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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3> 전주 덕진공원 '승금정(勝金亭)'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3> 전주 덕진공원 '승금정(勝金亭)'


지금,  덕진연못의 연꽃은 서서히 불타오르는 연등입니다.
1846년 전라감사 이시재(李時在,1785-?)가 관련된 '승금정시회화첩(勝金亭詩會畫帖,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롭게 선보입니다. 1992년 첫 모습을 드러낸 지 32년만에 반가운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시재는 전주 덕진 연못에 승금정(勝金亭)과 취소정(吹簫亭)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제군수 조운시(趙雲始, 1787-?), 태인현감 조석필(曺錫弼, 1802-?) 등 지역 수령과 전주 이름있는 문인 48명을 초청, 연회를 베풀면서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했습니다.
이 그림은 중국 왕희지의 '난정수계도' 구성을 그대로 따라, 물길을 따라 인물들을 배치하여 흥미롭습니다. 
시회화첩은 그림의 제목, 이시재의 서문, 모임 그림, 승금정 상량문, 취소정 상량문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승금정시회화첩(勝金亭 詩會畵帖)’은 1993년 2월 18일 전주에서 발견됐습니디. 
1846년 전주 덕진연못의 정자인 승금정(金亭) 신축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연회장면을 담은 대형기록화 발견, 길이 16m, 높이 30m 한지 두루마리 대작입니다.
당시 연회에 참석했던 자의 후손이라는 김모씨(61세)가 가보로 물려받은 것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전라감사 이시재가 덕진연못 취소정과 승금정을 짓고 낙성식을 즈음해 고을의 이름있는 시객을 초청 연회를 베풀면서 화공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것. 이 자리에 참석한 48명 시객의 시문이 실려있고, 이들의 모임인 '후향시사계(後香詩社契)'계첩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고 이건희(1942~2030) 삼성전자 회장이었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는12일부터 상설전시실 전시품 일부를 교체 전시, 12월 1일까지  전시를 갖습니다.
이번 전시는 온 국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소중한 문화유산을 기증한 고 이건희 회장 큰 뜻을 되새기고자 이건희 기증품으로 구성했습니다.
박물관은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 가운데 채용신(蔡龍臣, 1850~1941), 최석환(崔奭煥,1808~?) 등 전북 출신 화가 작품을 중심으로 선별,  선보입니다.
자연을 즐기고 배우고자 했던 선인 마음을 화폭에 담은 꽃과 새, 동물 그림,  그리고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난초를 함께 그린 그림은 화려한 채색과 기품있는 묵향으로 관람객을 맞이할 예정입니다. 
고종 어진 등을 그린 어진화사로 잘 알려진 ‘전주화원’ 채용신이 그린 전우 초상은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과 피부결이 느껴질 것만 같은 사실적 화풍으로 그려져 근대기 새로운 초상화 기법을 보여줍니다.
‘완산팔8경’의 하나였던 덕진 연못은 덕진 공원의 중심부를 이룹니다. 단옷날 연못 부근 덕진교 아래에 부녀자들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웃옷을 벗고, 몸을 씻고 머리 감는 보기 드문 장면이 펼쳐졌던 곳입니다. 
공원 후문 건너 건지산 줄기에는 전주이씨 시조묘를 모신 조경단 등 왕실과 관련된 자취들이 남아 있습니다.
'과거 왕실의 기를 북돋는다'는 의미로 지어졌던 승금정(勝金亭)은 지금은 전주 이씨 종친회 건물로 쓰이는 화수각(花樹閣)으로 바뀌어 공원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김진돈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은 중국의 명승 금릉(金陵)의 경치보다 좋다는 해석을 합니다.
1992년 2월 18일 '승금정 시회화첩(勝金亭詩會畵帖)'이 발견됐습니다.
승금정의 신축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대형기록화로 길이 16미터, 높이 30cm에 이릅니다.
이 정자는 1899년 중수(重修)때 이름이 전주이씨화수각(花樹閣)으로 바뀌었습니다. 동원 이재곤(1859~1943)이 중건하고 화수각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이 화수각을 전주이씨건지산봉향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명소인 까닭에 이 일대에 취소정, 풍월정 등 정자가 즐비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김제출신인 석정 이정직(1842∼1910)의 '석정이정직유고집'을 보다가 '덕진의 풍속을 기록한 두 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德津記俗風二首) 그는 한약방을 하던 시절에 전주에서 살았습니다.

 

'덕진의 제방물 제방에 가득 차고
연잎은 둥실둥실 푸르름이 다르네.
전주는 해마다 단오절에
승금정 아래에 서로 손잡아 끈다네.
승금정 아래 저녁 놀 붉은데
남녀 분분히 좁은 길 함께 하네
좋은 때라 서로 피하지 아니하니
덕진의 제방물 머리 부스럼 낮게 한다네'

 

1483년에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노포(老圃) 유순(柳洵,1441~1517)과 시객(詩客)들이 벽진(碧津 청강석벽 나루)옆 풍월정(風月亭)에서 시를 지었으며, 그 정신을 잇고자 후향시사계를 만들었다고 전부읍지(全州邑誌)에 전하고 있습니다.
정원용(鄭元容, 1783~1873 고종10)이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순치차 들려 이곳에 오르고 시(甲寅夏 就養完營 登勝金亭)를 지었습니다.
한장석(1832~1894)이 그의 나이 38세 때 남고산성으로 가서 만경대(萬景臺)에 오르고 승금정(勝金亭)을 구경하고 화산서원(華山書院)에 참배했다고 합니다.
남행집 서문(南行集小序)에"..... 40리를 걸어 승금정(勝金亭)에 올랐는데, 정자는 전주(全州) 북쪽 덕진구(德眞溝)가에 있고 이시재(李時在)가 지은 것이다. 긴 제방이 놓인 평호(平湖)에 연꽃과 어선이 있어 의연히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상상케 한다"고 그 감흥을 나타냈습니다.
양진영(樑進永, 1788~1860)은 승금정이 전부부 북쪽에 있다며 시(勝金亭 在全州府北)를 남겼습니다.(湖山氣色已淸秋 亭出林間俯碧流 十里荷花眞境在 勝金還復似杭州 晩羲集卷之二)
‘덕진채련(德津採連)’은 완산8경의 하나로, 풍월정에 앉아 저녁 노을과 달빛을 끼고 뜸부기 우는 호면(湖面)의 피리 소리 실은 어화에 젖은 채 맞은 편 승금정을 내다보는 던진연못의 풍경을 이름합니다.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이 만든 가사 ‘완산가(完山歌)’와 서애집(沙厓集)에 소재한 전주 관련 한시들이 나옵니다.
민주현은 1854년 47세의 나이로 전주 조경묘(肇慶廟) 별검(別檢)에 제수, 빈 재실(齋室)을 지키면서 무료히 나날은 보내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이듬해 봄에 현령 정의관(鄭義觀), 참봉 이봉현(李鳳賢), 진사 최현우(崔顯宇) 등 몇몇 벗들과 함께 완산의 승경인 한벽당, 만경대(萬景臺), 옥류동(玉流洞) 등을 구경하고 돌아와 1856년에 완산의 풍물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은 ‘완산가’를 지었습니다.
그의 문집인 ‘사애집(沙厓集)’의 ‘승금정수조가두용판상운(勝金亭水調歌頭用板上韻)’에서는 덕진지에 배를 띄워 봄가을로 꽃을 감상하는 감회를 묘미있게 표현했고, ‘지완부상동성화유(到完府賞東城花柳)’에서는 전주부에서 맞이하는 봄날의 풍경을 그려 놓았습니다.
'완산가'엔 '덕진지 상(上) 넓은 정자 금릉에서 나단 말가'라 면서 가을의 덕진지를 묘사했습니다.
'분부하여 각기 분발하신 후에 어사또 행장을 차리는데 모양 보소. (중략)살만 남은 헌 부채에 솔방울 선추달아 일광을 가리고 내려올 제 통새암, 삼례 숙소하고 한내, 주엽쟁이, 가리내, 싱금정 구경하고 숲정이, 공북루 서문을 얼른 지나 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소강남여기로다. 기린토월(麒麟吐月)이며 한벽청연(寒碧淸煙), 남고모종(南固暮鍾), 곤지망월(坤止望月), 다가사후(多佳射侯), 덕진채련(德眞採蓮), 비비락안(飛飛落雁), 위봉폭포(威鳳瀑布), 완산팔경을 다 구경하고 차차로 암행(暗行)해 내려올 제 각읍 수령들이 어사 났단 말을 듣고 민정(民情)을 가다듬고 전공사(前公事)를 염려할 제 하인인들 편하리요’
춘향가에도 '승금정'의 경치가 드러납니다.
동국사 소장 엽서 '전주부 승금정'은 전주부 덕진지로 표기돼 사라진 기억을 되뇌게 하고 있습니다.
이세보(李世輔,1832∼1895)는 한벽당보다 승금정을 높이보고 승금지(勝金池)라고 하며 동국의 금릉(金陵)이라고 시조로 읊었습니다.
 이세보는 1860년 완도 앞바다 신지도로 유배를 가던 도중 전주를 지나면서 옛 일을 돼새깁니다. 그의 아버지 이단화(李端和, 1812~1860)가 금구현령(金溝縣令)을 맡아 전주진관병마절제도위(全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했고 1855년 전주판관으로 부임했기에 전주를 직접 돌아볼 기회가 많았으리라.
덕진공원의 호수 절반을 차지하는 연잎과 그 위에 하얗게 핀 연꽃은 장관입니다. 누가 알랴. 나도 모르게 취해지는 알싸한 이내 마음을.
덕진공원의 대부분이 홍련인 이들은 보는 사람들이 있든 없든 초록빛 연잎과 속살을 서로 비벼대면서 속삭입니다.
봄날의 벚꽃이 비 오면 지고 마는 일회용이라면 여름의 연꽃은 강렬한 태양아래 오래도록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는 꽃입니다.
진흙 속에 고고하게 꽃을 피어내는 강인함이니 그 정도의 호사는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연꽃이 군락으로 늪을 이루고 있지만 함부로 넝쿨을 엮거나 헤프게 가지를 뻗지 않는 연꽃의 도도함. 결코 가까이 가서 만져보거나 희롱할 수 없는 품격이 있는 군자의 꽃일지니.
덕진 연화정도서관에 서서 넓게 펼쳐진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저절로 찾아든 상쾌한 기분은 하루 일과를 다시 시작하는 청량제입니다.
연꽃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이며, 이슬 맺힌 청초함을 느끼기 위한 새벽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호수 절반을 채우고 있는 홍련은 붉디 못해 빨갛고 꽃밑을 바치고 있는 푸른 연잎은 뜨거운 햇빛을 가리는 가림막입니다.
백제의 이 땅에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연꽃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멋진 합창이 일제히 시작됩니다.
천 년의 세월을 품고 고고하게 핀 연꽃의 아련함으로 그렇게 천년의 시간을 오가면서 향기를 피워내고 있습니다.
지금 덕진연못의 연꽃은 서서히 불타오르는 연등입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볼까?”

승금정 상량문과 주련

 

승금정 상량문

 

서늘한 5월에 감호(鑑湖, 鏡湖)가 항주(杭州)의 미목(眉目)을 나열하고 열 길 옥정(玉井)을 열어 서시(西施)의 뺨을 비추었네. 흰 명주는 그녀의 띠와 옷깃이 되고 붉은 꽃은 그녀가 바르는 분()이 되었네. 궤안에 산봉우리를 담그니 원릉(原陵)에 남은 빛이 넘쳤네.

지난 을사년(1845, 헌종 11)에 나는 왕명(王命)으로 호남을 안찰(安察)했네. 이 땅은 뉘로 익성(翼星)과 진성(軫星)의 별자리에 응하니 옛날 형주(荊州)와 양주(陽州) 같은 도회지라 할 만하다. 뽕나무와 삼나무가 무성하니 옛날 풍패(豊沛)의 산천이라 이를 만하네.(중략) 삼가 바ㄹ건대, 들보를 올린 뒤 선생(先生)의 풍채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며, 태수(太守)의 즐거움은 취하면 같이 마시고 깨어나면 글로 기술하게 하소서. , 육오(六鰲)가 공손히 떠받쳐 오랜 세월이 흘러도 더 높아지고 오마(五馬)가 두루 만나 빈주(賓主)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다하게 하소서.(전라감사 이시재(李時在) 짓고 이삼만(李三晩)이 쓰다)

 

승금정 판상운(板上韻)

 

추옹 이시재

 

삼백년간 연꽃이랑 계수나무 놀더니

연꽃은 시들고 계수는 늙어 물만 부질없이 흐르네

아직 남은 단구(短句)는 전날의 역사가 되어

이름난 정자 어느 언덕에 있는지 분별 못하겠네

한 조각 가을 정취에 온 고을이 꽃으로 가득하고

몇 가락 어부의 피리 소리에 달이 물가로 찾아드네

푸른 창과 붉은 문 새롭게 단장했으니

화려한 비단 곳 챙겨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여 다 시름마오

 

안무사(전라감사 이돈상)

 

몇 번이나 이 정자에 이르러 노닐었던가

물처럼 흐른 세월에 화들짝 놀랐네

늦가을 그림 배 부용 핀 갯벌에 있고

이날 푸른 술동이 복숭아꽃 살구꽃 핀 언덕에 있네

가랑비는 개어 푸른 나무 산비탈로 돌아가고

석양은 백구 노니는 모래섬으로 들어가네

금릉(金陵)이 정녕 아름답 해도 이곳이 도리어 나으니

한 번 난간에 의지할 적마다 온갖 시름 흩어지네.(무인년, 1978년 봄에 안무사 이돈상(李敦相, 도움말=국역 '풍패집록'. 이동희.김숙석 박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