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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4> 간재 전우선생의 흰색 모자& 검은색 장보관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4> 간재 전우선생의 흰색 모자& 검은색 장보관
간재 전우선생이 쓴 흰색 모자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영정(1920년, 국립중앙박물관 2021년 이건희 기증)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그의 80세 가량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그런데 초상화 주인공 간재 전우선생이 흰색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일까.
1920년은 고종이 승하한 지 1년이 지난 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흰색 도포와 장보관(章甫冠)과 유사한 백관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또 그가 그린 다른 작품 '고종황제 어진'은 고종 황제가 승하한 이듬해인 1920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고종황제를 기리던 학자 전우를 위해 채용신이 그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채용신 화풍으로 그려진 고종어진이 여러 점 전해 오는데, 화가의 낙관이 있는 작품이다. 
전우가 개인적으로 모시기 위한 어진이었기 때문에 채용신의 낙관이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종황제어진’(1920)을 보면 조선시대 초상화와 닮은 듯 다르다. 
당시에 유입된 서양화 기법의 영향을 받아서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없던 명암법이 얼굴과 옷 주름에 등장한다.
이 초상화는 화사로 지내던 1902년 무렵 제작된 것이 아니다.
위의 작품은 1920년 전우가 기거하던 부안 계화도로 건너가서 대엿새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시는 전우가 직접 지은 '자경(自警)'이다. 그 제자 김종호(金鍾昊)가 그림 위에 직접 쓴 것이다. '자경'은 자신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좌우 두 손은 공평함(公)을 잡고 마음에는 올바름을 쌓아 두면, 이 공평함과 올바름이 큰 덕을 이룰 터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십중팔구 사사로이 굽은 마음을 드러내는가.
바름(是)을 구하고 그름(非)을 버리는 것은 회암(晦庵) 선생(朱熹)이 남겨 놓은 것이니,
마음은 굳건하게 하고 기운을 잘 다스려야 한다.이로써 본성을 되찾아야 하느니.(左右握公 方寸蘊直 旣直且公 宜成大德 奈何所發 十九私曲 求是去非 晦父遺囑 心要操存 氣必檢束 期以屬 冀幸性復)
선비의 절개와 강건함을 노래하는 시다. 채용신은 전우의 강직한 시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도와 색채의 농담을 조절, 엄격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는 채용신의 그림에 맞추어 시가 엄정하게 씌어졌든지.
이 글 아래 좌우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있다.
문인 김종호(1874~1949)가 삼가 쓰다.(좌)
경신년(1920년) 오월 상순 전 부사 종이품 채석지(蔡石芝)가 모사하다.(우)
석지 채용신상(도서)
門人金鍾昊謹書(좌)
庚申夏五月上澣從二品 前府使 蔡石芝摹寫(우)
石芝 蔡龍臣章
'전우 초상'의 왼편 중단에는 “庚申夏五月上澣從二品 前府使 蔡石芝摹寫”라고 적혀 있고, 양각한 방인(方印)의 ‘석지(石芝)’, 
음각한 방인의 ‘채용신장(蔡龍臣章)’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이를 통해 1920년에 석지가 그린 이모본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전우의 초상은 여러 점의 이모본(移模本)이 전하고 있다. 전우의 초상 가운데 가장 그린 시기가 빠른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911년 작품이다. 이때는 1910년 국권침탈로 나라를 잃은 직후다.
그렇다면 '전우 초상'의 이 원본은 언제 그려진 것일까.
채용신의 ‘석강일기(石江實記)’에는 전우가 머물고 있던 부안 계화도(界火島)를 1920년에 방문,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석강실기'엔 전우의 말년에 채용신이 그를 위해 고종어진을 그려주었는데 글자를 수정한 일화가 전한다.
'지금 산하가 빛을 바꾸고 임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구구한 이 마음은 다만 머리를 잡고 통곡하며 조용히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폐하를 구천에서 절할 뿐입니다.다행스럽게도 선제(先帝, 고종황제)의 환한 영정 얼굴을 선생의 절묘한 신필(神筆)의 모사(摹寫)
솜씨로 아직 죽지 않은 미천한 이 신하에게 은혜를 베풀어 뵙게 해 주시다니 이 뜻을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영정의 전면에 '태상(太上)' 두 글자는 마땅히 '광무(光武)'로 바꾸어야 하겠고, 후면의 '석지팔십옹(石芝八十翁)' 다섯글자는 격에 맞지 않으니 삭제하고, 다만 종2품(從二品) 아래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보태 넣어야 하겠습니다.살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변변치 않은 옷감으로 저의 정을 나타냅니다. 바라건대 살펴주시오'
'전우 초상'은 1920년에 그린 원본을 놓고 다시 모사(模寫)한 것인데, 두 번 모두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채용신은 1920년에 가장 많은 전우 초상의 모사본을 남겼다. 배경에 검게 음영을 줌으로써 몸이 배경과 공간 속에서 분리되는 효과를 주었다. 얼굴에서는 콧등과 눈썹 아래의 돌출부, 그리고 눈두덩이 등에 백광(白光)효과를 주어 얼굴의 고저를 드러냈다. 피부의 결에 따라 수많은 터치로 육리문을 구사했다.
얼굴의 색조는 암황색으로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탁한 느낌이다. 수염은 한올 한올 그려 입체감을 살렸다. 눈동자에도 하이라이트를 넣어 생기를 주었다. 옷주름도 선과 명암을 함께 표현함으로써 주름과 굴곡이 드러나되 선을 모두 뺀 상태이다.
채용신과 전우는 망국(亡國)의 심경을 서로 토로하는 절친한 관계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전우는 80세, 채용신은 73세였다. 노년기 화가의 그림이라 하기엔 놀라울 정도로 세밀함이나 밀도가 충실하지만, 색감의 선명도가 약간 떨어진 감이 있다. 
채용신이 73세의 고령에도 정확한 눈과 붓으로 옮긴 전우의 모습에는 격동의 시대를 바라보는 노 유학자의 비분과 강개가 서려 있는 듯하다.
어두운 현실을 뚫어지게 직시하는 시선, 살짝 다문 입술에서 근엄함과 숙연함이 묻어난다. 피부는 마치 살아있는 살갗 같다. 흑선과 백선으로 세밀하게 그린 수염은 바람에 나부낄 듯 자연스럽다. 오른쪽 이마에 난 무사나귀와 검버섯까지 정교하게 드러난다. 무표정 속에서 표정을 담아냈고 보이지 않는 심정까지 드러냈다.
한국 초상기법의 정신과 심오한 철학, 항일사상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채용신을 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김은호보다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뭘까. 김은호가 채색화로 이름을 날렸지만, 전통성이나 독자성을 찾기 어려운 친일 미술가였다면 채용신은 전통과 근대미술의 융합을 꾀한 항일의식의 화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우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스승 임헌회를 따르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러 벼슬을 제수 받고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수구파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개화파로부터 전우를 죽여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전통적인 도학의 중흥만이 국권회복의 참된 길이라고 여기고 부안, 군산 등지의 작은 섬에서 학문을 폈으며, 72세부터 82세에 죽을 때까지 계화도에 정착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 최후의 정통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채용신은 무과로 급제하였지만 초상화에 뛰어나 고종 어진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전국을 여행하며 여러 영당이나 사당의 초상화를 이모하거나 생존 인물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다. 또한 채색 화조화에도 뛰어났다. 
전우가 계화도에 머물던 80세때(1920년, 계화도에 머물던 시기)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그의 문인 김종호(金鍾昊)가 제발을 적었다. 화면의 3분의 1까지 차지하는 돗자리에 황색 평상복차림에 높은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있다.
얼굴 표현은 짧은 필선으로 채색을 반복하여 음영을 표현했다. 완고한 선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옷주름은 소략하고 음영을 가하였으며, 배경에도 먹으로 선염을 가하여 신체가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채용신은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했다. 조선시대 전통 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로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면에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채석지 필법’이라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다. 
1905년 관직을 마치고 전주로 내려와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1923년 정읍시 신태인읍으로 이주해 채석강도화소를 만들고 초상화 전문 공방을 운영하다가 1941년 정읍에서 생을 마감했다.
'성리학자 간재 전우가 사용했던 쓰개는 모시에 검은 선을 둘렀다'
 간재 전우선생은 어떤 쓰개를 살고 살았을까.
'간재 전우(부안청자박물관 소장 )초상'은 조선 말기 성리학자의 초상으로 백색 학창의를 입고 머리에는 흑색 장보관을 썼다. 사용했던 쓰개는 모시에 검은 선을 두른 점이 특히 돋보인다. 
20세기 초반에 쓴 그의 쓰개는 삼베로 만든 감투 형태가 많았다. 이 모두가 전봉희씨가 기증한 유물이다.
3층 정자관 형태의 쓰개로 그가 쓰던 사대부 관모(높이 25cm, 지름 27cm)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모시에 검은 선을 둘러 만들었다. 장보관 형태의 삼베 쓰개로 쓰던 간재 전우가 착용했던 모자(높이 24cm, 지름 26cm)도 있다.
내모(內帽)에 뒤에서 옆까지 외모(外帽)가 둘러진 형태다. 그가 상투 위에 썼던 생모시 관(冠)으로 심의, 복건과 함께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검은 삼베로 오량관(五梁官)의 양(梁)에 해당하는 세로 무늬를 넣어 짜고 양 옆에 끈을 달아 묶게 했다.(높이 23.5cm, 지름 27cm, 끈길이 91cm. 끈너비 1.5cm)
모시 쓰개의 일종(높이 20.5cm, 지름 27cm)도, 삼베로 만든 감투 형태의 쓰개(높이 18.5cm, 지름 27cm)도 보인다.
이들은 국립민속박물관과 경운박물관에서 ‘소색비무색(素色非無色), 흰옷에 깃든 빛깔’ 공동기획전에 선보였다.
흰옷을 즐겨 입은 우리 민족의 문화상을 보여주면서 백의의 의미를 살펴보는 전시였다.
 전시는 ‘모시 두루마기’ 등 190여 점의 복식 자료를 통해 예로부터 흰옷을 즐겨 입은 우리 민족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백의(白衣)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백의(白衣)는 흰색이 아니라 소색(素色)이다. 소색이 정확한 표현으로, 소색은 원료 섬유가 지닌 천연의 색을 뜻한다. 예로부터 백의는 염색하지 않은 명주, 모시, 삼베, 무명 등의 직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직물 본연의 색을 띠고 있는 백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흰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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