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206> 6·10만세의거 98주년, 정읍 백기게양 의거 주역 최태환
1926년 6월 10일 독립만세시위가 올해로 98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초·중등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 '6·10만세운동'이라고 간략히 언급돼 왔다. 2020년 12월 8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국무회의를 통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2021년 처음으로 6·10만세의거는 국가기념일로서 그 행사를 가졌다.
이날은 융희 황제(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이었기에 전국 각지에 망곡단(望哭團), 봉도단(奉悼團) 등이 조직,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타계를 애도했다. 9년 전
광무 황제(고종)의 독살설로 더욱 거세게 일어났던 3·1만세의거를 겪은 일제는 경찰을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하지만 전주·고창·구례·순창·통영·마산·하동·원산·이원·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일제강점기 두 번째 전국 규모의 반일만세의거였다. 이 의거로 인해 5,000여 명이 연행되었고, 뒤이어 이를 주도했던 조선공산당 간부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날 정읍에선 일장기에 검은 리본을 매달아 조의를 표하라는 조선총독부 지시를 따르지 않고 백기(白旗)를 게양, 정읍 거리가 온통 백기의 물결을 이룬 이색적인 반일의거가 있었다.
"백기를 세우세, 백기를 세우세"
1926년 6월 10일 정읍군 정읍면 시기리, 새벽 같이 못자리에 가서 모를 내기 전 작업인 '피사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농부 최태환(崔泰煥, 1897~1984)은 인근 일본인 집에 내걸린 이상한 일장기를 보았다.
그는 "순사가 와서 누가 백기를 세웠냐고 물으면, '최태환이가 세우라 했다'고 해라"라고 당부한 후 동아・조선일보 지국으로 가서 지국장에게 백기 세우기를 권했다.
또 끝내 일본기를 세우려고 한 집 3곳에 가 일본기를 빼앗아 찢고, 백기를 세울 것을 선전했다. 그는 거리를 다니면서 "오늘은 우리 임금께서 영원히 지하로 귀토하시는 장례일이니, 백기로 조문합시다"라고 외치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백기를 세우세, 백기를 세우세. 우리 임금 장일(葬日)에 백기를 세우세"하면서 백로지 한 절씩을 나눠주고 급히 돌아다녔다.
그날의 모습을 '시대일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井邑에 白色旗
인산 당일에
[정읍]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인산 당일인 지난 10일 오전에 전라북도 정읍(全北 井邑)에서는 각 상점(各商店)과 각종 음식점까지 일제히 철시(撤市)를 한 후 시가지의 각 상점은 물론 방방곡곡의 집집마다 옥양목(玉洋木)으로 순백색기(純白色旗)를 만들어 달고 애도의 뜻을 표하였으며, 뒤를 이어 동 11시에는 당지 청년회관(靑年會館)에서 사회 각 단체(社會各團體)와 학생시민연합(學生市民聯合)으로 성대한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였다고.
靑年 一名 檢擧 [정읍]
별항 보도한바 정읍에서는 집집이 다 흰기[白旗]를 달아 애도(哀悼)를 표하였다는데, 당지 경찰서 고등계(高等係)에서는 돌연이 계원이 출동하여 시기리(市基里)에 거주하는 최태환(崔泰煥)이라는 청년 한 명을 검거하여 엄중한 취조를 하는 중이라는데, 그 자세한 말은 이직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말을 들은 즉, 전기 최태환이가 그날 마침내 볼일이 있어 정거장(停車場)까지 갔다 읍내(邑內)로 돌아오는 길에 본정통(本町通)에서 직조(織造) 영업하는 풍산사(豊産社) 주인 안봉일(安奉日)이가 조기를 달려고 나오다가 그 청년을 만나 정거장통(停車場通)에는 어떻게 기를 달았더냐? 물으매, 전부 흰기[白旗]를 달았다고 말을 하여 조기를 달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계속(繼續) 취조 중이라는데, 장차 이 사건의 발단(發端)이 커짐에 따라 자못 주목할 뿐이라고
('시대일보'. 1926. 6. 14)'
당초 조선총복부는 이날 일장기에 검은 리본을 매달아 조의를 표하라고 지시했지만, 최태환 지사를 비롯한 정읍 군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어 같은 날 11시 사회 각 단체와 학생시민연합은 청년회관에서 죽은 황제를 향해 절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날 오후 4시가 넘자 최태환은 자진해 정읍경찰서로 들어섰다. 이에 경찰서장이 최태환을 서장실로 불렀다.
"네가 국기 셋을 찢어버린 것에 대하여는 적어도 30년 징역에 처할 것이나 국장 시에 한 일이니까 특사하여 내보내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읍군 정읍면 부면장 등 수입 명의 군민들은 그의 석방을 요청했고, 큰 시위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경찰서장은 46일 만에 풀어준다.
이태룡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소장(전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교장)은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행적을 기리던 독우(獨愚) 장봉선(張奉善, 1902~1972)은 '영산실록(瀛山實錄)'이란 이름으로 책을 간행했다.
그는 정읍 출신 사학자로 혼자 힘으로 1936년 '정읍군지'와 '전봉준실기', 1939년 '영산실기' 초간본, 1960년 '영산실기' 재간본 등을 저술했다. '영산실기' 재간본 서문엔 그 사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책이 과거 일정말엽에 발간되었는데, 다시 재간(再刊)된 이유는 그가 항일전선에 입각, 고투(苦鬪)하여 우리 민족의 정기를 북돋웠건만 그 당시 포악무도한 일제는 치안상 영향이 크다는 이유 아래 사실을 그대로 두고는 간행을 허가할 수 없는 조건을 걸고, 이를 전부 삭제하고 인쇄하도록 위협함으로써 만부득이 대일항쟁 등의 조목은 놈들의 무리한 요구에 침해당함은 만유감(萬遺憾)으로 생각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시지탄이나마 항일사항(抗日事項) 몇 조목과 해방 후의 언행 몇 가지를 첨가재간(添加再刊)하고…."
최지사는 광복 후 40여 년 동안 정읍에서 씨앗 장사를 하면서 4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또 애국애족하는 일에 솔선수범한 것이 언론에 다수 보도돼, 정읍시장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태룡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그동안 4차례에 걸쳐 최태환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진행했으나 번번이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최 지사의 행적은 당시 상황을 보도한 지역 신문과 도서·간행물 등에 기록돼 있지만, '독립운동 의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포상은 보류됐다.
포상 신청 시 공적서에 필요한 명확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으나 심사 결과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좀 더 객관적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판결문이 북한에 남아있다거나 독립 이후 행적이 규명되지 않을 경우 포상에서 제외된다. 심사 기관이 검증의 영역에서 실질적인 체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정읍에 백색기’('시대일보'. 1926.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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