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과 김소월이 살았던 서울 청진동
1986년 10월 범우사에서 초판 2쇄를 발행한 문고판 《김소월 시집》에는 소월이 서울 청진동에서 살았다는 내용이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1923년 배재고보 졸업, 고향에 돌아와 아동 교육에 종사, 도일하여 도쿄상대에 입학(낙제했다는 설도 있음), 9월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이후 4개월간 서울 청진동에서 유숙, 나도향과 사귐, ‘임의 노래’ ‘옛이야기’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가는 길’ ‘산’ 등을 《개벽》에 발표.〉
배경이 되는 사료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월이 청진동에서 살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2005년 8월 범우사에서 펴낸 《진달래꽃》(고려대 최동호 명예교수가 책임 편집)에서는 청진동이 빠지고 ‘나도향과 어울려 서울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청진동’이 빠지고 넓은 의미의 ‘서울 생활’로 바뀐 셈이다.
2014년 4월 남기혁이 엮은 《근대에 맞선 경계인 김소월》에는 “(소월이) 귀국 후 4개월간 서울에 머물면서 안서, 나도향과 교류하면서 문단 활동을 도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자룡 선생은 “이 3가지 연보를 종합해 보면 소월이 일본에서 귀국 후 소설가 나도향과 함께 어울리며 적어도 4개월간 서울, 그것도 종로구 청진동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청진동에서 실제 살았는지, 그 주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청진동은 과거 술지게미, 비지찌개를 파는 선술집이 많아 서민의 애환이 깃든 공간이다. 해장국 거리, 피맛골로 유명했다. 조선 시대 육조거리(세종로 앞길)와 운종가(종로)가 T자로 교차해 일찍부터 상권이 발달한 곳이었는데 1920년대에는 색주가(色酒家)로 점점 변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은 도심 재개발로 흔적이 사라졌지만, 청진동은 6·25 전란을 겪은 뒤인 1950~70년대에도 가난한 예술가와 문인들이 모여 뒤풀이를 하던 장소였다.
소설가 김동인이 1948년 3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잡지 《신천지》에 연재한 〈문단 30년의 자취〉에 소월이 청진동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가 나온다.
동인이 자신의 ‘처소(태평여관)’로 돌아가는 길에 ‘청진동 안서의 여관에 들렀다’는 문장이 있다. 소월의 스승인 안서 김억이 청진동의 한 여관에서 지냈다는 말이다. 소월이 간토(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해 잠시 서울에 머물렀다면 안서가 지내던 청진동에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시인 최하림(崔夏林)이 쓴 〈문단 이면사〉(《경향신문》 1983년 9월 17일 자 7면)에는 ‘분홍빛 와이셔츠에다 새까만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던’ 김억이 사치를 부려 ‘매해 500섬을 추수하던 막대한 토지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런 문장도 있다.
〈염상섭이 그(김억–편집자 주)를 모델로 하여 소설을 썼다고 해서 물의를 빚었던 〈밥과 질투〉에 나오듯이 푹신한 베드에서 유숙하던 그가 청진동 골목의 조그마한 여숙으로 자리를 옮긴 얼마 뒤였다.〉
청진동은 여러 문인이 살았던 곳이다.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2 ~1950년)의 처가가 금강산 온정리에서 살다가 청진동 289번지로 옮겨와 하숙을 하기도 했다. (참조 《월간조선》 2023년 7월호 〈최초 심층 인터뷰, 채만식 작가의 고명딸 정현 스님〉) 채만식은 그 하숙집 근처에 살다가 김씨영(金氏榮)과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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