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전주 하마비와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 만마관(萬馬關)
△ 전주 하마비
예전에 세워진 사찰의 일주문이나 천왕문 앞에서 종종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는 의미의 ‘하마비(下馬碑)’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마비가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곳이므로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로 세워 두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있습니다.
전주에는 경기전 등 모두 5개의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어르신은 전주향교 앞의 것입니다.
한옥마을의 기와집에 흐르는 빗물은 지금까지의 발자국들을 씻어 내리고 나는 또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어 냅니다.
또 씻겨 지면 그만일 것이지만 그것이 씻겨 진다고 내 발자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빗속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의 또 다른 모습은 답답했던 가슴을 탁 트이게 합니다. 한없이 작은 공간에서 아등바등 거리며 살았었나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일이 쉬운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작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미리 겁부터 먹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직 희망이 남았는데 미리 포기부터 하진 않았었는지 하마비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냉정하게 뒤돌아봅니다.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다 내 중심으로 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일이 다 세상 중심이 된 것 같습니다. 나이 탓은 아닐까요?
하마비는 욕심을 내리고, 잘 난체 하는 내 마음을 가볍게 풀어헤치는 죽비로소이다.
꽃은 피워야 하고 술은 마셔야 하고, 님은 만나야 하고, 물은 흘러가야하고 하마비 앞에서는 내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다소 위엄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네 이놈 어서 내려라’ 우리네 삶의 죽비같은 존재가 하마비인가요?
△전주향교 하마비
전주향교(全州鄕校, 사적 제379호)는 오목대 밑자락 기린로 변에 있습니다.
설립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는 풍남동(경기전 북편)에 있었습니다.
이곳의 하마비는 1519년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지상 높이 198cm, 폭 49cm, 두께 30cm의 크기로 전면에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뒷면에 ‘정덕기묘구월일입(正悳己卯九月日立)’이라 새겼으니 중종 14년(1519년)에 해당됩니다.
△관성묘 하마비
전주 관성묘(전북문화재자료 제5호)에도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모시는 사당으로 주왕묘, 관제묘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 장군 진인이 관우신장의 가호를 받는다고 믿고 자신이 있던 곳에 묘를 세워 관우의 신상(神像)을 안치한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전주에는 1895년(고종 32)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 이신문이 유지들의 헌금을 받아 건립합니다.
입구엔 앞쪽에 대소인원개하마라 쓰여 있고, 옆면엔 광서17년(1891) 신묘5월립이 라고 쓰인 하마비가 있습니다.
사당 안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그 양쪽 벽에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관우의 신성을 믿는 사람들은 매년 초 이곳을 찾아 한 해의 행운을 점치기도 합니다.
△ 경기전 하마비
1614년(광해군 6년)에 세워진 하마비(전북유형문화유산)는 높이 110㎝에 폭 50㎝, 두께 25㎝ 내외로 비를 떠받치고 있는 암수 한 쌍의 동물상은 국내에서 거의 유일무이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앉아 있는 자세의 동세 파악이 섬세하며 얼굴과 수염, 꼬리, 다리 등의 조각이 세련미와 사실감을 느끼게 하는 등 석비의 조각이 전체적으로 육중하며 균형의 아름다움을 갖췄다는 평입니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하마비 2점이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하나는 읍리하마비(邑里下馬碑, 전남 완도군 청산면 읍리 931번지, 전남 문화유산자료)로 1984년 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또 전주 하나는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 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입니다.
단지 하마(下馬)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마비를 받들고 있는 두 마리 해태(또는 사자)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인만큼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이곳의 하마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까닭입니다.
하마비엔 두 줄로 ‘지차개하마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리라.
하마비가 건립된 해는 왜란 때 소실된 경기전이 중건된 1614년이며, 1856년(철종 7)에 중각(重刻)됐습니다.
경기전이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고, 그래서 근처에 있던 향교까지도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화산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이 하마비,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터입니다.
해태 한 쌍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경기전을 지키는 것은 시대를 관통해 전주 문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으면서 당신 곁에 서있습니다.
△ 조경단 하마비
조경단(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역) 하마비(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는 조선시대 정치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사적물로,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경기전 전문 밖에 방치되었던 경기전 풍비는 조경단 하마비와 대한조경단비 건립에 사용됐으며 이 과정에는 적지 않은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경기전 풍비는 광해군 6년(1614년)에 소실된 경기전 중건과 어진 환안을 기념하고자 경기전 전문 앞에 세우려 했던 비입니다.
당초 태조의 공적과 어진이 난을 피하고 무사히 돌아온 과정을 전할 목적으로 다듬어 놓았으나, 인조반정으로 비에 글을 새기지 못한 채 중단됐습니다.
이후 비 건립 상소가 이어졌으나 폐조(광해군) 때 다듬어졌다는 정치적 이유로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빈 건립을 시행하려 했으나, 비신(碑身)에 흠집이 나타나 또다시 건립이 무산됐습니다.
영조와 정조 대에 이르러서도 경기전 풍비 건립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유추해보면 비석의 흠집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며, 새로 비석을 다듬어 세우는 것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건립 명분이 약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행인 점은, 고종 황제가 즉위한 후 경기전 풍비가 건지산에 건립된 조경단의 대한조경단비와 조경단 하마비 건립에 사용됐습니다.
고종은 경기전 풍비를 시조묘역 조성과 연결해 건지산으로 옮겨 세움으로써 인조 이후 열성조에서 하지 못한 일을 해결한 셈입니다.
오랜 세월 경기전에 방치되었던 풍비는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대한조경단비와 조경단 하마비로 재탄생했다는 이충규 박사님의 설명입니다.
그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흠집 난 비신은 단 아래에 버려져 있다가 1900년(광무 4년)에 담장 밖 하마비(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대인이든 소인이든 모두 말에서 내려라는 의미)로 세워졌습니다.
그후 완전하게 지금의 자리에 안착한 것은 1972년 이환의 전북도지사때 담장을 만들 때였다고 합니다.
이곳의 하마비는 당시 정치상을 잘 반영한 사적물로, 세상에 나타내지 못하고 백비(白碑)로 묻혀 묵언(默言)으로 그 시대를 대변한 비라 할 수 있습니다.
조경단의 하마비와 조경단비는 건립 당시 다듬어진 것이 아닌, 광해조 때 만들어진 것 임을 밝혀낸 만큼 인조반정과 대한제국 수립 등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된 사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 조경묘 하마비
새 왕조의 건립을 뜻하는 ‘조경(肇慶)’의 가슴 벅찬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은 어떠했을까요.
조경묘(肇慶廟, 전북 유형문화재 제16호)는 경기전 구내 북편에 있습니다.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771년(영조 47년)에 세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세손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실의 중흥을 꿈꿨던 영조의 강한 의지로 창건됐습니다.
바로 이 무렵, 하마비가 세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마비(下馬碑)’이라는 글귀가 이곳을 지키면서 한 서린 삶을 살다간 마지막 황녀 이문용여사를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보물 전주지도(全州地圖,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능
조선 후기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관향(貫鄕)인 전주를 그린 지도입니다. 전주부의 읍성과 주변의 산세, 내부의 관아 건물들을 산수화풍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의 대표작입니다.
전주성 전체를 부감법으로 묘사하여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그 주변에 봉우리가 이어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읍성의 내부에는 관찰사의 청사인 선화당(宣化堂)을 비롯한 감영 건물과 부윤(府尹)이 집무하던 본관(本官), 객사(客舍)가 그려져 있습니다.
또,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했던 진전(眞殿)인 경기전(慶基殿)도 부각되어 있는데, 아직 조경묘가 세워지지 않은 모습이며 그 자리에 나무가 우거지고 백로 떼가 앉아 있는 것을 표현하여 상서로움을 강조했습니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9512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 만마관(萬馬關)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
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
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
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
다산 정약용 선생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지은 시구에는, 그가 광한루에 오르기 전 지나왔다는 만마관이 등장합니다.
과거 만막관이라고도 불렸던 만마관(萬馬關)은, 일만 마리의 말 곧 천군만마라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의 관문입니다.
만마관(萬馬關)은 과거 전주부성 남쪽의 중요한 관문이자 요새로, '호남제일관(湖南第一關)'으로 불리며 호남지역의 첫 관문 역할을 했던 역사적 장소입니다.
완주군 상관면에 위치하며, 산세가 험해 말 1만 마리도 숨길 수 있다고 해서 '만마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현재 복원 운동이 진행중입니다.
지어질 당시 전주와 호남평야의 미곡과 재산을 약탈하는 왜적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의 출입구였기에 그 의미와 더불어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왜적이 남원을 거쳐 임실 그리고 전주로 들어올 때 침공을 저지하는 1차 방어요새가 바로 이 만마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약용의 시구 속 언뜻 스치는 만마관 이름에는 “봄 그늘 고요하고 만발한 꽃기운으로 전쟁 대신 노래와 춤이 성한” 노래 속 평안이 층층 성벽의 철벽 요새와 그 문인 만마관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고마움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일만 마리의 말도 다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을 담은 `만마관(萬馬關)'은 잦은 왜국의 침략으로부터 전주부성을 보호하고 호남평야의 곡물수탈을 막기 위해 1811년 조선 순조때 완주군 상관면 용암마을 국도 17호선 부근에 축성됐습니다.
2층 높이의 대규모 성문으로 호남제일관으로 불렸으나 일제의 철도부설 등으로 훼손돼 현재는 성터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만마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됐던 남관진(南關鎭)은 군사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현재 남관진 조성비만 있습니다.
만마관의 ‘관(關)’은 본래 문의 빗장을 가리켰다. 즉 빗장으로 문을 닫아서 “막을 사람을 막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라에서도 관문 위에 성벽이나 대문을 세우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이곳은 “호남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수비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남원 방면에서 전주를 향하던 길손들은 관문이 닫히면 문이 열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문밖에서 하루를 지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만마관은 철저히 통제됐습니다.
이러한 길손들로 인해 관문 밖 마을에는 주막이나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고, 병졸과 부대원들 거처를 중심으로 바로 아래 쑥재에 마을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철수선생은 '만마도관(萬馬道關)'이라고 해서 완산32경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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