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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2026년 병오년(丙午年), 전북에서 말(馬)하는대로 이뤄져라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즉 붉은 말의 해이다. 십간(十干)'()'은 붉은색(양의 불)을 의미하고, 지지(地支)'()'는 말()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의 기운이 강한 붉은 말의 해라고 한다.

말은 힘과 역동성, 그리고 신성성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는데 이러한 이미지가 지명에도 다수 반영돼 있다.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전국 150만 여개 지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 744개가 말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다.

·도별로 말 관련 지명이 가장 많은 곳은 전남으로, 장성군 남면 녹진리의 마산마을 등 142곳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경북 102, 충남 100, 경남 86, 경기 80, 전북 78곳으로 뒤를 이었다.

전북의 경우 완주가 13곳으로 가장 많다.

운주면 장선리 말골, 삼례읍 삼례리 마전, 화사면 종리 마안, 종리 질마재, 소양면 명덕리 마월리, 상관면 죽림리 마자리, 이서면 이성리 마산, 구이면 항가리 마음, 고산면 성재리 마루리, 동상면 대아리 마재, 운주면 장선리 말골재, 화산면 운곡리 말목, 화산면 운곡리 말목재 등이다.

이어 순창 8, 정읍 8, 고창 6, 군산 6, 무주 6, 진안 6곳 등으로 집계됐다. 전주는 송천동 천마산, 효자동 방마동, 마전 등 3곳에 말 지명이 존재한다.

 

익산 금마산과 진안 마이산

 

말 이름과 관련된 산은 먼저 금마산(金馬山·116m)을 꼽을 수 있다. 익산시 금마면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건자산(乾子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연이은 산봉우리가 마치 말이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금마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건지산 혹은 마이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건지건자에서 와전된 듯하며, 건자는 본래의 명칭이었던 건모산의 건모에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철종 때 익산군수 황종석이 쓴 고도리석불입상의 중건비문에 의하면 마이산의 마부로서 입석(石佛立像)을 세웠다고 돼 있다. ‘말이 물을 마시도록 음수전을 놓았다고 하는 풍수설에 따른 석불입상 건립의 유래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이산이 바로 금마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에서 돌칼, 돌도끼, 청동거울 등이 출토된 바 있으며, 산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낸 터가 남아 있다.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마이산(馬耳山·680m)은 산봉우리의 모양이 말의 귀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기도 하다.

마이산은 숫마이산(동봉)과 암마이산(서봉) 두 봉우리의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마치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진안현편에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湧出峯)이라 이름했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쯤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정상은 평평하고, 샘이 있어서 적병을 피할 수 있고,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고 불렀는데, 소사(小祀)에 올렸다. 본조 태조가 남행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돼 있다.

 

장수군의 말 지명

 

장수군은 유독 말 관련 지명이 많다. 장수읍 두산리 뒤 마봉산(馬峯山)은 원래 말산(馬山)으로 불렸으나 세월의 흐름을 따라 말()과 말()의 동음이의적 특성 때문에 두산(斗山)으로 와전됐다고 전해진다. 마봉산은 말이 산 위를 달리는 모습과 같다 해서 명명됐고, 장수군 산서면의 마하리는 인근 마하치(馬下峙)재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장수군은 유독 말 관련 지명이 많다. 두산리 뒤 마봉산(馬峯山)은 원래 말산(馬山)으로 불렸으나 세월의 흐름을 따라 말()과 말()의 동음이의적 특성 때문에 두산(斗山)으로 와전되었다고 전해진다. 마봉산은 말이 산 위를 달리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명명됐고, 장수군 산서면의 마하리는 인근 마하치(馬下峙)재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산서면 쌍계리 매암마을은 원래 마음수(馬飮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목마른 말이 물은 마시는 형국의 명당이라 하여갈마음수(渴馬飮水))’라 불렀다. 매암마을의 윗마을을 마평(馬坪)이라 하며, 산서에서 번암으로 넘어가는 재를 말치(馬峙)재라 했다. 또한 매암수의 주변에 '사실정','구수골','채들'등 말과 관계되는 이름들이 지명으로 붙어있다. 함양에서 번암을 거쳐 말치재를 넘어서 매암마을 앞을 지나 동고지로 가는 길은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삼남대로였다고 한다. 옛날 마을이 번창할 때는 동네 앞에 주막이 72곳이나 있었다고 하며, 수십 마리의 말들이 쉬면서 물과 여물을 먹었다고 한다. 마음수라는 이름이 이런 연유로 붙여졌는지도 모른다고 촌로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현재 마을의 입구에 있는 노인정의 현판을 갈마음정이라고 이름을 짓고 그 유래를 기억하고 있다. , 마평마을에는 말들이 물을 먹었다는 샘이 있다고는 하나 세월의 흐름과 개발로 도로가 나면서 메워지고, 새롭게 우물을 단장해 이용하고 있다

산서면 마하리는 원흥마을과 평촌마을을 통틀어 부르는 행정구역상의 이름이다. 지금은 장수읍 대성리에서 산서로 넘어가는 도로()를 비행기재(해발530m)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마하치(馬下峙)재라고 불렀다. 상기 마을은 마하치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마하리란 동명이 부쳐졌다고 한다. 팔공산 원수봉에서 원흥앞 건지산 일대에 달리는 말이 도적을 쫓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건지산을 말형(馬形), 원흥에서 오성으로 가는 고개를 덮개(말안장)고개로 부르고 한자로는 덕현(德峴)이라 해서 음으로만 표현했다. 원흥사 북쪽 고개를 달랑고개라고 부르는 것은 고개를 넘는 말이 힘에 겨워 고개를 저으면서 넘을 때 목에 달린 말방울이 달랑거린다는 뜻이다. 지금은 수풀이 우거져 길이 폐쇄되었지만 어렴풋이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벽골제

 

김제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6떨어진 월승리. 이곳에 들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일직선의 3짜리 둑이 있다. 우리나라 저수지의 효시라는 벽골제(碧骨堤). 축조 시기는 백제 비류왕 27(330)으로 추정된다. 신라와 고려, 조선 때 다시 쌓았다가 오랫동안 방치되는 바람에 원래 모습을 많이 잃었다.

흔히 호남(湖南)지방의 호()가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대규모 저수지 이름이 왜 호(·호수)나 지(·)가 아니고 제(·)일까. 호서(湖西)지방의 기준점이 제천 의림지(義林池)인 걸 감안하면 궁금증이 커진다. 이름에 얽힌 유래를 보자. 하나는 벽골이 백제 때 김제의 지명인 볏골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라는 설이다. 다른 설은 개축 과정과 관련이 있다. 둑의 북쪽에 있는 조선시대 중수비에 공사 과정이 적혀 있다.

당시 수리공사에 1만여명이 동원됐는데 툭하면 바다의 조수가 밀려와 공사를 망쳐 놓곤 했다. 감독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벽골(푸른 뼈)을 흙에 섞어 쌓으라고 해서 푸른 기가 도는 말뼈를 갈아 넣어 공사를 무사히 마친 연고로 벽골제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짚신을 버린 신털뫼(草鞋山)와 일꾼 숫자를 500명씩을 되로 되듯이 세었다는 되배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산 팔마재

 

군산 팔마재(八馬峴)는 지형이 여덟 마리 말이 웅크리고 있는 형국이라 붙여졌으며, 옛 군산 시내로 통하는 언덕이자 중요한 길목이었고, 이 지역의 팔마산(八馬山)과 함께 역사적인 지명으로, 옛 옥구현 시절부터 불려온 이름이다. 팔마산과 팔마재 일대의 지형이 마치 여덟 마리 말이 모여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팔마(八馬)'라는 이름이 붙었다.

 팔마재는 옛 군산 시내로 진입하는 주요 고갯마루였으며, 지금의 동흥남동과 경장리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예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과거에는 '팔마현(八馬峴)' 혹은 '흙구덕이'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후 '팔마재'로 굳어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팔마재 근처에는 팔마광장, 터미널 등이 있어 여전히 군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경관 숲도 조성되어 있다. 팔마재는 단순히 언덕이 아니라 군산의 지형적 특징과 역사적 중요성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순창 인계면 마흘리 말명당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말명당이 있다. 마흘이라는 마을 이름도 용마산이 말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극뉴의 묘소는 바로 이 용마산의 남동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그 형상이 마치 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히히잉'하고 우는 모습과 같다 하여 천마시풍형으로 불린다.

또 천마가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모습 같기도 하여 천마등공형(天馬登空形), 미끈한 몸매의 말이 바람을 맞으며 우는 형상이라 하여 호마시풍형(胡馬嘶風形), 목마른 용마가 물을 찾는 형상이라 하여 용마음수형(龍馬飮水形)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 장인과 사위 그리고 사위의 사위가 같은 묘역 안에 자리한다. 자리의 상단에는 그의 장인 함양박씨(咸陽朴氏) 박예(朴隸) 부부 합장묘가 자리하고, 바로 아래에는 박예의 사위 김극뉴(1436~1496)와 부인 박씨(박예의 딸), 묘역의 맨 아래에는 김극뉴의 사위 정광좌(1467~1520)와 부인(김극뉴의 딸)의 무덤이 자리한다.

말명당이 유명해진 것은 이 명당발복 덕분으로 김극뉴의 후손 가운데 김장생·김집 부자를 배출한 것으로 소문이 나면서이다. 김장생·김집 부자는 대학자로 동방 18()’에 꼽힌다.

맨 아래에 묻힌 정광좌 역시 조선전기 명문거족의 후예이다. 아버지 정난종(1433~1489)과 그의 형제들 정광보(1457~1520)·정광필(1462~1538)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높은 벼슬을 지냈다.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이들의 묘가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광좌만 순창의 장인 묘 아래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완주 세마천

 

전주(全州) 인후동 도마(刀馬)다리를 지나 나지막한 잔 등을 넘어서면 우아동의 안덕원(安德院)이라는 동네 옆을 지나친다. 이곳은 선조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낸정언신(鄭彦信)이 태어난 마을로 알려졌다. 안덕원을 지나 소리개재를 넘어서면 왼편에 카톨릭 교인들의 공동묘지가 있고 오른쪽에는 미나리 밭이 있다. 묘지를 조금 지나면 미나리 밭 바로 옆에 자그마한 똘 물이 흐르고 있는데 똘 이름을 말씻내라 한다. 말씻내에는 자그마한 다리가 놓여 있어 세마천(洗馬川)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을 하는 도중에 사라져 버려 아쉬움만을 남기고 있다. 또는 말 씻내가 있는 들 이름을 세마평(洗馬坪)이라 한다. 세마천 물이 흐르는 골짝에는 법사와 가소라는 마을이 있는데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완주군 용진면 금상동이라 한다.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호남이 주역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호남이 임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임란 5년 동안 전라도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방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왜군의 호남공격은 개전 직후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한양이 점령당하고 곧이어 조선 7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참담한 상황이 전개되던 15926월부터 시작됐다. 이에 대해 호남의 관군과 의병은 9월까지 3개월에 걸쳐 일련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호남을 지켜냈다.

호남으로 침공하는 왜군은 충청도 영동의 황간 순양을 거쳐 1592622일 제원 천내강의 저곡나루로 금산성을 공격하여 왔다. 금산은 1963년 충청남도로 행정구역이 편입되기 전에는 역사적으로 전라도에 속한 중요한 군현이었다. 금산군수 권종은 저곡산성을 의지하여 왜군과 전투을 벌였으나 전사하고, 이어서 623일 금산성이 함락됐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6월 말 용담과 진안을 거쳐 전주로 공격해왔다. 마침내 78일 진안에서 전주로 오는 길목인 웅치(곰티재) 일대에서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은 호남을 지키기 위한 혈투를 전개하였다. 그날 저녁 무렵 김제군수 정담이 전사하고 웅치가 적의 수중에 넘어갔지만, 이 전투에서 호남 수비군의 사투로 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호남방어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웅치전투의 현장은 웅치를 경계로 한 진안군과 완주군 일대에 걸치고 있는데, 현재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지역만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고, 신촌리 부근 곰티재 정상에는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전주 안덕원 부근까지 침입해 들어와 웅치에서 싸우다 퇴각한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의 군사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웅치를 넘는 과정에서 호남수비군의 사투에 의하여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며, 전주부성에서는 전라감사 이광과 전전적 이정란이 수비태세를 강화하고 있어서 전주부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10일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에 따라 남원에서 이동해 온 동복현감 황진이 안덕원 너머 소양평에서 이들을 물리침으로서 전주가 지켜지고 전라도가 극도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웅치는 나주판관 이복남, 동복현감 황진,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황진이 이광의 명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남원 쪽으로 경계를 나간 사이, 수천의 왜군이 진격하여, 하루 종일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는 후퇴하여 안덕원에 주둔하고, 정담과 그의 병사들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왜군은 웅치를 넘어 전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이미 큰 타격을 입고 세력이 약화한 바, 안덕원에서 대치하게 됐다고 한다.

 이때 남원에 가 있던 동복현감 황진의 군사가 전주를 거쳐 안덕원에 복귀하여, 전투가 벌어졌는데, 패배한 왜군들은 소양평으로 후퇴하였으나, 다시 크게 격파당하였다. 안덕원 전투는 왜군이 전주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든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행장에 의하면 이정란은 전주성에서 일부 의병을 이끌고 나와 이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소양평의 세마천은 전투에서 승리한 황진 등의 군사들이 쉬면서 군마를 씻은 곳으로 전해진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