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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이씨화수회와 ‘화수각지’ 발간




전주이씨 화수회가 지난달 28일 전주 덕진공원 옆 화수각에서 고종황제 탄생 172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번 행사는 '화수각지(花樹閣誌)' 번역 출판기념회도 마련됐다.
번역은 이충규박사(백제환경 대표이사)가 맡았다. 
 이번 행사는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선포하고, 일제 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고종 황제의 성덕을 기리고자 열린 행사다.
 분향, 헌작(술잔을 올림), 축문 낭독, 아헌례(조선 시대 종묘 제향 때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일) 등에 이어 분향의 순서로 진행됐다.
 1899년 전주이씨 시조 묘인 조경단을 세우고, 재신 이재곤을 중심으로 조직된 화수회는 전주 덕진공원 옆 승금정에 화수각을 지은 뒤 현재까지 매년 황궁다례와 축연을 베풀어오고 있다.


'화수(花樹)'란 말은 '꽃나무'라는 뜻이지만 특별한 사연이 전해진다.

 1350여 년 전에 당(唐)나라 위장(韋莊)이란 데서 일어난 고사(故事)에서 그 시원이 된다.

 원외랑(員外郞)벼슬의 위(韋)씨 집안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땅을 아들들이 서로 사양하며 물려받지 아니하므로, 놀리게 된 땅에 꽃나무가 무성해지자 이내 '꽃나무(紫荊樹) 아래에 사람들을 모으고 즐거이 지냈다'는데서 연유한다. 그것을 잠삼(岑參)이 위(韋)씨 집안을 경모하는 시 한 수를 읊은 '위원외장화수가(韋員外莊花樹歌)'란 시가 전한다.

그대 집의 형제우애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列卿)에 어사(御史)며 상서랑(尙書郞)들 일세
조회에서 돌아오면 꽃그늘 아래 늘 손님을 모으니,
꽃은 옥동이에 날리고 봄술은 마냥 향기로워라

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史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

이렇듯 같은 나무에 가지마다 꽃이 핀 그늘 아래서 펼쳐진 광경을 읊은 시가 형제우애를 통해서 집안의 화목과 단란함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게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 일이 '화수회(花樹會)'의 근원을 이룬다.
우리나라 종친회는 1580년(선조 5)의 안동 김씨의 모임부터이며, 화수회는 정조 때 화수당(花樹堂)을 지어 서당구실을 하며 ‘화수회’ 모임이 있은 후 부터다.
'화수회(花樹會)'는 본관은 다르지만 성(姓)만 같으면 친목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모임을 가진 것이며 특히 왕족이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다. 지금도 본관이 다른 전의와 예안 이(李)씨가 공동으로 ‘화수회’를 쓰고 있다. 
성씨에 따라서 대종회, 종문회, 동종회, 종회 등을 일괄 ‘종중’이라 사용하고 있다. 
'종친회(宗親會)'는 성(姓)과 본관이 같은 일가붙이끼리 모여서 하는 모꼬지를 말한다. 원래 종친은 왕족을 위하는 종친부(宗親府)가 있어 종(宗)자는 왕손 이외는 사용하지 못했으나 현재는 구분하지 않는다. 또한 한글종친회는 성을 한글로 표기하면 같지만 한자로 표기하면 다른 성씨가 있다. 즉 신씨는 신(申), 신(辛), 신(愼) 등이 있어 한글로 표기하면 같은 성씨라 해 모꼬지를 말한다.

'화수각지(花樹閣誌)’

 '중건승금정기(重建勝金亭記)'에 화수각은 승금정의 옛 주춧돌에 새롭게 건물을 올려 조경단 관리 재사(齋舍)와 별사(別樹)로 소속시키고, 매년 고종황제 탄신일에 문중 사람들이 정자 위에서 잔치를 열어 북쪽을 향해 만수를 축원하는 것을 상례(常禮)로 됐다고 한다. 이에 화수각은 종족(宗族)들이 조상을 존중하고 친족 간에 화목하게 하는 구심의 전당이다. 즉 '화수(花樹)'는 ‘숭조돈종(崇祖敦宗)'을 일컫는 깊은 뜻을 가졌다.
 이 책자는 앞부분에 화보, 전주이씨종약원사, 화수회 약사(略사)와 전북지원, 건산대학 설립 통발문과 전주이씨화수회 자료 등이 실렸다. 
 Ⅰ장은 해제편이다.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 등 문헌, ’화수각기(花樹閣記)‘ 등 현판문, ’승금정‘ 등 상량문, ’화수각운(花樹閣韻)‘ 등 판상운(주련) 등이다. 
Ⅱ장은 자료로,  금석문, 화수회 규약 등 규약, Ⅲ장은 창덕궁 금표, 전주 덕진연못과 승금정, 조경단 지석 연구 등 논고, Ⅳ장은  역대 회장 방명록, 화수각지 발문 등 기타로 구성됐다.
 '화수각지(花樹閣誌)'의 기본 자료는 2000년 8월 24일 '화수각지' 초판본을 모본(母本)으로 하고 각종 문서와 서류를 모아 연구했다. 이를 토대로 탈초(脫草)한 자료와 문헌을 국역하고, 관련된 자료를 발굴, 책의 완성도를 높엿다. '화수각지'를 처음 편집한 득수(得壽) 선생의 발문(跋文)을 보면 “관련된 사진도 게첨하고 원문에 음(音)을 달고 해석까지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나 여러 가지 여건상 원문을 옮겨 놓은 데 그쳤으며”고 했다. 따라서 본지(本誌)는 미비했던 점을 충족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봉산완문(封山完文)'은 조경단 속사인 완주 봉서사와 위봉사, 멀리는 남해 용문사와 화방사를 누차에 걸쳐 탐방하고 확인의 절차를 거쳐 게재했다. '어제칙유(御製飭諭와) '조경묘선생안(
肇慶廟先生案)'은 경기전에서 전례를 담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국역 작업에 임했고, 조경묘에 부임한 선생[영(令)]들의 약력과 근무 날 등을 파악하여 논문으로 발표한 것을 일부 게재했다.
 화수회(花樹會) 관련 여러 서류를 찾아 게재했다. 
1771년(영조 47)에 칠도 유생들은 조선왕조 시조인 사공 이한(李翰)과 부인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는 시조묘(始祖廟)의 건립을 건의했다. 태종대에 경기전 정전을 세웠고 영조대에는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선원경봉지지로서 전주로 숙원을 굳혔는데, 동학혁명군으로 전주가 한때 점령되자 태조 영정과 함께 조경묘 위패도 위봉산성(威鳳山城)에 피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건지산(乾止山)에는 조경단을, 발산(鉢山)에는 목조의 유허비를, 오목대(梧木臺)에는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세우게 되었다. 1899년 궁내부 특진관인 조경단봉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으로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검분이 실시됐다. 이 해 5월 고종황제의 성지에 따라 조경단이 건립될 당시 이재곤이 승금정 옛터에 화수각(花樹閣)을 만들었다. 
1913년 전주이씨화수회가 처음 창립되고 구왕실과의 서신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숭조돈종의 산실로 생각할 수 있다. 또, 화수회는 1965년 5월 건지산조경단봉향회(乾止山肇慶壇奉享會)를 파생(派生)시켰던 건지산 시조(始祖) 봉안지(奉安地) 관리와 제향 봉행의 토대를 갖추어 전국 종친들의 시조 묘 봉행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화수회는 해방 후 1947년 7월 25일(음력) 정기총회에서 건산대학(乾山大學) 설립(設立)을 건지산 아래에 추진, 전북대 탄생의 계기가 된 발통문(發通文)을 발굴, 본지에 게재했다. 이어 1974년 신축 건물을 짓고, 1999년 중수했다.
 건지산 경계를 표시한 창경궁 금표석에 대한 논고 '전주 건지산 조경단 주변에서 발견된 창덕궁 금표'를 전주문화원 김진돈 사무국장의 협조를 받아 기재했다. 
 새전북신문 이종근기자의 ’전주 덕진 연못과 승금정(勝金亭)‘은 30여 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로, 이정직, 유순, 한 장석, 양진영, 민주현, 이세보 등과 춘향전 등에 실린 시와 산문을 소개했다. 
그리고 시조와 관련된 '조선 왕실 시조묘 건립 배경과 신위봉안'과 '경기전풍비와 조경단비' 등의 이충규회장의 논고를 기재했다.
 이문용(1990~1987)옹주의 1987년 4월 1일의 영결식 장면을 찾아 소개했다. 이날 오전 10시 경기전 후정에서 영결식을 거행, 임실 삼계 고전 상여로 11시에 출발, 팔달로, 전주시청 앞, 전동성당 앞, 안덕교를 거쳐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현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에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1954년 음력 7월 25일 ‘조경단 중수 헌성금(獻誠金 열명록(列名錄)’과 ‘조경단 중수 헌성금’ 현판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충규 전주이씨 화수회 회장은 "늦었지만 24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초판본을 토대로 어려운 한문을 국역(國譯)하여 편찬했다. 또한 초판본에서 수록하지 못한 화수각(승금정)의 관련 문헌과 몇 편의 논문을 추록(追錄)하오니 필독의 화수각지가 되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종사를 올바르게 이끌어 주신 고 태연 회장님 영전에 이 책을 올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