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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1> 전주 회화나무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51> 전주 회화나무


△이상진이 교동에 심은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아 온 나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했다. 또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회화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고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한테 임금이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고 하며, 모든 나무 가운데서 으뜸으로 치는 신목(神木)이다. 
만암 이상진은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로 유명한 사람다. 청백리(淸白吏)의 청(淸)은 맑은 물처럼 티없이 깨끗하다는 뜻이고, 백(白)은 다른 빛깔에 전혀 물들지 않은 흰색으로 때묻지 않았다는 뜻이며, 리(吏)는 관리, 벼슬아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청백리는 깊은 산 속의 맑고 깨끗한 물처럼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다. 
그의 생가터는 한옥마을 내 고하문예관 바로 앞, 완산구 교동 244-1(향교길 25)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승목인 이 회화나무 한 그루는 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청렴과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불사조처럼 가지를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그는 심요십조(心要十條)를 실천한 참 선비였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선조들은 공인(公人)이 지켜야할 심요십조(心要十條)라는 윤리강령을 만들었지 않았나.
전주 한옥마을 교동사무소 인근(향교길23)에 ‘하늘 물고기 아트’ 오픈을 앞둔 명경 최영숙 작가는 전국의 화가들을 홍보함은 물론 판매에 주안점을 두고 운영할 계획임을 천명했다.
 '아트' 바로 옆엔 하늘 물고기를 꿈꾸면서 조섬조에 우의정을 지낸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 1614~1690) 선생이 심었다는 회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가리장송(可李場宋)'은 전주 금상동 가소(可所)마을로 숙종때 우의정까지 지낸 만암 이상진과 익산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 출신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1555∼1620년)를 의미, 호남의 명문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전주 금상동의 '금상(今上)'의 의미가 '현재 왕위에 있는 임금'으로 원금상마을의 회안대군묘(조선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름 방간)에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가소(可所)마을은 숙종때 우의정까지 지낸 이상진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원사송찬(院祠頌讚, 지은이 오남 이종관)은 전국 135개의 서원과 사우(祠宇)를 주제로 지은 한시가 소개됐다.
'전주를 찾아가니 때는 마침 첫 겨울인데 한계서원(漢溪書院)에 저녁 종이 울리는구나. 청백리로 녹선되어 가난을 즐기는 것을 기리고 주린 백성을 구제해 사모함이 거듭되도다. 민씨(명성황후)를 내친 것은 천륜에 어긋난다고 상소함으로써 북청으로 유배를 가다가 부인상을 당해 풀려났도다. 주현(州縣)에 책임자로 있으면서 백성의 사모함이 간절하고 청사에 꽃다운 이름을 만세토록 우러루리로다(한계서원 향 만암 이상진)'
본관이 전의(全義)인 이상진은 당시 8학사(八學士)로 이름이 있었으며, 1646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한국전쟁 등 크나 큰 일이  발생하면 나무가 운다고 전한다.

 

△전라감영 회화나무


전라감영 내 연신당 뒤편에 오랜 시간 시간 전라감영터를 지켜온 회화나무가 있다. 그런데 이 회화나무의 아래쪽 잔가지는 일부 푸른 이파리를 피웠지만 주변의 나무와 다르게 상단의 나뭇가지에는 푸른 이파리를 피우지 못하고 있다. 마치 고사되는 듯 보였다.
이 회화나무는 수명 200여 년이 된 나무로, 선화당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전라감영의 유일한 상징물이다. 이 나무는 전주객사에서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회화나무로 환신했다는 정자목으로 선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라감영이 이곳에 들어서게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화당은 1951년 경찰 무기고 폭발 화재로 소실됐지만 이 회화나무는 옛 전북도청사가 있을 때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난 1982년에는 보호수로 지정됐다. 


회화나무


완산골 한복판에
옹골차게 자란 골몯
전라감영 상징물로
오직 하나 남아
호남의 벅찬 문물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풍상을 이겨내고
전란에도 끄떡잖고
널따란 뜰에 서서
창공을 뀌뚫더니
도청서 틈새에 끼어
시름시름 앓고 있네


고 조병희 시인의 ‘회화나무’시처럼 전라감영 옛터였던 구 전북도청 자리에는 건물과 건물사이에 회화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200여 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회화나무는 전라감영의 선화당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감영의 상징물로 전주객사에서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회화나무로 환신했다는 정자목으로, 선비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라감영이 이곳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나무는 1997년 4월 28일 전라감영시절(1867년경) 심어진 이 나무가 햇빛이 차단돼 고사 위기에 처하자 전문가를 초청해 700만원을 들여 외과수술을 하기도 했습다.
 '선비나무', '학자수'라고 불리며 좋은 기운을 불러다 주는 것으로 알려진 회화나무. 전라감영에 가면 긴 세월을 이겨낸 회화나무를 잊지 말고 찾아보면 어떨까.


△경기전의 회화나무


경기전의 옛 지도를 보면, 경기전 안에는 대나무를 비롯, 참느릅나무, 배롱나무, 비자나무, 잣나무, 매화나무, 호랑가시나무, 주엽나무, 측백나무, 상수리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사철나무 등 참으로 많은 나무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스토리를 만들어 이야기로,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이 지도는 전주사고 앞 대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잡목 등이 표시됐다. 특히 외신문 앞에는 나무가 없지만 지금은 느티나무가 있으며, 수복청 북쪽 전사청의 뒤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즐비하게 보인다. 
또 조경묘 주변엔 소나무와 대나무 등이 즐비하지만 예전에는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조경묘의 정전 건물인 정자작 안에는 나무가 없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 이곳의 보호수로는 참죽나무, 은행나무가 9-1-1, 9-1-3-1로 지정됐다. 경기전 관리사무실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250여 년 수령의 회화나무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나무의 밑둥에서 위로 5m 부근에 두 갈레로 나누어지고, 흉고 부분은 외과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10m까지 이끼가 끼어 발육이 좋지 않다. 
경기전에는 누워서 잠을 자는 나무가 있으니 전주사고 방향에 있는 등 굽은 매화나무가 그런 모습이다. 오랜 세월 경기전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는 이 매화나무는 봄에는 매화로, 여름이 오면 매실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태실비 가는 쪽으로 상수리 나무가 있고 동쪽 화장실 옆에는 측백나무와 주엽나무가 있다. 
이제야 세월에 멍든 가슴 한편에 삼켜야 했던 고인 눈물을 흐르는 바람에 띄우련다. 반짝이는 햇살에 내 모습이 초라해 보여도 가슴으로 함께 웃어주는 순수한 사람들과 바람이 참 좋은 오늘, 그 길을 나란히 걷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한옥마을의 나무들과 도란도란 담소나누면서 즐거운 오늘이소서 오늘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