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13> 덕진운동장건설비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63 전북대 1학생회관 뒤에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가 최근까지 자리했다.
비신(碑身)엔 ‘덕진공원지비’가 새겨져 있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 앞면에 1934년 전주읍장이었던 후지타니 사쿠지로(藤谷作次郞)가 지은 ‘덕진운동장건설비(德津運動場建設費)’가 있다.
뒷면에는 1929년 덕진공원을 조성하면서 만든 비석이다.
1929년 10월 덕진공원과 덕진운동장 건설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려고 1934년 전주읍장이었던 후지다니 사쿠지로의 명의로 세워졌다.
비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덕진공원과 운동장의 입구에 있었지만 1949년 전북대가 설립되면서 그 터가 학내로 편입됐다.
비석에는 "무릇 국민의 교양은 국운이 융성하고 번창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교양은 신체를 강건히 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데 있다"는 내용과 박기순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박기순은 그당시로선 아주 큰 돈인 3,000원을 기부했다. 이로 인해 연못 둘레에 석축을 쌓고 다리를 만들고 넓은 도로를 만들 수 있었다.
박기순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였던 중추원 참의를 비롯하여 전주 면협의회원, 전주도시금융조합 조합장 등으로 활동했던 행적이 있다.
德津運動場建設碑(앞면 원문)
維國民之敎養 有關於國運之隆昌 而其所以敎養者 莫若强健其身體修養其精神 高挽近體育之機關 或有全國之制定 或有各種運動之會以助長斯道爲急務也 我全州寔兩湖之一大都會也 人物日益繁昌 諸般之施設次第蹴新 而惟市民運動之場所 迄無建設 此實官民之有所宿算 而困財政之不許而未果也 何幸市內有志宮崎吉造氏 素有義俠 務爲公益 乃捐五千圓之金 以充工費 開拓廣場 設各種之道具 前副卿朴基順氏 踈財於公益 從前多有美擧 今又捐三千圓之金 繞池一周 築石架橋成容駟之路 盖此場所 距德津驛十數步 得往來之便利 南通市井 朓望軒豁 乾陵之松柏四時鬱蒼 德津池萬柄荷花令人心醉 其完備宏規 淸趣雅韶 寔半島之稀有也 於是乎 全州之眉目一新 以市民之修養心身得一道場也 肆立石面記之 使兩氏之美蹟 永傳而不朽 且事後來者覺此而興感 績前人之志 以圖文化之進展也
昭和九年三月建之 全州邑長 正五位勳五等 藤谷作次郎撰幷書
德津公園槪要(뒷면 원문)
建設年月 昭和四年十月 野球場 一九, 九四一平方米 陸上競技場 二一, 四六一平方米 庭球場 三, 三七九平方米 各競技場連絡道路一, 三二0米 右工費金五千圓 宮崎吉造氏寄附 德津池畔一周道路 一, 八三0米 右工費金三千圓 朴基順寄附
建設當時 主觀係者
全羅北道知事林茂樹 同內務部長大島良士 同土木課長大森鶴吉 全州郡守川崎一郎
全州面長守山五百足 同副面長朴定根 工事請負人富田理七
昭和九年三月建之 全州邑
'덕진공원지비(德津公園之碑)' 앞면(번역)
무릇 국민의 교양은 국운이 융성하고 번창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교양은 신체를 강건히 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데 있다. 그러한 이유로 체육기관이 필요하며, 전국적으로 체육시설을 갖추고 각종 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 전주는 두 개의 호수를 가진 큰 도시이다. 인물은 날로 번창하고 모든 시설이 바야흐로 새로워지고 있지만 시민운동장만은 아직 건설되지 못하였다. 이는 관민의 오랜 숙원이었지만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행히 시내의 유지 미야지마 요시츠구(宮崎吉造)씨가 공익사업에 힘써오던 터에 5천원을 쾌척하여 공사비로 충당하고 광장을 만들고 각종 도구를 설치하게 되었다. 전 부경(副卿) 박기순 씨도 공익을 위하여 재산을 기증하였는데, 3천원을 희사하여 연못 둘레에 석축을 쌓고 다리를 만들고 넓은 도로를 개설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덕진역에서 멀지 않아 왕래하기에도 편리하고, 남쪽으로는 시가지와 연결되어 넓은 거리를 바라볼 수 있다. 건지산 능묘의 송백(松柏)은 항상 울창하고 덕진 연못에 가득한 연꽃은 사람들을 심취하게 만든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국내에서도 드문 경치이다. 이로써 전주의 분위기가 더욱 새롭고 시민들이 심신을 수양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이 비를 세워 기록함으로써 이들의 아름다운 족적을 영원히 전하고 아울러 후손들이 이를 깨닫고 그 뜻을 이어 받아 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소화 9년(1934년) 3월에 이를 세우다
전주읍장 정5위 훈오 등 후지타니 사쿠지로(藤谷作次郞) 이 글을 짓고 씀
덕진공원개요(德津公園槪要):뒷면(번역)
건설연월 소화4년(1929년) 10월
야구장 19,941 평방미터
육상경기장 21,461 평방미터
정구장 3,379 평방미터
각 경기장 연결도로 1,320 미터
이상의 공사비 금5천원 미야지마 요시츠구(宮崎吉造) 기부
덕진연못 일주도로 1,830 미터
이상의 공사비 금3천원 박기순 기부
건설당시 주관계자
전라북도 도지사 林茂樹
동 내부부장 大島良士
동 토목과장 大森鶴吉
전주군수 川崎一郞
전주면장 守山五百足
동 부면장 朴定根
공사청부인 副田理七
소화 9년(1934년) 3월에 세우다
(사)체육발전연구원이 펴낸 ‘실록전북체육사’를 보면, ‘덕진운동장’은 1910년대 중반 현재 전주 금암동과 덕진동 덕진지(德津池) 일대 잡종지에 만들어졌던 간이 자전거 경기장 부지를 확장, 조성했다고 기록했다.
덕진운동장에서는 1935년 10월 27일 부 승격기념 전선(전선) 자전차경기회, 1936년 10월 17일 농촌진흥회 연합운동회, 1937년 6월 13일 전주 단오 그네 뛰기 대회, 1938년 5월 14일~15일 전선 남여자전거경기대회, 1938년 10월 1일 면 내 운동회 등이 열렸다.
2천 년대 초반 친일잔재 청산 바람이 거세지면서 '덕진공원 비석'은 수난을 겪었다.
전북지역 모 시민단체는 2003년 받침돌에 시멘트를 발랐고 이후 누군가가 페인트칠을 했다. 현재 시멘트는 벗겨졌지만 페인트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비석을 넓은 의미의 유산이라고 전제할 때 친일파 이름이 비문에 들어갔다거나 페인트가 뿌려진 것 자체도 역사의 산물이며, 연구자 입장에서 기록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
한때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전북대에 비석을 철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최근들어 덕진공원 밖으로 이전했다.
당시 운동장에는 야구장과 육상경기장, 정구장 등이 있었으며, 전북대가 설립되면서 그 터가 학교로 넘어갔다.
'전북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종근의 족적 (3) | 2024.10.08 |
---|---|
이종근 촬영 '원평집강소' 사진, 천재교과서에 실려 (2) | 2024.10.02 |
모악산(고은) (0) | 2024.09.30 |
이종근의 '전라감영과 전북 '와유(臥遊)' 호남학국학 저술지원 총서 23번째 책자로 발간 초읽기 (4) | 2024.09.30 |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11> 500년 전 자수를 사랑한 소세양 (4) | 2024.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