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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5> 만경8경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5> 만경8경

 전북특별자치도에 가장 큰 강은 만경강(萬頃江)이다. 길이 80.86km, 유역면적 1,504.35㎢에 이르는 만경강은 동진강, 금강 등과 함께 호남평야의 젖줄로 완주군 밤샘에서 발원하여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 등과 합류하여 새만금호로 흘러든다. 

넓은 들 가운데로 흐른다는 뜻이 담긴 만경강은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이기도 하다. 

만경강의 이름은 만경현(萬頃縣)에서 비롯됐다. 본래 만경은 백제의 두내산현(豆內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만경현으로 개칭되어 김제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 임피현(臨陂縣)에 속하였으며, 1914년 김제군에 합병됐다. 

만경의 '경(頃)'은 ‘백만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하류는 신창진, 상류는 안천(雁川)[지금의 고산천]과 남천(南川)[지금의 삼천과 전주천]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만경의 신창진은 근원이 고산의 남천에서 나오는데, 서쪽으로 흘러 김제 경계에 이르러 신창진이 되고 만경현을 지나 북쪽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신창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사수(泗水)’로 기록되어 있다..

만경강의 아름다운 8곳을 '만경8경'으로 꼽는다. 순서대로 △만경낙조 △신창지정 △사수곡류 △백구풍월 △비비낙안 △신천옥결 △봉동인락 △세심청류 등이다.

제1경은 만경낙조(萬頃落潮)다. 만경강의 아름다운 노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면서 만경강과 바다가 만나 소중한 생명을 품고, 수많은 철새가 반기는 곳이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갈대의 낙조가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만경강의 대표적인 조망공간이다.

제2경은 신창지정(新倉之情)이다. 일제 강점기 김제평야 쌀을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다리인 새창이 다리가 있는 곳으로 새창이 나루를 오가던 사람과 이곳에 남겨진 역사 문화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제3경은 사수곡류(泗水曲流)다. 만경강의 옛 이름인 사수를 표현하여 굽이치는 만경강의 중심에서 옛 물길과 사람들의 어우러짐을 의미하는 곳이다.

제4경은 백구풍월(白鷗風月)이다. 김제시 백구면에 있는 백구정에서 만경강을 내려가 보며 아름다운 경치를 벗 삼아 자연을 노래하는 곳이다.

제5경은 비비낙안(飛飛落雁)이다.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만경강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와 낙조가 아름다운 곳이다. 비비정 옆 옛 전라선 폐철교 위에는 멋진 카페 열차가 있어 최근에는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제6경은 신천옥결(新川玉潔)이다. 옥같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만경강의 허파 역할을 하면서 강폭이 250m 이상으로 넓어지고 유속이 느려져 습지 형태의 하천이 되는 신천습지가 있는 곳이다.

제7경은 봉동인락(鳳東人樂)이다. 편안하고 즐거운 봉동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곳이다.

제8경은 세심청류(洗心淸流)다. 완주군 고산면에 있는 세심정에 앉아 마음을 씻고 흐르는 만경강에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다.

'비비낙안'은 '옛 선비들이 비비정에 올라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풍류를 즐긴 것'을 뜻한다. 비비정은 조선 선조 때 무인 최영길이 별장으로 지은 정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한 마지막 길목으로도 유명하다. 

소실된 비비정은 1998년 복원됐다. 비비정에 오르면 한내를 가로지르는 옛 만경강 철교와, 비비정예술열차를 내려볼 수 있다. 열차를 개조한 카페에서 기념품을 둘러보고, 물고기 밥주기, 카페에 머무는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다보면 만경강에 해가 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형색색 하늘과 수면의 색이 변하고, 붉은 태양이 마침내 수면 아래로 몸을 감추는 시간 언제라도 셔터를 누르면 작품이 된다.

'새창이다리'는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와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를 잇고 있다. 이는 일제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다리로 유명하다.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만들어진 '새창이다리'(군산시 대야면 복교리에서 청하면 동지산리를 연결하며, 만경교, 사창이다리, 새챙이다리라고 말함)는 먼 옛날에는 신창진이 지나가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가 공사비 28만환을 들여, 쌀 침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건립,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 콘크리트 다리로 확인된다. 

새창이다리(길이 8백미터, 폭 3.5미터)는 6.25 전쟁의 폭격으로 인해 일부를 보완했지만 원형을 거의 고스란히 간직, 그 역사성이 아주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리가 노후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1988년(1984.11.16-1988.12.31) 바로 옆에 만경대교(총연장 600m, 교폭 10m)를 만들게 되면서 지금은 차량 통행이 금지된 상태로, 현재 다리 아래로 자전거도로가 날 계획으로 있는 만큼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신창진의 도중에서 짓다[新倉津途中作]’

신창진은 세 읍이 모이는 곳으로 / 新倉三邑會

웅령에서 처음 수원이 발하였는데 / 熊嶺初發源

조수가 들어오고 또 나가곤 하여 / 潮生復潮落

밤낮으로 끊임없이 흐르도다 / 日夕流渾渾

원근의 숲들은 마치 부추와 같아서 / 遠近樹如薺

갈대 부들만 번성할 뿐이 아니요 / 不獨萑蒲蕃

기러기 오리는 개 닭과 섞이었는데 / 雁鶩雜鷄狗

고기잡이 집들이 마을을 이루었네 / 漁戶自成村

기름진 토지는 몇 만 이랑이나 되는지 / 腴田幾萬頃

아득히 바다 어귀에 닿았으니 / 蒼茫接海門

호남은 본디 벼곡식이 풍부하지만 / 湖南富秔稻

취야를 의당 으뜸으로 논해야겠네 / 鷲野宜首論

내가 와서 성한 더위를 만났는데 / 我來觸隆赩

높은 누각이 무너진 담장 눌러 있어 / 高樓壓頹垣

높은 데 올라 찬 오얏을 먹으니 / 憑危嚼氷李

순식간에 답답증이 제거되누나 / 倐爾蠲煩寃

길이 자안의 글귀를 읊노니 / 長吟子安句

*이 천원이 내 눈을 놀라게 하는데 / 駭矚玆川原

편편이 날아 서쪽으로 가는 학은 / 翩翩西歸鶴

내려다보며 길이 말을 하는 듯하네 / 下顧似長言

구름 연기가 해도에 덮이었는데 / 雲煙冪海島

바람이 불어 구름 연기 환히 걷히니 / 砉然風披掀

봉래산은 전체가 맑고 깨끗한데 / 蓬萊盡澄澈

십주는 멀리 한 점일 뿐이로다 / 十洲夐一痕

손을 들어 나는 신선이 되려 하는데 / 擧手我欲仙

마부가 가는 수레를 묶어 놓았네 / 僕夫縻征軒

이 천원이……놀라게 하는데: 자안(子安)은 초당(初唐)의 문장가인 왕발(王勃)의 자인데, 그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산원은 광활하여 시야에 가득차고, 천택은 눈이 떡벌어져라 보는 눈을 놀라게 하도다.[山原曠其盈視 川澤盱其駭矚]” 한 데서 온 말이다.

전라감사를 역인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김제 신창진에 들려 시(新倉津途中作)’를 남겼다.

김종직은 시에서 신창진은 '세 읍이 모이는 곳(新倉三邑會)'이라고 했  조선 팔도의 노래에서도 신창원(新倉院)을 챙기고 있듯이 해.육상의 교통요충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창진(新倉津) : 서쪽 70리에 있으며, 김제와는 남쪽으로 20리 거리에다. 이 시의 세 고을은 전주, 만경, 임피를 가리킨다. 바로 이곳엔 누각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전라도 임피현(臨陂縣) 신창진원루(新倉津院樓)는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임피면 만경강 일대의 있었던 원의 누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임피현(臨陂縣)편에 신창진(新倉津)은 남쪽으로 20리이며, 사수(泗水)의 하류이고, 김제ㆍ만경과 통힌다. 신창원(新倉院) 신창진의 언덕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곳 신창진원에는 누각이 있었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조선에서는 당송(唐宋)의 고사(故事)를 따라서 역정(驛亭)마다 모두 관기(官妓)를 두었는데...."라고 했듯이 역에는 누각이 있었다.

임진난 의병 고경명이 이곳에 들려 원은 만경 북쪽(在萬頃北)에 있었다고 이르고 생애 말년에 신창진 관련 시(題新倉津院樓)를 남겼다.

쓰고 단 세상 맛 두루 맛보니 / 머리만 희게 되는 걱정 뿐이로세

강관(江關)에서 짓는 시 씁쓸하기만 하고/경락(京輦)의 옛 친구들 점점 멀어지네

世味辛甘略遍嘗 半生憂患鬢蒼浪 江關詞賦空蕭瑟 京輦交游轉渺茫

세번이나 꺾인 팔 더 꺽인 것도 없지만 /아홉구비 간장이 꼬부라지는 듯하오

가을철 나그네길 서해까지 이르러 / 높은 누에 혼자 올라 석양만 바라보노라

三折已無堪折臂 九回猶有剩回腸 秋風客路遵西海 天畔高樓倚夕陽

고경명이 이곳에 다녀간 것은 그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1554~1593)가 당시의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