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江南)의 유래
서울특별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자치구. 구의 이름은 한강 이남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강남구는 서울에서 3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다.
1963년 이전까지만 해도 '강남'이라는 지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강남이라고 부르는 곳은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논밭이 대부분인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오히려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 중간'이라는 의미에서 '영동'이라는 지명을 더 많이 썼다.
1970년대 시작된 개발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은 곧 '강북'이었고, 오히려 '강남'이라는 지명이 붙은 첫 기관은 동작구 대방동의 강남중학교였다.
그러나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 변경으로 이 지역이 서울에 편입된 것을 계기로 강남의 역사가 시작된다.
1969년 12월 26일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준공되자 강남은 기존 도심에서 지척 거리에 놓이게 됐다. 이는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개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3년 소양강댐 완공의 최대 수혜지역이 바로 '남편이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할 정도로 침수 문제가 빈번했던 강남이었다.
동시에 37개의 간선도로가 격자형으로 세워지면서 허허벌판에는 차례로 건물들이 들어서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강남 하면 뭐니뭐니해도 아파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강남에 최초로 들어선 아파트는 논현동 2번지 7,0194평의 부지에 1971년 4월 착공해 같은해 12월 완공된 공무원 아파트였다.
건설부는 이어 1976년 11개 아파트 지구를 고시하는데 이 중 6개가 강남이었다. 반포지구 167만평, 압구정지구 36만평, 청담지구 11만평, 도곡지구 22만평, 잠실지구 74만5천평 등 강남의 아파트 지구는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이곳에 들어선 아파트가 바로 현재 강남을 대표하는 대단지 아파트다.
'강남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를 안다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처럼 강남 개발사에선 경부고속도로 건설부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 같은 국가의 발전사를 읽을 수 있다.
1970년대 초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가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해 골재로 채취되어 사라진 이야기 등은 옛 기억을 환기시킨다.
예술의전당 부지를 정할 때 '통 크고 시원한' 것들을 좋아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다가 우면산 기슭을 보고 '저기 널찍하고 좋겠네'라고 말한 것이 부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 등 강남에 얽힌 각종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 당시 시대상을 짐작케 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는 1963년 1월 1일 이전의 강남구 지역은 고요한 농촌지대였다. 그리고 1949년의 농지개혁으로 과거 소작인이었던 다수의 농민이 자작농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다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한남 · 서빙고 · 뚝섬 등의 나루터에서 나룻배로 도강, 강남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언주 · 신동면의 농업경작 형태가 쌀농사 중심에서 채소재배 중심으로 변해갔으며, 당시 강의 남북을 왕래하는 나룻배는 채소보따리로 가득 찼다고 전해지고 있다.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됐다. 이때 광주군 언주면 전역과 대왕면 중 5개 동리가 성동구에 편입되었는데, 오늘날 그 대다수는 강남구가 되어 있다.
즉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내로 도곡동 · 역삼리 · 도곡리 · 포이리 · 개포리 · 사평동 신사리 · 압구정리 · 학동 · 논현리 · 수도동 삼성리 · 청담리 · 대치리 · 탑곡동 · 염곡리 · 내곡리 · 신원리, 천호출장소 관내로 일원동 · 수서동 · 자곡동 · 율현동 · 세곡동이 편입됐다.
1973년 종전의 언주 · 신동출장소가 폐지 · 병합, 영동출장소가 됐으며, 이때 영동출장소 관할구역은 오늘날 강남 · 서초 양구가 되어 있는 지역 외에 현재는 송파구를 형성하고 있는 잠실동 · 신천동도 포함된 모두 27개 동이었다.
1973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강남 지역 행정구역을 개편할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언주출장소 관내 4개 동과 성동구 잠실동, 송파출장소의 일원동 및 세곡동, 그리고 영등포구 소관인 신동출장소의 서초동, 양재동, 잠원동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성동구 영동출장소가 신설됐다.
1975년 영동출장소가 폐지되고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비로소 강남구가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 등장하게 됐다.
당시 강남구는 영동출장소의 영역 이외에도 천호출장소의 관할구역까지 합한 대규모 구로, 현재의 서초·강남·송파·강동 등 4개 구를 모두 합친 지역이었다.
면적은 139.2㎢로 서울시 전체의 23%에 달했다.
1970년대 초·중반부터 서울 구 도심부의 교육, 문화 기능이 대거 강남으로 이전하고, 중·상류층의 강남 이주와 대기업 본사의 강남 입주가 뒤를 이은 결과, 현재 강남구는 한국 최고의 주거지이자 교육·문화 중심지, 경제 활동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1975년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영동출장소는 폐지됐다. 이어 ‘강남개발’을 계기로 인구가 급증, 1979년에 청호출장소를 승격, 강동구를 분리했다.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구됐다.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자치구로 승격됐으며, 14개 법정동에 22개 행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면적은 39.55㎢로 서울시 전역의 6.53%, 2007년 기준으로 인구는 56만1000명으로 서울시의 5.5%를 차지했다. 인구 밀도는 서울시 평균보다 낮다.
◇ 압구정(狎鷗亭)
조선의 문신 한명회의 호이기도 한 압구정은 조선 세조때 한명회의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불여진 이름이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1980년대 중반 미국 비버리 힐즈의 패션거리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으로 고급 브랜드가 많이 들어서면서 붙여졌다.
◇ 청담(淸潭)
주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마을을 ‘청숫골’이라고 한 데에서 동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 논현(論峴)
이 지역에 논밭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로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를 논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명으로 논현이 되었다.
◇ 삼성(三成)
조선시대 말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자연부락인 봉은사마을, 무동도마을, 닥점마을 등, 세 마을을 합하여 ‘삼성리’라 명명하면서 후에 삼성동으로 확정되었다.
◇ 신사(新沙)
한강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坪里)의 앞 글자를 따서 동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 신사동 가로수길
가로수로 심겨진 은행나무를 통해서 얻게 되었다. 왕복 2차로 양 옆으로 160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쭉 줄지어 있어 가로수길이라고 불린다.
◇ 역삼(驛三)
역촌의 세마을 말죽거리 · 하방교리 · 역촌리의 세 마을이 합쳐지면서 역삼이라 하였다.
◇ 한티, 대치(大峙)
큰 고개 밑에 있다는 것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티는 큰 고개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티를 한자명으로 한 것이 대치이다.
◇ 도곡(道谷)
매봉산 아래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골이 되어 도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학여울
대동여지도에 '학탄(鶴灘)'이라 기재되어 있던 것을 '탄(灘)'을 한글로 풀어 '학여울'이라고 하였다. 여울(탄,灘)은 하천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지칭한다.
◇ 수서(水西)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고 하여 수서라 이름 붙였다.
◇ 일원(逸院)
옛날에 일원이라는 서원이 있어 일원동이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숨겨있는 동네라 하여 일원동이라고도 하였다고도 한다.
◇ 개포(開浦)
이 지역이 양재천 갯벌이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개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 또는 한자명으로 개포(開浦)라 부르게 됐다.
◇ 세곡(細谷)
이 지역 마을 이름이었던 세천리(細川里)와 은곡동(隱谷洞)에서 한 자씩 가져와 이름을 붙였다.
강남. 넓게는 한강의 이남 지역 전체를, 일반적으로는 강남구와 서초구를 의미항다.
요즘은 ‘강남 3구’라는 말로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묶어 부르기도 한다.
논밭이었던 땅은 지금 전국에서 최고가를 다툴 정도로 높은 땅값을 자랑하는 곳이 되었고 교통, 문화, 의료, 교육 등 모든 인프라가 부족함 없이 갖춰진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핵심축에는 대기업 본사 뿐 아니라 각종 IT기업과 스타트업의 사무실이 밀집해 있고, 서초대로 일대에는 법원, 검찰청과 함께 법무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강남은 서울도성, 여의도와 더불어 서울의 3대 업무지구를 이루고 있고, 일자리 수로 따지면 서울 내 업무지구 중 최다다.
‘강남이 논밭이던 짓던 저 때 땅을 사 둬야 했는데.’ 아마 누구나 그 생각을 한번쯤은 해 보았을 것 같은데, 확실한 것은 강남 개발의 신화 속에는 지금 이 땅을 채운 빼곡한 빌딩들과 아파트만큼이나 권력과 자본, 수많은 이들의 이해관계와 욕망이 점철되었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과 테헤란로 일대 전경
*19세기 중반 김정호가 제작한 전국지도인 '동여도' 중 경기도 부분. 한강 이남 지역이 광주, 과천, 시흥 등의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1960년 4월 압구정 일대 한강에서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는 시민들(왼쪽)과 나루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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