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톤(인돈,린튼)과 인사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대받은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 1891~1960) 선교사는 한남대 설립자로서 근대 한국사회에 큰 기여를 했으나, 널리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다. 특히 린튼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대표적 선교사이다. 그의 특별한 한국사랑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4대(代)에 걸쳐 한국에서 봉사하고 선교하며 한국 땅에 뼈를 묻은 후손들도 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첫 인연은 바로 애족장이 추서된 윌리엄 린튼 목사가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나이에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그는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48년 동안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군산영명학교에서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린튼 선교사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고,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린튼 선교사는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 한국의 처참한 실정과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또한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피했으나 그는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 땅을 지켰다. 린튼 선교사는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했고 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병 치료도 미룬 채 한남대 설립에 매진했던 그는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8월 숨졌다.
린튼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한국에서 선배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ㆍ1868-1925) 목사의 딸 샬롯(한국명 인사례)과 결혼, 아들 4명을 모두 한국에서 낳고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아들 가운데 셋째 휴 린튼(한국명 인휴 1926~1984)과 넷째 드와이트 린튼(한국명 인도아 1927~ 2010)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에서 교육ㆍ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휴의 부인 베티(한국명 인애자ㆍ83)도 순천에서 결핵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과 호암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으며, 베티 여사의 집은 미국을 방문하는 북한 대표단이 머물다 가기도 하는 등 남북한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휴 목사는 교통사고로 숨져 한국 땅(순천)에 묻혔고,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낸 드와이트 목사는 올해 1월 미국에서 역시 교통사고로 숨졌다. 린튼 선교사 가문과 한국과의 인연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유진 벨 선교사로부터 따지면 4대에 이른다. 인휴 목사의 아들 스티브(한국명 인세반ㆍ59)는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 북한 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모두 400억 원이 넘는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그는 1997년부터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 주석도 수차례 만난 북한 전문가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또 그의 동생 존(한국명 인요한ㆍ50)은 한국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토종’이다. 두 형제는 모두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미국의 세계적 생명공학기업인 ‘프로메가(PROMEGA)’ 대표인 빌 린튼 3세(62)는 윌리엄 린튼 목사의 장손(長孫)으로 인세반, 인요한과는 사촌 간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설립한 한남대를 2004년 방문해 500만 달러 재정지원을 약속했고, 이후 한남대에 프로메가 BT 교육연구원이 설립됐다.
이밖에도 린튼 가문은 1995년 북한주민을 돕기 위해 인도주의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CFK)'를 설립해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개발기술 전수 등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
한남대는 설립자 윌리엄 린튼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1994년 그의 한국 이름을 딴 인돈학술원을 설립, 매년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사에게 인돈문화상을 시상하고 있다. 또 국제학부인 ‘린튼글로벌칼리지’를 설립, 우수한 국제화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02)
4대에 걸친 린튼 가(家)의 한국사랑
윌리엄 린튼(W.A. Linton, 한국명 : 인돈1891-1960)은 1912년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남장로회 파송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고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목포였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하면서 먼저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육에 몸담고 있던 그는 1919년 3ㆍ1 운동의 실상을 미국에 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 뿐 아니라 린튼은 신흥학교 교장을 지낼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미국으로 강제추방을 당했지만 그는 평소 한국 독립을 위해서 앞장서서 학생들에게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혼란하던 시기에 교육과 선교에 힘쓰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는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서 성경학교를 운영하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다. 1959년에는 대전대학(현 한남대)을 세워 초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남다른 한국 사랑과 교육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60년 6월 건강악화로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13일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한국에서 생을 마치지 못하게 된 것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말해주듯 린튼은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기고 한국을 사랑하여 헌신적인 열정으로 선교와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1922년 결혼한 샬롯(유진 벨 선교사의 딸)과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다 한국에서 나서 고등학교까지 한국학생으로 공부하며 성장했다. 그 중 넷째 드와이트 린튼(인도아)은 미국 유학 후 돌아와 25년간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 활동에 헌신했으며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냈다(2010.1. 별세). 셋째 휴 린튼(인휴) 역시 미국유학 후 1953년 내한하여 순천지방의 농촌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70년에는 <등대선교회>를 창립하고 전국적으로 ‘1천 교회 개척운동’을 전개함으로 그 결실이 무르익어 가던 198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별세하여 순천에 안장되었다.
한편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한 조지 왓츠를 기념하기 위해 1925년에 건립된 작고 아담한 건물에 휴 린튼 선교사 부부가 『순천기독진료소』를 세우고 1960년부터 결핵퇴치사업에 힘을 쏟았다. 1층의 진료소는 지금까지도 사랑의 손길을 전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2, 3층은 『순천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으로 꾸며져 각종 선교역사 사료와 선교사들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앞뜰에는 조지 왓츠의 기념비를 비롯해서 순교비 등 열한 분의 선교사 비석이 서 있다. 한편, 휴 린튼의 부인 로이스 여사는 1994년 은퇴할 때까지 순천결핵재활원장으로 35년간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는데, 친지들이 모아준 은퇴기부금으로 순천소방서에 앰뷸런스를 기증하여 한국119응급차 운행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가 앰블런스를 기증하면서 “남편인 휴 린튼이 교통사고로 죽어갈 때 이런 앰뷸런스가 있었다면 아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앞으로 이런 위급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쓰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한 1996년에 수상한 호암상 상금으로는 평양 적십자병원에 구급앰뷸런스를 기증하였는데 그녀의 한국사랑은 이처럼 유난히 남달랐다.
휴 린튼의 둘째 아들 스티브는 1995년 외증조부인 유진 벨의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진벨재단』을 설립하였고 북한의료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 그의 동생 존(인요한)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현재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장으로 있으며,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들 형제는 모두 한국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이처럼 유진 벨과 린튼 가문은 4대에 걸쳐 일제의 억압과 해방,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 등 한국 근대와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겪으며 한국인을 위해 항상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선대에는 한국의 복음화와 근대화 그리고 인재 양성을 도왔고, 이제는 『유진벨재단』을 통해 북한을 도우며 통일한국의 문을 여는 일을 하는 등 린튼가는 말 그대로 대를 이어오면서 한국과 함께 하고 있다. 이들 선교사 가문이 심어준 믿음은 우리나라가 민족적인 역경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원동력이 되어왔다. (감리교뉴스/ 박경진 장로/침조)
(03)
대전 오정동 한남대 내
오정골 선교사촌
대전 오정동 한남대 정문과 상징탑을 지나 경상대 뒷길을 걷다보면 ‘비밀스런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오정골 선교사촌(인돈학술원 일대)’이다. 시대는 영락없는 1950년대를 연상하게 한다.
주변에는 40∼50년생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솔부엉이·새매·소쩍새 등 5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어 생태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중앙의 채소밭과 입구 쪽에 있는 한옥 형태의 관리동이 정겨움을 더한다.
한남대 캠퍼스 내 ‘오정골 선교사촌’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대전시가 최근 이곳을 ‘영화 찍기 좋은 곳’으로 선정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입소문이 퍼지면서 방문객도 부쩍 늘었다.
‘영화의 도시’를 선언한 대전시는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포토 레터’를 제작했다. 시는 올 초부터 이 레터를 영화 제작자와 기획사 등에 보내고 있다.
선교사촌은 한남대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린튼(1891∼1960년·William A Linton, 한국명 인돈)의 부인(한국명 인사례)이 설계하고 한국인 목수가 시공했다. 붉은 벽돌에 한식 지붕을 올리고 진입로가 현관으로 보이는 동서양 건축이 어우러져 건축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수 한옥으로 지어진 관리동 1채와 동서양 건축이 어우러진 3개동의 기와 건물이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첫 번째 집은 ‘린튼 하우스’다. 1912년 22세 젊은 나이에 목포에 도착한 린튼은 그 후 48년 동안 전주 신흥학교와 한남대를 중심으로 미국 남장로교의 교육선교 사역에 헌신했다. ‘서머빌 하우스’로 부르는 두 번째 집은 1954년 내한해 94년까지 한남대 교수를 지낸 서머빌(John N Somerville) 선교사가 살았다. 서머빌은 안동 권씨 족보연구로 74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학 전문가다. 이 집은 현재 인돈학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머지 한 채인 ‘크림 하우스’는 52∼66년 한남대와 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던 크림(Keith R Crim, 한국명 김기수) 교수의 집이다.
당시 오정골에는 6만2800여㎡(1만9000여평)에 이르는 선교사촌이 조성돼 있었다. 침례교 선교사들이 살던 지역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육사업을 하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전자는 침례교신학대 소유로 넘어가고 이후 이 학교가 대전 하기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건설회사에 매각돼 건물과 수령 40년이 넘는 고목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지금은 9900㎡(3000여평) 규모의 선교사 주거지만 남아 있다.
한남대는 선교사들이 떠난 뒤인 94년 사택 일부에 인돈 선교사를 기념하는 ‘인돈학술원’을 개원,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와 각종 서적과 편지, 그림, 도자기 등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다.
한남대를 설립한 인돈은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와 함께 국내 대표적인 외국인 선교사로 꼽힌다. 두 사람의 후손들은 4∼5대에 걸쳐 이 땅에서 교육사업을 하거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인돈의 후손들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이 중단된 뒤에도 유진벨재단과 ‘한국을 사랑하는 기독교인 친구들’ 결성에 참여해 북한 동포 돕기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잘 알려진 반면, 인돈은 역사에 묻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인돈은 지난해 제91주년 3·1절 기념식에서야 독립운동 등에 앞장 선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인돈은 특히 여성교육을 강조했다. 한국이 높은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중심에 교육받은 여성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을 치면 바로 수업을 시작하라. 종을 치기까지 수업을 계속하라. 숙제를 내주어라. 교수와 학생은 수업시간에 빠지지 마라. 기독교 분위기를 유지하라.” 한국을 떠나기 전 유언으로 남긴 인돈의 교수 지침은 지금도 이 땅의 교육자들이 지켜야 할 기본이 되고 있다.
‘오정골 선교사촌’은 시민운동이 결실을 맺은 좋은 사례로 손꼽힌다. 99년 선교사촌 일부가 건설업자에 팔리면서 훼손 위기에 봉착했지만 대전의 뜻있는 시민들의 ‘땅 1평 사기 운동’과 이에 공감한 한남대의 도움으로 결국 해결됐다. 인돈학술원은 ‘건축문화의 해’인 99년 ‘좋은 건축물 40선’에 선정됐다. 또 북측 3개동은 2001년 대전시 문화재 자료 제44호로 지정됐다.
이문균 한남대 인돈학술원장은 “도심 속 비경으로 손꼽히는 ‘오정골 선교사촌’의 역사적 보존 가치가 교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04)
인요한 이야기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지구의 중심은 순천인 줄 알았고, '우주의 중심' 역시 순천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순천은 지금도 내 마음의 중심이다."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어보다 한국말을, 그것도 호남 사투리를 먼저 배웠다. 지금도 고향 사람들을 만나거나 조금 흥분이라도 하면 "아따, 긍께 거시기 왜 안있냐"하는 사투리부터 튀어나온다. 바로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의료센터 소장이다. 존 린튼이라는 미국 이름이 있지만 인요한으로 더 많이 불렸고 그보다는 어렸을 적 순천 사람들이 붙여준 '짠(John)'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그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은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자신을 '전라도 순천 촌놈'이라고 소개하는 '한국 사람' 인요한이 부르는 '한국 예찬'이다. 이 푸른 눈의 미국인이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라고 털어놓는 이유는 뭘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그것도 모자라 북한을 17차례 방문해 약 15만명의 결핵 환자의 완치를 도운 까닭은?
그가 그렇게나 한국 사람들에게 갚고 싶은 '사랑의 빚'이란 무엇일까. 지은이는 순천 골목길을 누비던 개구쟁이 '짠'이 한국의 응급의료시스템에 관심을 가져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보급하고 북한을 돕는 구호활동에 나서기까지 40여 년의 이야기 보따리를 진솔하고도 구수하게 풀어놓는다.
철 들어 대전외국인학교에 다니게 됐을 때의 외로움과 고통, 연세대 의예과 1학년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현장으로 달려가 시민군과 외신기자들 사이의 통역을 자처한 일, 이 사건이 계기가 돼 추방 위기에 놓이자 "한국과의 인연이 이대로 끊기는 게 아닌가 하는" 절박감에서 교제하던 치의예과 학생과의 결혼을 서두른 일, 친구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 미 대사관에 건의해 문무대에 입소한 일….
미국인이지만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한국의 젊은이로서 치열하게 시대를 살았던 사연들을 접하다보면 어느새 지은이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된다. 특히 그의 한국에 대한 '숙명에 가까운' 사명감이 대물림된 것이라는 사실은 책 읽기를 더욱 흥미롭게 해준다. 알려져 있다시피 지은이는 111년간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어온 린튼 가문 출신이다.
1895년 제물포항에 도착, 훗날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다. 북한 원조와 관련해 유진 벨 재단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터다. 20대 초반에 한국으로 건너와 48년에 걸쳐 의료와 선교 활동을 펼쳤던 윌리엄 린튼(인돈)이 할아버지이고 전남 지역을 거점으로 500개가 넘는 교회를 세운 휴 린튼(인휴)이 아버지다. 어머니 로이스 린튼도 결핵 퇴치에 일생을 바쳤다. 한국에 살고 있는 별난 외국인의 그저 그런 '아이 러브 코리아'가 아닐까 했던 첫 인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는 책이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의 한국 사랑을 적은 책으로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순천과 어릴 적 순천 친구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는, 자신을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과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서양 사람의 것이지만, 속내에는 누구보다 더 징글징글한 한국인의 기질을 지닌 그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원형을 키워 준 순천 땅, 순천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뜨거운 정(情)을 이야기한다.
광주의 아픔을 함께했고 한국의 응급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고 있고 북녘의 동포를 걱정하는 그는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나눔을 받는 사람이나 서로가 더 커지는, 나누는 삶의 비밀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비록 실행에 힘이 들어도 보람과 기쁨으로 더 커지는, 실천하는 사랑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눔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하는, 순정한 영혼을 지닌 한국인이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기독교 선교를 위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행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생의 한 시절을 이곳 한국 땅에서 보냈을 뿐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선교 사역지일 뿐이었고, 사역의 임무가 끝나자 이 땅을 떠났다. 그 많았던 선교사들과 한국과의 인연 중, 가장 오래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100년을 훌쩍 넘은 린튼 가와의 인연이다. 그 오래되고 특별한 인연은 1895년에 시작된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라 이야기되는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가 바로 그 해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이다.
목포를 중심으로 한 호남 선교 책임자로서 교육과 의료 사업에 힘쓴 유진 벨은 미국 조지아 주에서 온 청년 윌리엄 린튼(인돈)을 사위로 맞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 인요한의 친할아버지이다. 윌리엄 린튼 역시 호남 지역을 근거로 48년 간 교육 선교 사업을 벌였는데, 전주와 군산, 대전 지역에 수많은 중고등학교와 대학(한남대)을 설립했고, 자신의 네 아들은 모두 한국 땅에서 낳는다.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이 인요한의 아버지 휴 린튼(인휴)이다.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라 불렸던 그는 군산에서 태어나 불의의 교통 사고로 순천에서 죽을 때까지 전라도와 경상도 도서 산간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지금의 광양 제철소가 들어선 지역에 간척 사업을 벌여 땅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의 아내 로이스 린튼(인애자) 역시 한국에 만연했던 결핵 퇴치 사업을 위해 35년 동안이나 헌신적 삶을 살았다.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인요한이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곧 순천으로 옮겨져 어린 시절을 순천에서 보낸 인요한은 영어보다도 먼저 전라도 말을 배운 전라도 토박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15년 째 일하고 있는 그는, 나눔을 통해 기쁨을 얻는 핏줄을 속일 수 없어,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녘의 소외된 이웃들을 음지에서 돕고, 경제난과 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녘의 동포를 돕는 일에 힘쓰면서 그토록 오래된 린튼 가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을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순천과 어릴 적 순천 친구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는, 자신을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과 ‘강직하고 따뜻한 심성’이었다고 고백한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서양 사람의 것이지만, 속내에는 누구보다 더 징글징글한 한국인의 기질을 지닌 그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원형을 키워 준 순천 땅, 순천 사람들과 나누었던 그 뜨거운 정(情)을 이야기한다. 없이 살면서도 한없이 낙천적이었던 사람들, 내 것 네 것 없이 없는 살림을 나누어 쓸 줄 알았던 너른 인심, 서양인의 합리적 사고틀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서로를 보듬고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를 그는 한없이 긍정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이 말과 혀끝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반면에 한국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정을 나누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음을 누구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인요한이다. 누구보다도 낙천적이고, 삶에 대한 경건한 애착을 가졌던 한국 사람들이 왜 이리 각박해졌느냐고, 왜 그렇게 나약해졌느냐고, 우리가 물질을 얻는 대신 순정한 마음을 잃은 것은 아니냐고, 그는 서글퍼한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한국인의 원형’을 놓칠라 움켜쥐고 살고 있는, 우리의 옛 모습을 담고 있는 거울인지도 모르겠다.
인요한은 미국을 국적으로 두고 있는 외국인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더 한국인으로 살려고 노력해왔다. 어려운 공부 끝에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과 미국의 의사면허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서양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80년 광주의 아픔을 직접 겪었다. 당시 의예과 1학년이었던 인요한은 광주로부터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을 듣고는 직접 광주의 한복판을 찾아 들어가 전남도청에서 있었던 시민군과 외신기자들의 회견을 통역한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진압된 뒤, 통역 일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미 대사관을 통해 그에게 추방을 경고한다. 일종의 유배로, 순천에 내려가 어머니의 결핵 진료소 일을 돕게 되었지만 한동안 사찰 요원이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광주의 일을 통해 그는 이중으로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한국 정부로부터는 ‘빨갱이’로 지목되어 언제 추방명령이 떨어질지 몰랐고, 대학 내에서는 당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반미감정’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된 것이었다.
당시 언제 한국에서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마음에 두고 있던 치의대생 이지나와 결혼을 서두른다. 만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결혼식은 뒤로 미루고, 우선 혼인신고를 하고는 함께 살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광주는 그렇게 스무살 초반의 인요한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항상 말한다. 자신이 한국 땅에서 이만큼 자리 잡게 된 것이 한국 사람들과 더 없는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부모님과 한국 사람들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분들이 뿌리고 거두었던 사랑의 씨앗과 열매 덕분에 자신이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나올 수 있었고, 이렇게 큰 병원에서 일을 할 수 있었노라고. 그러고는 “한국 사람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다”라면서 타인에게 열려 있는 자신의 마음과 의술이 쓰일 곳을 찾는데 열심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휴 린튼 때문에 한국의 응급 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어 지금은 전국 소방서와 병원에 약 3,000여 대가 보급된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했다. 1997년부터는 셋째 형 스티븐 린튼과 함께 북한 결핵퇴치 지원사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일곱 번 북한을 드나들며, 결핵 검진차, 의료지원 차량, 기초의료 장비를 제공하였고, 약 15만 명의 북한 결핵환자가 완치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나눔을 받는 사람이나 서로가 더 커지는, 나누는 삶의 비밀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비록 실행에 힘이 들어도 보람과 기쁨으로 더 커지는, 실천하는 사랑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눔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하는, 순정한 영혼을 지닌 한국인이다. ('예스24' 제공)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파란 눈, 갈색 머리칼. 겉모습은 전형적인 서양인이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라치면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라고 밝히는 그는, 의리와 인정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영락없는 전라도 사내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을 전남 순천에서 보냈는데, 영어보다도 전라도 사투리가 더 능숙했던 ‘개구장이 짠’이로 유명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함께 쥐불놀이를 하고 서리를 다니던 순천 친구들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가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이며,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한국에 와 48년 동안 의료와 교육 선교 활동을 하신 윌리엄 린튼(인돈) 선교사,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500여 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휴 린튼(인휴) 선교사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나눔을 통해 기쁨을 얻는 핏줄을 속일 수 없어 그 자신도,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남녘의 소외된 이웃들과 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녘의 동포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한국의 응급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에도 힘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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