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그려진 옛 도자기를 보며 글 없는 그림책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연꽃이 가득 핀 연못에서 물장난치는 동자의 모습이 새겨진 고려청자 대접은 한여름의 무성한 싱그러움이 가득한 그림책이 되고, 17세기 철화백자항아리에 그려진 장난스럽고 유머 넘치는 표정의 용에선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오른다. 못난 외모로 놀림을 받지만 마침내 세상을 구하는 멋진 용으로 승천하는 상상이다. 분청사기나 백자에 천진하게 그려진 각종 풀과 식물 그림은 어찌나 추상적이고 자유로운지 그림만 떼어내 당장 책으로 엮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지난 25일까지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서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국보순회전 : 모두의 곁으로 ’순백의 아름다움에 빠지다, 조선백자''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유물 백자 달항아리가 문화도시 남원에서 처음으로 전시됐다. 남원 시민들에게 백자 달항아리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광한루 때문이다.
광한루는 달 속에 있다고 전해지는 광한전을 의미하므로, 월궁으로도 불린다. 광한루 안에 완월정(玩月亭)이 자리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 남원은 한국 최대의 달의 도시다. 일본군을 물리친 인월면 인월리(引月里), 그리고 광한루원에서 요천을 건너는 길목인 승월교(昇月橋)에서 승월대(昇月臺)에 솟은 달을 바라보던 풍습도 있지 않았나. 남원은 200여 개가 넘는 달(月)과 관련된 지명을 갖고 있는 도시로 선인들이 천상의 월궁을 본 떠 만들었다는 광한루원에서 시민들의 주요 등산로인 애기봉까지 이어진 달맞이 길이 펼쳐져 있다. 달을 보러 나왔다는 승월대와 이성계 장군과 관련된 인월 달오름 마을 등 달과 연관된 지명과 마을이 1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는 세 가지 이야기를 했다. 첫째, 조선 왕실의 자기였던 백자에 대해 소개하고, 둘째, 조선전기 관요(官窯)와 글자를 새긴 백자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주로 제작된 달항아리를 선보였다. 달항아리의 이미지를 볼 때 나는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캔’ 그림이나 에드워드 웨스턴의 ‘변기’ 사진을 떠올린다. 희고 낡은 달항아리나 낡은 수프캔이나 흰 변기나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의 정수’이기에 아름다움으로의 도약이 가능했다. 타고난 귀중품들은 이미 아름다울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그런 심미적 도약이 불가능하다. 전시가 안타까운 것은 달항아리가 단 1점만 선보였기 때문이다. 금사리(金沙里)는 금모래가 깔린 마을이라니 이름부터가 아름답다. 그러나 금사리는 이름 못지않게 18C 전반에 아름다운 백자를 구워낸 가마터들이 산재한 곳이다. 금사리는 이제 이름처럼 아름답기만 한 마을은 아니다. 팔당댐으로 인해 앞강에 물이 차올라 강변의 금모래는 이미 찾아 볼 수 없게 된지 오래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최근들어 연간 관람객 10만 번째 관람객을 맞이하고 축하 행사를 가졌다. 그는 달항아리같은 존재다. 김병종화백은 남원시에 441점의 작품을 기증하지 않았나. 그는 1989년 서울대 앞 고시원에서 책을 쓰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병원 치료 중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관악산에 갔다가 언 땅에서 꽃 한 송이가 올라오는 것을 봤다. 그 모습이 작고 아름답고 절절해서 화폭에 담았다. 화가의 대표작인 '생명의 노래'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오늘 김화백의 '꽃'이란 작품에 시선이 더욱 더 끌리는 것은 왜 일까./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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