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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황학문 암각서

황학문 암각서

1712년(숙종 38년)임진년에 전주부 내의 유지들이 강무(講武:조선시대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는 일)를 위하여 다가교 서쪽 기슭에 4칸의 정자를 짓고, 과녁을 북서쪽 황학대(黃鶴臺:현 신흥학교)에 세우고 천양정이라 명하였다. 이곳 황학대는 신흥학교 본 건물 뒤에 있는 터로, 학교 뒷 건물로 들어가면 황학대를 알리는 황학문(黃鶴門)이라는 암각서가 있다. 그러나 9년 뒤에 홍수를 만나 천양정이 모두 유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1722년에 전주부 무인 김삼민 등 4인이 발기하고, 유지들의 협조로 다가산 아래 다가정을 김삼민의 소유로 짓게 된다. 그래서 다가정은 천양정의 정신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830년 다시 사정을 만들 때 전주의 부노들은 당연히 옛 이름인 천양정을 사용하게 된다.

다가산 아래 천양정의 ‘천양(穿楊)’이란 뜻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으로, 신묘한 활 솜씨로 이름 높았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활쏘기는 고대에 이미 존재했고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도 신궁으로 알려졌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데 남원의 황산전투가 밑거름이 되었는데, 사실 이 전투에서 아지발도를 무찌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발의 화살이었다. 조선을 창제하는데 이성계의 신궁에 가까운 솜씨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종근이 2021년 3월 30일 전주 신흥학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 희현당(希顯堂)이 자리한 기슭인 황학대(黃鶴臺) 입구를 나타내는 각석을 찾았다.

황학대 각석은 신흥고 과학관 바로 옆에 가로 60㎝, 세로 20㎝ 안팎 크기의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황학문(黃鶴門)’이라고 한자로 쓰여져 있었다.

이 각석은 “당시 황학대를 오르는 입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까지 ‘문(門)’자의 왼쪽 획이 떨어져 나간 채 전해져 왔다.

황학대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숙종 26년(1700)때 관찰사 김시걸이 창건한 서원인 희현당이 자리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깊은 역사성을 간직한 각석이다.
황학대는 누런 학이 내려앉는 곳이라는 상서로움을 뜻하는데, 큰 인물을 기대하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으며 전주 기전대 주변 화산공원에 위치했다는 설이 있다.
한편 전주에서 사라진 '청학루(靑鶴樓)'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청학루기(靑鶴樓記)'가 처음으로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청학루'는 1921년 전주의 갑부 박기순이 '비장청(秘將廳, 전주부성에 자리)' 을 뜯어 옮겨 짓고 이같이 이름한 가운데, 각종 회의나 결혼식, 전주국악원 분원 등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로 사용하다가 현재, 그 자리에 태화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그 내용과 당시의 풍경을 담은 사료가 전무한 까닭에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전주문화원이 주최한 제3회 전주역사유물찾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양신영씨의 출품작 '청학루기(靑鶴樓記)'는 청암(晴巖) 이학선(李鶴善,생존 연대 불분명)선생이 1933년(소화 8년 계축) 5월에 쓴 글로,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항주 대도시에 황학루가 있는데, 선인들이 이곳에 의지해 소일을 한다. 항주 여산은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전주 완산에도 이같은 명소가 있다. 그런데 완산이 여산보다 못하지도 않고, 또 전주가 항주에 사양하기는 어려운 즉 청학이 백학, 황학루 보다 못하지는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문의 마지막 부분에 시 한 수를 기록했다.

'전주성(풍성, 豊城)의 만상(萬像)이 이 누각에 모여 있고/삼산(三山)과 십주(十洲)의 빼어난 경치가 아닌가! 청학(靑鶴) 선인(仙人)들은 사람이 다 알지 못하니/백운(白雲)천재(千載, 천년)에 우리가 노는 구나'<임희종 신흥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한자리에 섰다. 사진은 임교장님이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