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27일 김제문화원과 호남문화콘텐츠연구원 '임진왜란, 김제군수 정담과 김제의 의병' 학술세미나 지정 토론자 참여
김제문화원과 호남문화콘텐츠연구원이
27일 오후 1시 문화원 2층 세미나실에서 '임진왜란, 김제군수 정담과 김제의 의병'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2022년 사적으로 승격한 웅치전적지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7월 8일 진안군 부귀면과 완주군 소양면의 경계에서 벌어진 조선 관군과 왜군의 전투 장소다.
관군은 의병과 함께 결사 항전 끝에 왜군을 물리쳐 곡창인 호남평야를 지켜냈다. 육상의 ‘한산대첩’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의 임란 극복에 중추적 역할을 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한산-용의 출현'에서도 등장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1592년 7월 8일 새벽,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이 전주로 진출하기 위해 웅치를 공격,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들은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왜군과 혈전을 벌여 결사적으로 맞섰지만, 최후 방어선인 웅치 정상부에서 정담을 비롯한 많은 군사가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7월 9일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전주시 산정동 일원) 근처까지 진출했지만 웅치전투에서의 심각한 전력 손실로 인해 안덕원 전투에서 패한 뒤 7월 10일 진안으로 철수함으로써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 점령에 실패했다.
이종근 한국문화 스토리작가(새전북신문 부국장)는 이용엽 선생(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의 제3주제 '정담장군의 호국 충절'의 주제 발표에 따른 토론자로 참여, '호남절의록'에 나타난 정담선생에 대해 토론했다.
제1주제는 '임진왜란 초기 방어와 그 의의'(발표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 토론 김경태 전남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제2주제는 '웅치전절에서 김제군수 정담의 역할'(발표 노영구 국방대학교 전략학부 교수, 토론 김건우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제4주제는 '임진왜란기 김제 지역민의 창의와 의병 활동'(발표 이욱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토론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제5주제는 '웅치전투 사적지 활용과 기념 사업 방안' (발표 장기재 완주군청 학예연구사, 토론 박정민 전북대 사학과 교수) 등으로 계속됐다.
이번 행사는 김제시가 주최하고 김제문화원과 호남문화콘텐츠연구원이 주관했다.
정담(鄭湛,1548년 ~ 1592년)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이다. 자는 징경이며 평해 정씨의 시조이다.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 김제군수가 됐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 이복남·황 박 등과 함께 웅치를 방어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 수천명은 전주 점령을 위해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웅치(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에 집결했다. 이치를 방어하고 있던 장군 권율은 김제군수 정담에게 웅치를 사수토록 명했다.
현재 ‘곰티재’라 불리던 웅치는 산세가 높고 험했다.
조선군은 3겹의 방어선을 치고 결사항전했다. 왜군 선봉대는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진격해 왔다. 1군과 2군이 결사적으로 그들을 막아 물리쳤다. 전열을 정비한 왜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1선과 2선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곳을 지키던 장군 이복남은 후퇴했다. 왜군은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정담 진영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넘어뜨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왜군에게 포위 당해 고립위기에 놓이자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를 권했다.
정담은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며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시위를 당겼다. 백병전이 시작되자 사력을 다해 싸우던 정담은 종사관 이봉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정담의 유해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제 군민들이 웅치에서 찾아냈다. 갑옷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조선군의 담력과 용맹에 감동했다. 그들은 웅치재에 흩어져 있던 조선 군사들의 유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 줬다. 그 위에는 ‘조선국의 충성심과 의로운 담기를 조문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고 쓴 푯말을 세워줬다.
웅치전투는 적을 무찌르지는 못했지만 전주에서 왜군을 막아낼 시간을 벌어줘 결국 전주성 점령을 단념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의 운명을 건 지상 최고의 해전, 한산대첩을 장엄한 스케일로 그려낸다.
이 영화의 한 장면에 웅치전투가 나온다. 1592년 음력 7월8일, 바다에선 한산대첩이 있었다면 육지에선 의병들이 관군과 합세해 왜군과 싸운 ‘육상의 한산대첩’ 웅치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해상에 한산대첩이 있을 때 육상에서는 웅치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 일상과 대한민국이 유지되고 있다. 웅치전투의 항전이 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됐다.
현재 이곳은 사적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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