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이 가을 어디 만큼 흘러가고 있는가. 모악산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동물과 식물, 나무와 벌레 등이 함께 고운 화음을 빚는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들이 그 순간 살아 있는 ‘생명의 노래’, ‘환희의 노래’ 되어 내 맘에 작은 울림으로 스며든다.
판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김철수(54. 한국미술협회 판화분과 이사)씨는 때론 섬세하게, 때론 둔탁하게, 혹은 거칠고 과감한 생략을 통해 작가 특유의 은유적 세계를 ‘판(板)’이란 매체로 소화해내고 있는 작가다.
판화 ‘모악의 생동’은 모악의 사계절을 담아내되, 세밀함에 치우치지 않고 화면의 배경을 강조시킴으로써 그 형상이 움직이는 생명력을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이다. 온갖 나무와 풀, 메뚜기, 개구리, 잠자리, 나비, 벌이 여기저기서 자유분방하게 노닐고 있다.
모악은 수레바퀴처럼 유전하고, 그 속에 솜이불 구름이 분홍색으로 곱게 물든 이른 아침, 하늘 뒤덮은 춤사위 장엄함에 넋을 잃는다. ‘가을, 모악의 길 위’에서 나지막하게 시인의 노래를 불러보는 즐거움. 모악산의 형태를 굵고 가는 선으로 단순화시킴은 물론 칼맛을 이용하여 무한한 잠재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탕으로 표현한 ‘환희’는 산의 형태를 어둡게 처리, 강한 힘으로 꿈틀거리는 산자락을 강조한 듯.
“작품의 주제는 ‘자연의 숨결과 그 속에 넘치는 꿈틀거리는 생명력’입니다. 자연의 소재 가운데, 특히 산을 즐겨 그리고 있는데, 곧 이것이 판화로 고스란히 옮겨진 것이죠. 또, 서양화를 하면서 산의 형상을 중시해왔다면 판화는 이를 단순화시키는 작업의 연장인 셈이죠”
“판을 찍어 나왔을 때의 기쁨은 또 다른 체험으로 다가온다”는 작가는 그동안 꾸준히 서양화를 해온 까닭에 판화에 회화성과 감각이 프레임 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 특히 판에 의해 작품을 찍지만 의도하지 않은 작품이 탄생하는 창작의 기쁨을 맛봄은 물론 입자가 한없이 예쁘기 때문에 대중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자연의 소리’는 흑백의 대비를 강조한 작품이며, ‘생명의 소리’는 우리가 처음부터 잊고 있었던 생명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함을 묘사한 혼의 세계. ‘회문산의 숨소리’는 첩첩산중의 사찰에 스님의 모습이 보인 가운데 어떤 신앙적 영감으로부터 오는 테마로, 회귀를 갈망하는 인간의 향(香)같은 생명의 소리 또는 그냥 스쳐가는 바람 소리를 표현한 작품. 붉은색으로 정렬적이고 강한 힘, 따사로움, 그리고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보해냈다.
한겨울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쳤던 격포의 적벽강은 ‘바람의 소리’로 혼을 담았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했지만 저 자연은 마치 땅이 숨을 쉬듯이 하늘이 숨을 토하는 듯한 모습 바로 그 자체.
“옛날 학창시절 운동장에 있는 수도꼭지를 입에 대고 물을 먹으면서 거꾸로 하늘을 쳐다볼 때 또다른 세상이 보이지 않았던가요. 20여 년간의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몇년 전부터 전업작가로 전향한 제가 작품을 하고 있다는 게 정말로 행복합니다. 오늘도 대자연과 벗하면서 삶의 의미를 새록새록 발견하고 있습니다”
‘가을의 향연’은 향기로운 소리로, 빛으로 온 세상에 충만함을 선사한다. 그 ‘맛’이 차마 꿈엔들 잊히랴. 이제 막, 나무들이 마지막 향연을 할 채비를 마쳤다. 저 고갯길에서 달빛사랑 여행을 누려보라고 종용한다. 세상의 생각을 잠시 멈추고 자연의 품에 몸을 내맡긴채 고요히 마음을 관조하노라면 선계(仙界)의 청학이 날개짓하는 듯 ‘물외(物外)의 세계’를 소요하는 우리는 어느 새 적송자(赤松子, 상고시대의 신선)가 되어 시공을 넘나들고 있음을 인지한다.
서양화 ‘내장산’에 시나브로 꽃물들고 있다. 이내 깊어가는 가을 그 절정 속을 마구 달리고 싶다. 낙조와 어우러진 ‘시닉 드라이브(scenic drive, 경관 좋은 길)’는 우리 모두의 바램인 만큼 붉그스레한 잎들 앞에 다가선다면 마음결을 물들이고도 남으리라.
연못 속을 물고기떼는 가을 하늘을 가득 담아서인가, 어느 때 보다 정겹다. 붉은 기운이 온누리에 번져나고 있는 진풍경 앞에 서있어 더욱 더 황홀해지는 내 심사. 오늘, 멀리서 보내온 한 통의 가을 편지 구절초마냥 쓸쓸하다.
그러나 세월마저 녹이고도 남을 이 계절의 푸른빛은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토방에 살포시 내려앉은 가을볕, 너무 따사로와 허수아비의 친구. 찬란한 기쁨에 차라리 울고 싶어라. 그대! 이 가을, 어디 만큼 흘러가고 있는가. 전민일보 이종근기자
1.작가의 말
자연과 인간을 소재로 표현하고 있다. 초자연과 만날 때 현저하고 노골적인 자유가 깃든다. 침묵과 응시를 통해 내면의 은밀성을 표출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가치가 발현된다. 제멋대로인 것 같은, 그러나 참으로 완전한 조화, 그리고 생명력, 이것이 작품 속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주제다. 요즈음 예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실험성과 작위성, 창조성, 진실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면서 자신을 추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닮은 삶, 온 세상에 충만함으로 일렁이고 있다.
2.원로 서양화가 박남재씨의 평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전국실기대회에서 최고상과 우수상을 싹쓸이 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됐다. 일찍이 다하지 못한 점(點)과의 싸움이 커보였으나 열기와 정열이 가득해 정신이 들었구나 하는 커다란 희망을 갖고 고갱과 고호의 이야기를 길게 나눈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한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붓을 들지 못했던 그가 환경을 잘도 극복하고, 열심히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성(大成)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3.작가가 걸어온 길
순창 출생
개인전 4회(서양화 및 판화, 전주, 대전)
원광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한남대학교 대학원(판화 전공) 졸업
전국 대학생 미술실기대회 전체 대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전북미술대전 입선 2회, 특선 3회, 우수상, 종합 대상(문공부장관상), 심사위원, 초대작가
남서울대학교 겸임교수
(현) 한국미술협회 판화분과 이사, 전북미술협회 판화분과 이사
(현) 전주 우석대학교 출강, 노령회 회장, 전주 판화공방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