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고창은 성(城)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드센) 아전 자랑’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무장고을(무장현, 茂長縣)은 지방세가 너무나도 강한 까닭에 항상 역량 있는 현감들이 부임해 왔었다. 그러나 사람의 바탕은 좋은데 역량이 부족한 현감이 왔다가는 임기를 모두 채우지 못한 채 쫓겨나곤 했다.
이처럼 풍토가 까다롭고 배타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이 설 수가 없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6Km나 떨어져 있는 ‘안장 머리장(지금의 전북 고창군 해리면 안산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이 장터가 사두봉(蛇頭峯, 무장면 성내리)에서 마주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므로 뱀이 이 곳을 넘보고 공격하는 충동이 생겨나곤 했다. 장날이면 꼭 젊은 청년 한사람씩이 희생되어 갔음은 물론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데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온 중이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 주었다. 사두봉을 모두 깎아 메워 버리면 납작해져 차츰 옛날처럼 번창하는 기운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어떤 현감이 사두봉에서 ‘안장 머리장’이 안보이게 깎아 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됐다.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현감이 드센 고을의 기세를 꺾기 위해 사두봉을 깎아 반사 형국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인물들이 쇠퇴해지고 새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도사 한 사람이 이 얘기를 듣고 하는 말, ‘사두봉을 원상복귀를 하기는 어련지만 고을의 장래를 위해서는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그 높이 만큼 자라게 되면 무장 고을은 다시 크게 되리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을 현감은 깎아 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들이 사는 연못을 만들었다. 그 뒤론, 변괴가 사라진데다가 평온을 되찾게 됐다.
남산 밑에 있는 연못 자리에 시장(무장장)을 세우니 차차 인근 장꾼들이 모여 들게 되어 지금은 장이 꽤나 번창해졌다 한다. 그 당시 심은 느티나무들이 이제 9센티미터만 더 자라면 사두봉 높이를 채우게 된다는 믿음(?)에 굵직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란 희망을 지금도 저버리지 않고 있다.
사두봉은 무장읍성이 자리잡고 있는 북쪽 성벽으로부터 중앙 부위를 향해 남쪽으로 쭉 뻗어오다 우뚝 멈춘 작은 구릉(무장객사가 서 있는 작은 동산을 말함)으로,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두봉 야외독서장과 구 무장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마저 다른 곳으로 옮긴 까닭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을 완연히 꽉찬 가을 느낌뿐.
무장현 관아와 읍성(무장면 성내리, 사적 제346호)은 읍성 입구 성문 위, 진무루의 합각, 무장객사의 합각, 그리고 굴뚝 등 꽃담을 포함, 보기 힘든 철비, 아전의 파워를 나타내는 삐딱한 비석, 그리고 돌계단의 구름 무늬, 마구리 옆에 새겨진 태극 무늬 등은 더 없이 황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무장 동헌인 취백당(翠白堂, 일제 강점기에 학교 교사로 사용),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鎭茂樓), 무장 객사인 송사지관(松沙之館)은 서로 다른 편액을 달고 옛 모습을 간직, 무장읍성의 규모를 가히 짐작케 하는 상징물의 하나다.
진무루에서 구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내륙 방어의 전초 기지였던 무장읍성을 보고 좀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무장객사(전북 유형문화재 제34호, 1581년 건립), 무장 동헌 등 옛 건물을 만날 것이며, 동학농민혁명군들의 되찬 함성을 들으리라.
진무루를 통과하여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객사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의 영빈관과 같은 역할을 한 공간이 나온다. 영빈관이 귀한 손님을 모신 곳이라면 객사는 세 칸으로 구성되어 중앙부는 방이 없는 마루다.
그곳에 왕과 왕비의 궐패를 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왕실을 향해 지방관아의 관헌들이 인사를 드리던 곳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방이 하나씩 있다. 오른쪽은 지방에 출장온 문관이 자는 곳, 왼쪽은 무관이 자는 곳이었다고 한다.
석축을 오르내리는 무장객사 계단 마구리 옆에 새겨진 태극 무늬와 꽃을 담은 화병을 소담하게 돋을새김으로 장식한 계단 양옆의 축대 돌은 더 없이 황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객사가 지어진 것은 1581년(선조 14년)이니 수백년 세월을 견뎌온 꽃이다. 약간의 위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높인 축대 계단에는 이곳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모습의 꽃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세상의 꽃들은 속절없이 피고 지지만 이곳의 꽃은 시들지 않는, ‘시간이 멈춘 꽃’이다. 돌계단에서 구름 무늬 등 길상 문양을 양각해 놓아 운치를 더해 주고 있어 답사의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이 꽃이 돌연하게 여기에 끼어든 데는 사연이 있다. 조선조 억불숭유정책으로 절들이 폐찰되면서 수 많은 석물들이 밖으로 내돌려지고 사람들의 손을 탔듯 연화문의 이 기단석 역시 객사 건축 당시 절에서 옮겨져 온 것으로 축대를 쌓았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객사에 오르기 위해서는 낮은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바로 그 계단의 난간석에는 태극무늬는 물론 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구요. 동물 모양은 사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송사지관’ 앞 계단은 ‘건곤감리’를 나타내며, 음양오행에 따라 새겨 넣은 문양 같습니다.(김승규 문화유산해설사, 시인)”
무장읍성 안, 객사 왼편 나무숲에는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 아래로 이곳을 줄곧 다스려온 수령이나 군수들의 공덕비와 영세불망비 등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마당 한켠의 즐비한 선정비와 공덕비, 원님들의 전시행정의 표본인가, 아전들의 위로비인가.
유독 눈에 띄는 비석은 바로 돌이 아닌, 철로 만든 비석이다. ‘김영곤(金永坤) 선정 불망비(1852년 건립)’가 바로 그것이다. 참판을 지낸 김영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무장출신의 관리로 갑신정변 전후로 선덕비가 이곳에 세워졌다.
삐딱하게 서있는 선정비(현감정권영세불망비)가 특히 눈길을 끈다. 아전의 텃새가 얼마나 드셌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여느 비석처럼 평범한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의 모습이 매우 다채롭게 되어 있다.
언젠가 공덕비를 세우라고 재촉했을 원님에게 ‘아나 공덕’하고 비웃는 모습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마음에 안들면 이곳의 원님은 왕따였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전 고창문화원 이기화원장은 “무장에 발령받은 현감들은 ‘아이구, 나 죽었다’고 걱정을 할 정도 기가 세기로 유명했습니다. 바로 이같은 환경이다 보니 마음에 안드는 원님들을 왕따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당연히 원님들이 매사에 무난하게 임기를 마치기 위해서는 조심조심 지낼 수밖에 없질 않습니까.
이곳의 아전들은 출신성분이 고려시대 화려했던 토호들과 출세한 가문의 후예들인지라 자긍심과 기개가 대단했습니다. 제 아무리 현감이 부정축재하고 본전 치기를 하려고 해도 아전들이 짜고 현감을 왕따시켜 헛물켜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같은 기질이 있었으니 현감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울 때도 아전들이 감히 ‘야, 틀어버려라’ 할 수 있었다는 것.
그 당시엔 현감들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 후에는 공적비를 세워 주는 것은 관례였다. 아전들의 구미에 맞은 현감들은 공적비를 똑바로 웃는 얼굴 모양으로 세워주었고, 맘에 들지 않는 현감들의 공적비에는 아래 기단 부분의 거북이 받침돌의 머리를 획 돌려 놓는다든지, 땅을 향해 처박아둔다든지, 아예 얼굴을 뭉게서 제작하라고 석공들에게 시켰다는 증언이다.
고개를 틀어 올린 그 ‘비웃음’에 당대의 상황이 고스란히 집약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님들을 골탕 먹인 아전들 때문에 무장면의 발전이 이처럼 더딘 것인가.
주춧돌과 축대의 돌들이 나뒹구는 모습을 통해 옛 번영이 무너지고 난 후 일그러진 모습이 그려지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역사의 노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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