한다)에 유상대가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치원 이후 근 1천 여년 동안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다가 1735년(영조 11년) 대홍수를 겪으면서 퇴락하기 시작, 점점 옛 모습을 잃어 현재 정확한 위치와 그 규모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유상대지는 칠보 유상곡수의 수로터에 감운정 정자가 자리잡고 있어 유상곡수의 옛터임을 시사하던 곳이다. 특히 유상대는 돌 홈을 파서 만든 인공적 성격의 ‘포석정’에 비해 동진강 물을 끌어들여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 칠보 8경에 꼽힐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전북 전주시 등이 창덕궁 비원 옥류천의 소요암, 물이 흐르는 S자 수로는 16세기 기로연시화첩(碁老宴詩畵貼) 등을 각각 참고해 물이 흘러내리는 토수구(土水口)를 만든 후 유상곡수연을 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