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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5> 정읍 풍류방 진산동 영모재 토끼와 꽃담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4> 정읍 풍류방 진산동 영모재 토끼와 꽃담

정읍 진산동 영모재(永慕齋)는 구한말 강원도 평창군수를 지냈던 정읍의 부호 김평창(본명 김상태)이 1885년 죽산 안씨의 사당을 사들여 1915년 솟을 대문과 다채로운 민화 벽화들을 그려넣는 등 현재의 풍류방 형태로 개축했다. 

재실인 '영모재'로 등록은 되어 있지만  매입후 재실의 기능은 하지 않고 김평창에 의해 풍류방의 기능으로 사용됐다. 

이곳에 그려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행하던  민화벽화들은 당시 풍류방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하다.

정읍 진산동 영모재에 가거들랑 요즘은 아주 보기 힘든 솟을대문, 국내 유일의 재각 대문간채 벽화, 그리고 ‘쌍희’(囍)’자 등이 들어간 (전통)꽃담에 눈길을 한 번 주시기를.

20 여 년 동안 정읍 지역을 헤매다가 만난 꽃담이기 때문이다.

솟을대문 안쪽 중앙의 보에 그려진 두 마리의 학 위에 올라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두 신선과 이 문의 중앙의 넓은 벽면에 그려진 봉황, 호랑이, 현무, 해태도 등과 이 문의 바깥쪽 두 기둥 위의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 등 모두 쌍으로 그려진 가운데 다양한 희노애락과 기복을 기원했던 민중들의 소박한 소망들이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솟을대문 좌우 벽면과 홍살문 목조 기둥에 그려진 그림들은 학과 봉황, 백로, 기러기, 원앙, 참새, 현무, 잉어, 오리 등을 소재로 풍속화, 신선도, 문자도(文字圖), 민화 산수화,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어해도(魚蟹圖) 등 다양한 민화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영모재(永慕齋)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청양 영모재(충남 청양군 청양면 장승리, 충남 유형문화재 제154호), 영모재(충북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충북 유형문화재 제176호), 봉두리 영모재(경북 성주군 금수면 봉두리, 경북 문화재자료 제281호), 논산 영모재(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충남 문화재자료 제367호), 진주 원계리 영모재(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경남 문화재자료 제400호), 옥천 도농리 영모재(충북 문화재자료 제75호), 보은 불목리 영모재(충북 문화재자료 제85호), 그리고 정읍 진산동 영모재(등록문화재 제213호) 등을 꼽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백 여년 전 풍류와 주거가 동시에 이루어졌던 전형적인 누각 형태의 풍류방으로, 이곳의 주인이던 김평창(본명 김상태)이 구한말 평양과 정읍에 있던 기생학교(권번)의 이사장격인 예기조합장으로 명인,명기로 등급을 가리는 심사 장소로 농산재를 이용했다는 거주자 이희찬씨의 설명이다.

 농산재는 지난 2005년 11월 1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13호로 거듭 태어나며 라진 것이 있다면 본래의 이름 ‘농산재’ 대신, 기존의 앞마당을 관통했던 차도 때문에 솟을대문을 현재의 도로 안쪽으로 옮겨지으며, 1915년 4월 22일 붙여진 상량문에 표기된 ‘영모재’ 이름 그대로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하루는 증산께서 정읍 김평창의 집에 가시니 평창은 한평생 거문고 소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살려면 김평창 같이 살아야 하리라” 하더라’

영모재에 대한 기록은 증산도 도전에도 소개되어 있다. 

순수회화와 실용회화 모두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정읍 영모재가 유일한 것으로 보고됐다. 

자칫 원형의 모습이 사라질 위기지도 모르는 영모재 솟을대문 좌우 벽면과 홍살문으로 만들어진 목재 건축물에는 지금은 흔하게 접할 수 없는 진귀한 민화들이 벽화(壁畵)로 장식돼 있다.

솟을대문의 민화들은 본을 떠 그려져 붙여졌던 흔하고 본을 뜬 그림이 아닌, 모두가 섬섬옥수 수작업을 통해 하나씩 그려져 채워진 작품들이이어 사료적 가치 또한 매우 크다는 평가다.

이용찬씨는 본채에 그려진 벽화와 솟을대문의 벽화 또한 을묘년(乙卯, 1915년)에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솟을대문 안쪽 중앙의 보에 그려진 두 마리의 학 위에 올라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두 신선과 중앙의 벽면에 그려진 봉황, 호랑이, 현무, 해태도 등과 바깥쪽 두 기둥 위의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 등 모두 쌍으로 그려져 있어 원형 보존이 더욱 절실해 보인다.

솟을대문에 그려져 있는 민화 벽화들은 다양한 희노애락과 기복을 기원했던 민중들의 소박한 소망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을 터이다. 

영모재의 꽃담을 통해 ‘관념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재발견’을 한다. 각양각색으로 피어나고 있는 꽃들과 산들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나무들, 그리고 창가로 들려 오는 참새들의 재잘거림이 어쩜 이렇게 다정스럽고 사랑스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문밖 좌우 꽃담은 무너져 새롭게
공사를 했다.

솟을대문 좌우로 ‘쌍희(囍)’자가 자리한 가운데 꽃담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행랑채가 좌우로 달려 있어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머리를 살짝 들어 날아오를 듯한 솟을대문, 그리고 대문을 들어서기 전 화방벽마다 반듯하게 써놓은 글자로 인해 부자라도 된듯 마음이 봄날의 햇살처럼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