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땅은 매우 붉다. 남쪽 끝에 가까울수록 더욱 붉다. 온통 붉은색의 파노라마다. 눈이 녹은 길은 길 양쪽의 하얀 눈이 녹지 않은 채로 있었고, 가운데 길만 녹아서 마치 불타는 듯 밝게 빛나고 있다. 매우 선명한 붉은 흙빛은 하얀 눈들을 더욱 하얗게 빛나게 하고 있다.
그 하얀 눈과 붉은 길의 대비만으로도 충분히 삶의 기쁨이 되곤 한다. 여름이면 풀숲과 붉은길의 대비는 마티스나 고갱의 그림보다도 더 강렬한 원색들의 힘을 발산해주고.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색채의 감각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풍부하다.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는 황토를 이용하여 종이와 목재에 물을 들이셨고, 액을 쫓아내기 위해 집 주변에 군데군데 황토를 놓고 쑥으로 불을 피웠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황토흙에서 재배한 봉동생강은 육질이 단단하고 크며 고유의 매운 맛이 있어 향기가 강하고 진안 인삼 역시 이들의 피붙이다.
서예가 이용엽(전주문화원 부설 동국진체연구소장)씨는 필묵의 기운생동으로 향토색이 짙은 서예가로 항상 붉은 꿈을 꾸고 있는 작가.
근본적으로 삶, 특히 민초 혹은 잡풀의 삶과 이를 떠받쳐 주는 고향으로서의 대지, 그리고 그 위를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세월에 초점을 맞춰진 무수히 많은 작품을 잉태하고 있는 것.
작가는 가장 한국적일 때 세계적일 수 있다는 명제를 우리 안으로 확장하면, 가장 지역적일 때 전국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전라도의 힘’을 찾는 길이라면 두 번 주저하지 않고 발품을 팔고, 옛 문헌을 샅샅이 훑는 한편 작품으로 고스란히 옮긴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려 하고, 제주 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에 둘러 있다. 태인하신 우리 성군…’
작가가 즐겨쓰는 ‘호남가’. 호남가를 이서구가 지은 것인지 신재효가 지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명창 임방울이 부른 후로 더 유명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호남지방 54개 고을의 이름을 빌려 지은 노래로, 각 고을의 지명을 들어가며 각 고장의 특성과 자연을 노래해 호남인의 정서와 전라도의 산천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판소리 단가로 널리 알려지기도.
호남가는 특히 한말에서 일제시대까지 고향을 그리는 향수로, 나라 잃은 한을 달래는 비원으로, 때론 민중들이 희망을 담아 애창했던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가는 54개 고을이 실타래 풀리듯 운치의 향연으로 이끈다. 함평에서 시작하여 임피에서 끝나는 가사 내용처럼.
호남에서 나서 살고 있는 것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러니 우리 호남사람들은 누구나 판소리 ‘호남가’를 힘차게 부를 줄 알았으면 좋겠다. 얼씨구! 좋다! 오늘도 모두가 평화롭게 살자는 함평(咸平)한 세상은 인류 최고의 이상은 아닐까.
작가는 이산구곡가, 정담장군 유서 등의 작품을 통해서도 황톳빛 냄새 진하게 풍기고 있다.
“조선조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학문을 흠모하듯이 주자가 만년에 구곡을 경영한 사실을 따름으로서 주자의 삶의 양식과 학문적 경향을 따르고자 했다. 사대부들은 주자의 정사경영을 본받아 산수 자연을 벗할 수 있는 향촌에서 구곡(九曲)을 경영하며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수신후 때가오면 치인하고자 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구곡이 경영됐다.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 구봉 송익필의 주자구곡, 곡운 김수증의 곡운구곡,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 이강의 덕동구곡, 화서 이항로의 벽계구곡, 의성 김씨 천전파(학봉 김성일)의 반변구곡, 도와 최남복의 백련구곡, 우이동구곡, 봉래구곡, 용호구곡, 용하구곡, 운선구곡, 와계구곡, 그리고 이산구곡가(후산 厚山 이도복(李道復, 1862-1938)은 한말의 거유(巨儒)로 이산구곡 ?山九曲) 등을 잉태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김제군수로서 호남의 요충지인 전북 진안군 부귀면 웅치(熊峙, 곰티재)에서 1천명도 못되는 병력으로, 왜군과 중과부적의 격전을 치르다가 전사한 정담(鄭湛·1548-1592)장군.
정장군의 진중어록 ‘차라리 적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걸음 물러서서 삶을 구하지 않겠다(寧加殺賊而死不可退步而生)’는 글귀를 대신한 정담장군의 유서도 살아 꿈틀거린다.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은 전북출신이 아니면서도 임피현령을 지냈고, 김제군수(4년) 시절에는 이 지역 서예사의 대부격인 명필 송일중(宋日中)의 스승으로 전북서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 이에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특히 그동안 전북서예의 맥을 송일중으로부터 이어왔다고 학계에서는 주장하고 있으나 송일중이 전북서단에서 우뚝 설 수 있기까지는 해박한 학문과 많은 금석 자료를 수집하여 국내에서 최초의 금석자료를 수집 정리한 ‘금석청완(金石淸玩)’의 연구도 시급하다”
황토 들판 옆으로 푸른 배추밭, 그리고 파아란 하늘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오늘, 서설이 내릴 듯한 기운 도무지 지울 수 없다. 글=이종근기자, 사진=사진작가 유연준
1.작가의 말
금석문은 금속이나 돌로 만든 유물에 남아있는 명문(銘文)을 말한다. 오늘도 옛 조상들이 남긴 것들을 알아채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길가에 돌 하나만 서있어도 무조건 차부터 세우고 본다. 그러나 비석 하나로 몇 천년 역사가 새로 쓰이기도 하는데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는 까닭이다.
금석문 연구가 필요한 것은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이 적은 고대사에서 더 큰 가치를 발휘하기 때문. 금석문을 풀려면 탁본도 잘해야 하고 한자해석은 물론 역사적 배경까지 알아야 하는 만큼 학문의 기초가 되며 서예술의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다.
2.작가가 걸어온 길
진안 출생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및 각종 공모전 20여 회 입,특선
한국서도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장, 운영위원장
한국미술협회 진안지부장
진안군민의 장(문화장) 수상
한국서도협회 초대작가상 수상
‘전북미술대전 30년사’ 등 발간
(현) 한국서도협회 이사, 전북도립미술관 운영위원, 전북서도대전 운영위원장
(현) 전라금석문연구회 고문, 전북역사문화학회 부회장, 전주문화원 부설 동국진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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