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와 권근의 학령선(鶴翎扇)
본성(本省)에서 보낸 학령선(鶴翎扇)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규보
눈빛 종이는 학이 날개를 편 듯하고
금빛 고리는 쥐가 눈을 굴리는 듯하네
펴지고 겹쳐지는 건 대쪽 때문인데
맑은 바람이 솔솔 이누나
여름철에 손에 들고 흔들면
모진 더위 어디로 사라지는지 몰라
이는 의당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어야 해
청량한 맛을 어찌 차마 혼자만 차지하랴
雪紙鶴飜翎
金環鼠開目
張翕因筠籤
翩翩得風足
六月手中搖
炎光何處伏
宜哉分與人
引凉那忍獨('동국이상국집' 9권 후집 고율시 58수)
합죽선으로 널리 알려진 접부채에 감상화가 들어간 것은 고려에서 시작됐다.
고려인들은 학의 펄럭이는 날갯짓에 비유한 ‘학령선(鶴翎扇)’이라는 멋진 이름도 지었다. 상감청자의 비췻빛 하늘을 나는 운학문의 학이 떠오른다.
중국에는 명나라 때까지 접부채가 없었다. 조선에서 국교품으로 보낸 접부채에 감탄한 영락제가 본떠 만들게 하면서 황실에서 애용되며 그 영향이 상류층과 문인들 사이로 퍼졌다.
단오에 조선의 왕은 부채를 신하들에게 선물했다.
당시 부채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첫 기록으로 태종실록 18년(1418년) 4월 태종이 “첨총제(僉摠制·상급 군령 기관) 이상은 전례(前例)에 의하여 원선(圓扇·둥근 부채)을 사용하고, 3품 이하 6품 이상은 학령선(鶴翎扇·손잡이가 날개 편 학모양)을 사용하고, 참외(參外·7품 이하 벼슬)는 백접선(白摺扇·흰색의 접는 부채)을 사용하라”고 한 지시가 있다. 다만 실행되지 못했다. 선물할 부채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에서 진상 받아 썼는데, 별도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 백성에게는 큰 괴로움이었다. 부채 선물은 조선에 이어 현대에도 이어졌다가 공급이 뚝 끊겼다.
여름이 시작되는 단오절에 부채를 생산하는 영호남 지역에서 부채를 진상[端午進扇]하면 임금은 여러 자루의 부채를 시종재신(侍從宰臣)에게 하사[端午賜扇]하며, 부채를 받은 시종재신들은 이를 일가친척과 친지에게 나누어주는 풍습에서 유래한다.
조선 고종 31년 9월 3일(병자일)에 군국기무처에서 단오진선(端午進扇)의 폐지를 제의한 안건이 승인되어 폐지되기까지 단오진선과 단오사선(端午賜扇)은 지속됐다.
그 시원(始源)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한 전거(典據)는 없으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본성(本省)에서 보낸 학령선(鶴翎扇)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고려시대의 관청에서 부채를 내려준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매년 단오에 정기적으로 행해졌는지에 대한 전거(典據)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고려 공양왕 원년 4월에 예의사가 청하여 군신의 의종과 개선을 차이가 있게 다시 정하니…“또 서월에는 단지 사모를 쓰면 열기가 몸에 닿아 고생이 심하므로 4월부터 8월까지 양부는 중첨청색개를 쓰고 육부판서•대언•반주•통헌•산기 이상은 단첨청색개를 쓰고 대성은 평첨조개를 쓰고 3품은 원선을 쓰고 4품에서 6품까지는 학령선을 쓰도록 하였다.…”
恭讓王元年四月 禮儀使請 更定群臣儀從蓋扇有差…又暑月 只着紗帽 觸熱甚艱 自四月至八月 兩府 用重簷靑色蓋 六部判書代言班主通憲散騎以上 用單簷靑色蓋 臺省 用平簷皀蓋 三品 用圓扇 四品至六品 用鶴翎扇…事竟不行 [고려사 권제72, 54장 앞쪽~뒤쪽, 지 26 여복 1 백관의종]
조선시대 예조에서 각 품의 부채를 상정하기를, “1•2품은 분홍환원선이요, 3•4품은 남저원선이요, 5•6품은 학령선이요, 참외는 백접선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첨총제 이상은 전례에 의하여 원선을 사용하고, 3품 이하 6품 이상은 학령선을 사용하고, 참외는 백접선을 사용하라.” 하였으나,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禮曹詳定各品扇子 一二品粉紅紈圓扇 三四品藍苧圓扇 五六品鶴翎扇 參外白摺扇 敎曰 僉摠制以上依前例用圓扇 三品以下六品以上用鶴翎扇 參外用白摺扇 事竟不行 [태종실록 권제35, 43장 뒤쪽, 태종 18년 4월 28일(무신)]
사김감로대선사혜학령선쌍장(謝金甘露大禪師惠鶴翎扇雙張
ㅡ학령선(鶴翎扇) 두 자루를 보내온 김 감로대선사에게 고마운 뜻을 전하다
권근
신선(神仙)의 발자취가 바다와 산(山)에 멀리 아득하더니
학(鶴)을 타고 한가롭게 푸른 하늘로 오르네
티끌세상(世上)에 마음의 괴로움이 많은 것을 생각하여
일부러 깃털 두 개에 나누어 부드럽고 맑은 바람을 보내 주셨구려
仙蹤縹緲海山中
駕鶴冷然上碧空
爲念塵寰多熱惱
故分雙翮送淸風
학령선(鶴翎扇)은 학(鶴)의 깃털로 만든 부채 또는 손잡이가 날개를 편 학의 모양으로 생긴 부채를 말한다.
부채 선자(扇子) 관련 기록
1410년 4월 26일 태종이 칠한 부채 칠선(漆扇)을 금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전칠(全漆)은 이어대기 어려운 물건인데 각 전(殿)에 해마다 바치는 접선(摺扇)에 모두 칠(漆)을 써서 국가의 용도를 허비하니 금후로는 진상(進上) 이외에는 모두 백질(白質)을 사용하여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소서"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1414년 11월 17일 부녀자(婦女子)는 입모(笠帽)를 드리우고 부채 선자(扇子)를 가지는 것을 금(禁)하라고 명하였다. 이 앞서 부녀자의 입모(笠帽)는 그 전첨(前簷)을 말아 올리고 부채를 가지고 얼굴을 가리는 장면(障面)하였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 이를 드리워서 그 얼굴을 감싸서 가리우는 옹폐(擁蔽)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1415년 5월 16일 충청도 도관찰사 우희열(禹希烈)이 둥근 살부채 윤선(輪扇)을 올렸으나 이를 물리치며 "나는 단선(團扇)만을 사용한다"하고, 승정원(承政院)으로 내려보냈다.
1418년 4월 11일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 都觀察使) 우균(禹均)이 접선(摺扇)을 6조(六曹)와 대간(臺諫)에 증여하였는데 사헌 집의(司憲 執義) 허규(許揆) 등이 아뢰기를 "사물(私物)을 만들어서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는 것을 이미 교지(敎旨)로 금지하였는데 우균이 각 고을의 대나무를 거두어 공인(工人)을 모아서 부채를 만들어 증여하여 소사(所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의 폐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인정(人情)을 행하였으니 죄주소서"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했다.
4월 28일 예조에서 각 품(品)의 부채 선자(扇子)를 상정(詳定)하기를 "1,2품은 분홍환원선(粉紅紈圓扇)이요, 3,4품은 남저 원선(藍苧圓扇)이요, 5,6품은 학령선(鶴翎扇)이요, 참외(參外)는 백접선(白摺扇)입니다."하니 태종이 하교(下敎)하기를 "첨총제(僉摠制) 이상은 전례(前例)에 의하여 원선(圓扇)을 사용하고, 3품 이하 6품 이상은 학령선(鶴翎扇)을 사용하고, 참외(參外)는 백접선(白摺扇)을 사용하라"했다.
1782년 6월 22일 지평 윤이상(尹履相)이 상소하여 도감(都監)의 천총(千摠) 이인빈(李仁彬)이 교단(郊壇)에서 비를 비는 도우(禱雨)하기 위해 동가(動駕)하는 날 벌여 놓은 진(陣)의 열인 진항(陣行)에서 부채 선자(扇子)를 펴 햇볕을 가리는 차욱(遮旭)하였다는 것을 논하고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인빈이 대공(對供)에서 자복하지 않았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사리(事理)는 상정(常情) 밖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부진(赴陣)하는 장관(將官)은 오른손으로는 기장(旗仗), 편(鞭)을 잡고 왼손으로는 고삐를 쥐는 공비(控轡)하고 말을 몰게 되어 있는데, 다시 또 다른 손이 있어 부채를 부치는 휘선(揮扇)할 수 있겠는가?"하고, 이어 용서하게 했다.
1785년 5월 2일 정조가 하교(下敎)하기를 "공어(貢御)하는 물건은 그 제도(制度)에 있어 들쭉날쭉해서는 마땅치 않다. 요즘 속록(續錄)을 보니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부채 선(扇)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으로 여러 번 신칙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강도(江都)에 있는 구제(舊制)를 여러 도(道)에 반강(頒降)하여 이 모양을 표준으로 하여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 명령을 내린 지 오래여서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해 조(曹)로 하여금 여러 도에 신칙하게 하여 어기는 일이 없게 하라"했다.
1788년 5월 12일 정조가 전교하기를 "충의(忠義) 20원(員)의 직함(職啣)을 만들어 녹을 주도록 한 법의 뜻이 매우 훌륭하니 열성조에서 충성을 기리고 공적을 기록하여 후예에까지 미치게 하신 성의(聖意)를 우러러 볼 수 있다. 지금 일산을 짚고 부채를 든 사람들은 비록 한미하여 족히 꼽을 것도 없지만 그 선조들은 훈벌(勳伐)이 성대하게 드러났고, 그 문벌은 태반이 문반(文班)의 홍문관과 무반(武班)의 선전관이었다"했다.
1792년 12월 16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히고 또 작은 부채를 매달아 놓고 다섯 발을 쏘아 네 발을 맞혔다.1793년 8월 29일 매 년 단오날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監營)·통제영(統制營)이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옛부터 전해오는 전례이다. 이에 앞서 이윤경(李潤慶)이 통제사(統制使)로서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당하게 되자 흉년이 들었다고 핑계하면서 연례로 하는 일을 폐지하였다. 정조가 연신(筵臣)의 귀띔으로 그 일을 대강 듣고 비변사에 명하여 공문을 보내 물어보게 하였는데, 이윤경이 첩보(牒報)를 올려 핑계를 대면서 부정하되 그 말이 외람되고 거만하였다. 그리하여 연신(筵臣)들이 대륙법의 불경죄로 그를 처벌할 것을 누차 말하였으나 정조가 그에게 죄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이윤경이 다른 일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고 돌아오게 되자 감히 한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한강 밖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1794년 11월 27일 양남의 암행 어사 서유문(徐有聞)을 춘당대에서 소현했다. 서유문이 나아가 서계하기를 "흥양현(興陽縣)은 과거에는 대나무의 산지로서 매 년 부채 만드는 편죽(片竹)을 1천 5, 6백 자루나 혹은 2천여 자루를 순영에서 복정(卜定)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대밭이 점차 옛 날 같지 않아서 여기저기 다른 고을에서 사다가 복정된 양을 채워서 납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근래 각 읍의 대밭이 곳곳마다 벌거숭이가 된 것이 본 읍과 다름이 없으니 작년과 올 해 조정에서 특별히 신칙을 내린 뒤에 영읍이 염두에 두었어야 하는데도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명색이 첩선(帖煽)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이가 한 척에 가깝고 그 살도 30개가 넘습니다. 대 하나를 베어 쓸 수 있는 것은 겨우 한두 마디뿐이니 만약 첩선을 만들려면 부채 한 자루에 큰 대 몇 개를 소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대밭이 무성하기를 책하고자 하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첩선의 명색을 일체 제거하고, 그외의 부채 만드는 제도도 오로지 튼튼하고 소박하게 만들도록 하고 부채살 수는 단오선의 살수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겉에 뿔을 대어 기교를 부린 것이니 합죽선, 옻칠한 종이 부채 따위들을 일체 엄금하소서.
흥양현의 진상물인 청대죽(靑大竹)은 한 해 걸러 25개씩 봉진하는데 대동회감미(大同會減米) 16석 10두를 대밭을 맡고 있는 이에게 내주어 대를 기르고 베는 것을 금하는 자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대밭에 몸통이 큰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곡성(谷城) 등의 지역에서 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값이 앙등할 때는 한 개의 값이 7, 8냥까지 하며, 봉진할 때의 영하(營下)의 잡비와 경중에 보내는 인정(人情) 등의 비용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의 피폐가 이로 인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밭을 잘 기르고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엄금하는 방법을 영읍으로 하여금 서로 잘 강구하게 하고 경외로 왕복하는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면 거의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기를 "어사 서유문이 대부채의 폐단을 논한 것이 매우 옳습니다. 지금부터 첩선의 명목을 영원이 혁파하고, 종이를 좁게 접지 말도록 하며 부채살은 20개를 넘지 않도록 하고, 길이도 6, 7촌을 넘지 말도록 하며 겉에 뿔을 붙이거나 합죽선이나 옻칠한 종이를 쓰는 것을 엄하게 금하소서. 검은 칠을 한 종이와 오동나무로 겉을 꾸미는 것 외에는 기교를 부리는 것을 인습해 쓰지 말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고, 이어서 부채를 만드는 고을 중 곤수가 있는 곳에도 엄하게 신칙하소서. 그래서 내 년 이후로는 비록 시장에서 매매하는 것이라도 드러나는 대로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뜻을 저자를 맡은 부서에 분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정조가 따랐다.
1798년 9월 14일 능주목사(綾州 牧使) 이종섭(李宗燮)이 유지(有旨)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구제할 방도가 없이 갈수록 고질화되고 있는 폐단은 대나무에 관한 것인데 진상하는 죽순(竹筍)과 청대죽(靑大竹) 및 연례적으로 복정(卜定)되는 부채용 대나무 편죽(扁竹)을 형세상 어찌할 수 없기에 관청에서 비상금으로 쓰기 위해 백성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받아들이는 민고(民庫)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능주는 인구가 많지 않은 잔약한 고을인데도 대나무 때문에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1년에 천금(千金)을 넘고 있고 보면 다른 고을은 어떨지 자연히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호남의 민고(民庫)의 폐단에 대해서 말하자니 통곡하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결전(結田)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도 부족해서 호구세(戶口稅)를 물리고야 마는데 경기·황해·충청인 기호(畿湖)와 비교해 보면 한두 배 정도만 많을 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죽전(竹錢)은 4, 5년 전에 처음으로 있게 된 것으로서 올 해의 가격이 지난 해의 배나 뛰었는데 내 년에는 가격이 또 얼마나 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걱정하면서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또한 두려움이 앞섭니다.신이 남쪽 지방으로 내려 온 뒤에 먼저 죽전(竹田)에서 당시 생산된 것을 재료로 하여 마디를 따라서 부채를 만들어 보았는데 끄트머리를 편편하게 하니 손에도 편할 뿐더러 공역(工役)이 절약되었고 변두리를 넓게 하니 기름칠을 하지 않아도 내구성(耐久性)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대나무 가격도 저렴해지고 부채의 제도도 완비될 것입니다.
내년부터 진상하는 부채는 모두 정조가 2월 초하루 중화절에 신하들에게 내려준 중화척(中和尺)으로 7촌(寸)을 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마련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양남(兩南)에서 부채를 만드는 고을들로 하여금 감히 이를 뛰어넘지 못하게 해 주시면 실로 남쪽 백성들의 혜택이 되겠습니다.그리고 청대죽(靑大竹)의 경우 1간(幹)의 값이 거의 2천 전(錢)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한성 공인(貢人)들이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하속(下屬)들이 이익을 잃기 때문에 결국에는 조가(朝家)의 덕의(德意)가 막혀서 통하지 못하게끔 만들고 말았으므로 남쪽 백성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본가(本價) 및 연로(沿路)의 태가(馱價)를 상쇄(相殺)하여 계산하는 회감(會減)해서 당초에 마련했던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 것을 가지고 공물로 바치게 하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인데 가외로 값을 약간 더 쳐주는 것은 또 해당 군에서 각각 알아서 액수를 정하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것은 늘 쓰는 복령(茯苓)이나 창출(蒼朮) 같은 약재와는 다르니 비록 달마다 정해진 수량을 내지 않고 수시로 진배(進排)한다 하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고, 또 조각을 내어 죽력(竹瀝)을 받는 자료로 삼는 데에 불과하고 보면 몸통이 크지 않아도 될테니 대나무를 양 등분하여 수납케 할 경우 또한 힘을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묘당에 자문하시어 처리케 하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했다.
1799년 5월 7일 좌의정 이병모가 복주(覆奏)하기를 "닥, 대, 옻에 대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닥, 대, 옻 세 가지는 오로지 단오 부채를 만들기 위한 것인데 단오 부채를 책정하는 일은 듣건대 해당 도에서 근래에 이미 혁파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뒤로는 도신이 감히 다시 길을 열지는 못할 듯하고 도신이 이러하다면 여러 고을들을 단속함에 있어서 명령을 내리지 않고도 시행되게 할 방도가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영읍(營邑)의 침탈이 없어지고 나면 백성들에게 이익이 있을 것이니 이 이익이 되는 사실을 들어 백성들에게 재배하기를 권하는 일은 또한 별 수고를 하지 않고도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귀한지 천한지를 보면 영읍의 관리들이 부지런한지 나태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옻의 폐단과 같은 것도 책정을 줄인 뒤에는 또한 금지하지 않아도 저절로 금지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분부하소서"했는데 정조가 따랐다.
1876년 9월 23일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내리신 전교(傳敎)를 읽었는데, 재해 입은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글에 넘쳐났습니다. 특별히 내탕전(內帑錢)을 분획(分劃)하고, 계속해서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영절(令節)에 바치는 부채를 면제하라고 하셨는데 아주 훌륭한 조치이며 큰 은혜입니다. 진헌(進獻)하는 물건은 이미 면제하도록 명령하였으니 조정에 관례로 바치는 부채도 형편상 정지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거기에 드는 물력(物力)을 모두 진자(賑資)에 쓰도록 해당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가 윤허했다.
1888년 11월 22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남쪽 백성들이 기근을 당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전하(殿下)는 몹시 근심하면서 거듭 특지(特旨)를 내려 간곡하게 걱정을 했으며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그리고 영절(令節)에 진상하는 부채인 절선(節扇)까지 면제해 주었으니 이 것은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깊이 관심을 돌리고 베푼 크나 큰 혜택입니다. 은혜로운 명령이 일단 나가자 온 지역이 다 칭송하고 있습니다. 영(營)에서 구제하고 재해를 잡아주는 등의 일과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 주고 숨을 돌리게 하는 여러 가지 조목에 대해서는 방금 차례로 공문을 발송했습니다. 그러나 더없이 중요한 진상물품을 특별히 면제하게 했으니 조정에 관례로 바치는 부채 선자(扇子)도 모두 다 아울러 중지하지 않고서야 전하가 두려워하는 훌륭한 뜻을 우러러 체득하겠습니까? 거기에 드는 실제 수량을 가지고 구제물자에 보충하여 쓰도록 각 해 도(道)의 수신(帥臣)에게 명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가 윤허했다.
1894년 9월 3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議案)을 올리기를 "궁내부에서 따로 진공회사(進供會社)를 만들어 종전부터 임금이 써오던 물품을 수요에 따라 바치되 월말마다 시가(時價)로 계산하여 내주는 안입니다.세 도(道)에서 철따라 바치던 부채와 두 군영(軍營)에서 정초에 바치던 세찬(歲饌)을 모두 폐지하며, 대궐에서 이 두 가지를 백성들에게서 거두던 것은 영영 없애고 공금에서 회감(會勘)하던 것은 모두 탁지아문으로 바친다는 안입니다.각 영(營)과 각 읍(邑)의 관청에서 쓰는 물건값을 배정하는 규례를 전부 없애고 소용되는 모든 물건은 일체 시가대로 사서 쓴다는 안입니다. 7월 2일의 의안 중에서 각 부(府), 각 아문(衙門), 각 군문(軍門)에서 제 멋대로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이미 계하(啓下)받았으니 각 궁(宮)에서도 이 규례대로 한다는 안입니다'하니 고조가 윤허하였다.
1895년 4월 23일 고조 대군주가 대원군(大院君)을 존봉(尊奉)하는 의식 절차를 정하라고 하교했다.ㅍ교자(轎子)는 8인이 맨다. 흉배(胸背)는 거북이 모양으로 한다. 품대(品帶)는 푸른 가죽 띠에 자줏빛 마호(瑪瑚)로 한다. 파초형의 부채는 양산으로 대신하되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선을 두른다. 부대부인(府大夫人)의 품대는 푸른 가죽 띠에 자줏빛 마호를 한다. 앞 뒤의 각 문(門)에는 가름대를 설치한다. 대문(大門)에 총순(總巡), 순검(巡檢)들이 돌아가면서 입직(入直)하게 한다.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칙명(勅命) 외에는 감히 사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한다. 각 국 공사(公使) 등 관리가 경의를 표시하려고 할 때에는 외부(外部)에 조회하여 궁내부 외사과(宮內府 外事課)로 전달함으로써 앞에서 인도하면서 통역하게 한다. 출입할 때에는 궁내부에 먼저 알리어 궁내부 관원에게 모시도록 하며 또 당직을 서는 총순, 순검에게 호위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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