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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4> 죽사 이응노, 전주 인연으로 효산 이광열과 합작도를 그리다

<이종

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4> 죽사 이응노, 전주 인연으로 효산 이광열과 합작도를 남기다

근대 시기 전주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서화가들과 중앙 화가들의 교류를 알아보고, 더 나아가 미술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연구해볼 수 있는 뜻 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관광거점도시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전주시가 주최하고 전주문화재단과 미술관 솔이 주관한 특별전 ‘근대서화가 합작전-화중동유(畵中同遊)14일까지 전주 미술관 솔에서 열린다.

 '화중동유(畵中同遊)’ 란 ‘그림 안에서 같이 놀다’ 라는 뜻으로 한 화폭에 여러 화가들이 각각 한가지 소재를 그려 넣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이러한 작품들을 '합작도(合作圖)'로 부른다.

죽사 이응노(1904 - 1989)와 효산 이광열(1885 - 1966)의 '합작도'가 눈길을 끌고 있다. 죽사는 대나무를 그렸으며, 이광열은 붓글씨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했다.

죽사 이응노(1904 - 1989) 畵
효산 이광열(1885 - 1966) 題​

숲 사이에 술 마시고 취하니, 술잔엔 일렁이는 그림자요.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나니, 판을 뒤덮는 옅은 구름이네.

林間飮醉 飛影搖尊 
石上圍碁 輕陰覆局

'효산 진갑 기념 묵죽'으로 일본생활을 마치고 1945년 고국으로 돌아온 고암 이응노(李應魯, 1904년~1989년,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호는 고암(顧庵, 顧菴)·죽사(竹士, 竹史))가 이때 그린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가 1924년부터 1935년까지 효산에게서 배운 가르침에 대한 답례로, 효산(曉山) 이광열(1885∼1966)에게 진갑기념 묵죽 작품을 바쳤다고 전한다.

효산은 서구 열강이 각축전을 벌이던 고종 22년(1885) 음력 7월 26일에, 전주부 향청동(鄕廳洞, 교동)에서 전주이씨 양도공(태조 이성계의 형 원계의 손자)의 14대손인 좌승지 우송(友松) 동식(東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증가선대부호조참판을 했던 조부 인흡(仁洽)의 뛰어난 서화와 학문을 본받고 자란 효산은 전주 토박이로 완산초교 교사, 전주향교 전교, 완산동 기령당 당장, 다가산 천양정 사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1935년 호남지역 최초의 서예학원인 한묵회(翰墨會)를 결성 서화발전에 힘쓰기도 했다. 

그는 ‘전주부사(州府史)’를 편찬, 지역의 숨은 역사를 찾아 기록하고 많은 작품도 남기는 등 전북의 위상을 한층 드높인 교육자 겸 향토사학자다. 일제시대를 살아가면서 항일정신을 불태우기도 한 그는 글씨와 그림(사군자)분야에 뛰어나 기량을 발휘했다.

그는 벽하 조주승(1854~1903)에게 그림과 글씨를 배웠으며, 1927년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매로 입선하였고, 1928년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입상한 바 있다. 또 지역 최초의 공연장이기도 했던 학인당(전라북도 민속자료 제8호) 편액의 원본글씨를 비롯, 효산이 직접 사장을 지냈던 천양정 현판과 주련, 지역 원로들이 자주 모임을 했던 기령당의 송석정 현판 등 지역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효산의 필묵의 흐름을 살필 수 있다.

세계적인 작가 고암 이응노는 효산과의 인연이 크다. 그가 1928년부터 1935년까지 11년 여 동안 전주에서 ‘개척사’ 간판점을 운영할 때 효산에게 그림을 배운 고암, 즉 죽사(竹史) 이응노의 ‘효산 진갑 기념 묵죽’은 둘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

이응노는 해강 김규진에게 사사, 홍성, 예산, 전주를 거쳐 일본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홍익대학, 서라벌예술 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가 전주에 정착한 때는 1924년 무렵이라고 조병희선생의 '완산고을의 맥박(292쪽)'에 기록됐다.

그는 전주시 중앙동 4가 25번지에서 ‘개척사(開拓社)’란 점방을 열고 간판을 그리는 한편 건물을 도장(塗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신사구락부’란 모임도 조직했었다고 전한다.

'개척사'는 지금의 신흥교회 옆 가게 부근, 백반집이다. 당시 그는 틈만 생기면 효산(曉山) 이광렬댁에 드나들었다.

고암은 효산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조예를 쌓는 한편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도 친숙한 사이로 지내왔다. 제3회 선전 사군자부 입선에 이어, 전주에서 출품한 작품으로, 1930년 제9회 선전 사군자부에서 ‘풍죽(風竹)’과 ‘청죽(晴竹)’이 입선됐다. 1931년 제10회 선전에는 ‘대죽(大竹)’과 ‘풍죽(風竹)’, ‘청죽(晴竹)’, ‘분죽(盆竹)’, ‘매(梅)’ 등 네 폭의 작품이 한꺼번에 입선되고, 특선으로 이왕직(李王職)의 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고암은 ‘죽사(竹史)’란 호를 가지고 출품했는데, 효산이 지어준 호로 알려져 있다. ‘죽사(竹史)’라는 호가 해강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전주 지역에서는 효산에게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향 홍성을 떠나 서울에서 당시 사설서화학원을 운영중이었던 해강 김규진 밑에서 사군자를 배우다가 스무살 중반 무렵에 홀연히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라는 이름의 간판점의 문을 열었다.

고암은 '개척사'에서 상업 간판의 글씨를 쓰는 일과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했다.

 간판업을 습득한 고암은 독립해 사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둬 규모가 클 때는 페인트 장인 30~40명을 거느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모은 돈은 고향에 보내졌다. 생업 이외에도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고암은 전주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1933년 10월 11일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엔 “본적을 충남 홍성에 두고 방금 전주 팔달정에서 개척사라는 미술 간판업을 경영하는 청년화가 이응노(30) 군의 개인전람회를 오는 11월 12일 전주공회당에서 개최하리라는데 동 군은 일찍이 17세부터 해강 김규진 씨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동양화를 연구하야 수차 선전에 특선까지 된 청년화가라 한다. 그래 군의 예술을 아끼는 전주 유지 제씨의 발기로 전기와 같이 개최한다는데 일반은 다수히 관람하기 바란다고 한다”고 게재된 바 있다.

고암이 왜 전주로 향했는가에 대한 이유는 아직까지 모호하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을 전주에 머물면서 생업과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그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 실마리가 다소 풀린다.

이응노는 개척사 내에 ‘심향선생화회 사무소’를 두고 1934년 7월 전주에서 심향 박승무(深香 朴勝武, 1893~1980)의 ‘심향화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박승무는 이응노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수묵산수 작품인 ‘천첩운산’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엽 전주문화원 동국진체연구소장은 “고암의 전주 시절에 만약 효산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이응노가 있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지역 어른들이 많았다”고 했다. 20대 중후반 무렵 전주에 정착한 고암이 결국 개척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개인전까지 개최한 데는 효산을 중심으로 학인당을 찾던 여타 지역 유지들,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고암은 전주생활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에 매진, 1931년에는 ‘청죽’으로 특선을 수상하고 이후에도 계속 입선했다. 이후 고암은 1935년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전주 개척사를 정리하고 일본으로 떠났으나 전주에서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효산과의 관계는 일본에서도 이어졌다. 효산의 61세(회갑)을 기념해 고암이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 ‘묵죽(墨竹)’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증거이다.

전주에서 11년 여를 보낸 고암은 1935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본향회연구소 서양학과에 들어갔다.1958년 파리로 건너가 정착한 후 ‘문자추상’과 ‘춤추는 인간 군상’ 연작을 발표했다.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64년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서예와 문인화 등을 가르쳤다. 폴 화게티 갤러리(Galley Paul Facchetti) 등 프랑스의 저명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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