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93> 금강산 출토 이성계 사리장엄구
1391년 이성계가 개국 당시 금강산에 발원한 백자 사리구에 새긴 '방산 사기장 심룡(方山 沙器匠 沈龍)'이라는 명문은 양구의 도자기 장인 심룡이 양구의 가마에서 양구 백토를 이용해 백자를 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32년 12월13일 중앙일보 기사. 금강산 월출봉에서 500년전의 납골기가 발견되어 조선총독부가 관리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조선백자의 시원이 강원도 양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 유물이다.
1391년 4월,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방산사기장 심룡(沈龍)은 극비리에 백자 네 점을 빚었다.
방산에서 나는 백토로 만든 사발 모양의 백자들이었다. 심룡은 백자에 특별한 염원을 담은 발원문을 새겼다.
‘대명 홍무 24년 신미 4월 일에 소원을 빕니다’로 시작하는 발원문이었다. 만일 그 내용이 알려지는 날에는 삼족을 멸할 일이었다.
'대명 홍무 24년 신미 4월 일에 소원을 빕니다.…석가여래께서 입멸하시고 이천 여년이 지난 명 홍무 연간에 은월암(隱月菴)은 송헌 시중과 만여 명이 함께 서원을 일으켜 금강산에 보관하고….이 소원 견고함은 불조께서 증명할 것입니다'
월암스님이 송헌 시중(이성계)과 지지자 만여 명의 뜻을 모아 부처님께 빈다는 내용이다.
무엇을 빈다는 것인가? 발원문의 내용을 액면그대로 해석하면 단순한 미륵하생이지만,속뜻은 쿠데타의 성공이었다. 그 시점이 1391년. 그러니까 조선 건국 한해 전에 이런 비상한 발원문을 금강산에 묻은 것 이었다.
고려조 400년의 사직을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는 역성혁명에 무려 일만의 무리가 뜻을 모았고,거기에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사람의 도공이 이름을 걸은 것.잘못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집안 전체가 도륙을 당하고 역적의 집안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 부담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결단이다.
이는 아마도 심룡이란 인물의 남다른 인품과 지조,재능을 이성계가 눈여겨보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심룡! 심지 굳은 행동가들이 그러하듯,심룡은 단순히 옹기나 굽는 평범한 도공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심룡은 그런 변화와 혁명의 시대에 자신의 존재이유와 사명을 정확히 깨달은 숨은 지사의 한 인물이었다고 본다.
사발 두 개에 173자와, 83자로 음각한 발원문은 이성계와 그의 추종자 1만명이 ‘새로운 미륵세상’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심룡은 한 개의 그릇 바닥굽에 ‘신미년4월일 방산사기장심룡동발원비구신관(辛未年四月日方山砂器匠沈龍同發願比丘信寬)’이라고 새겨 제작시기와 자신의 실명을 밝혔다.
새로운 미륵세상은 곧 새로운 나라였다. 쿠데타를 예고하는 이 백자는 금강산 월출봉에 묻혔다.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500년이 훌쩍 넘어서였다.
이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2년 6월의 일이다. 당시 강원도청 직원들이 산불 저지선 작업을 위해 땅을 파다 석함(돌로 만든 함)을 발견한다. 석함에는 금은 도금 사리기와 사리외함으로 사용된 백자 4점 등 7점이 들어있었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로 불리는 유물 세트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 유물 세트는 2017년 1월 보물 1925호로 지정됐다.
이 사리장엄구는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인 많은 신하들과 함께 발원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로 1932년 금강산(金剛山) 월출봉(月出峰) 석함(石函)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석함 안에서 사리의 외기(外器)인 백자대발(白磁大鉢) 4개와 은제도금라마탑형사리기(銀製鍍金喇嘛塔形舍利器), 이 사리기를 안치한 은제도금팔각당형사리기(銀製鍍金八角堂形舍利器), 그리고 청동발(靑銅鉢)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 중 백자외합 내면과 백자발 외면, 유기완 구연부, 은제도금팔각당형사리기 내 은제팔각통형, 은제도금라마탑형사리기 내 은제원통형에 발원자와 발원 목적과 내용, 제작 장인 등 조성 경위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발원자는 이성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 월암 등으로 조선 개국을 앞둔 1390년과 1391년에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건국의 염원을 담아 영산(靈山) 금강산에 매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토 유물 곳곳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원통형 은반에 새겨진 글자는 놀라웠다.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물기씨(勿其氏)’.
사리를 봉안한 이가 다름 아닌 ‘이성계’와 부인 ‘강씨’라는 이야기이다. 이성계 앞에 붙은 25자의 기나긴 수식어는 무엇인가. 이성계는 1389년(창왕 2년·공양왕 원년) 당시 왕위에 있던 창왕이 우왕(1374~1388)과 함께 왕씨가 아니라 신씨(신돈·?~1371)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위시키고 공양왕(1389~1392)을 세웠다. 공양왕은 그런 이성계에게 붙일 수 있는 온갖 수식어를 다 붙여 예우한 것이다.
팔각당형 사리기와 2개의 백자사발에서도 명문이 보였는데, ‘경오년(1390년) 3월’(팔각당형 사리기)와 ‘신미년(1391년) 4월’(백자사발) 등의 연대가 주목거리였다.
또 하나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安遊記)’로 시작하는 다른 하나의 명문도 의미심장했다.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
명문을 종합하면 몇가지 키워드가 눈에 띈다. ‘부인 강씨’, ‘금강산’, ‘미륵하생’, ‘1391년 5월’, ‘1만명’ 등이다.
첫 키워드는 ‘부인 강(康)씨’이다. 아니 이성계가 부인과 함께 사리장엄구 봉안의 불사를 주도한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있다. 왜냐면 ‘부인 강씨’는 바로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를 가리킨다.
사리를 봉안한 시점이 1391년 5월이라면 이성계의 본부인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년 9월23일)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성계는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명문에 새겼다. 대대적으로 펼친 봉안의식에도 강씨만 참석했다. 병중이던 첫번째 부인인 한씨는 4개월 후(9월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명문이 갖는 사료적 가치 외에도 출토 장소가 분명하다는 점, 제작 시기가 분명하다는 점(1390년~1391년), 이 시기에 사용된 ‘방짜유기 기법’과 ‘부분 도금기법’, 그리고 ‘타출기법’ 등 공예기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크며, 백자사리기는 기년명 고려백자라는 점과 ‘방산 사기장 심룡(方山砂器匠沈竜)’이라는 도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도자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도자 장인 심룡은 조선 개국공신 이름이 기록된 ‘이원길개국원종공신록권’(국보 제 250호)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심룡이 목숨 걸고 만든 이 백자는 도자기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백자의 기원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었다.
‘고려백자를 계승했다’와 ‘세종 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다. 고려백자 계승설을 입증해준 것이 바로 ‘이성계 발원 사리함’이다.
보존처리에서 유리제 사리병의 파손된 부분을 접합하고, 결손된 부분을 복원해 원형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사리병을 분석해보니 사리병의 주성분은 이산화규소(SiO2)가 98% 이상, 비중은 2.57로 나타났다. 석영유리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일반적인 유리는 규소를 주로 사용해 1000도 미만에서 제작된다. 녹는 온도를 낮추기 위하여 용융제로는 나트륨·칼륨·납을, 안정제로는 산화칼슘 등이 사용된다. 반면 순수한 석영유리는 열에 아주 강하여 1500도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다.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정도이기 때문에 일반 유리 제작과정에 비해 많은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에서 발견된 유리제 사리병은 석영유리로 제작된 완형의 사리병으로 14세기 한반도의 유리 제작기술을 보여주는 국내 첫 사례이다.
12세기 고려시대 유리구슬 중에도 석영유리가 있었으나, 이러한 병 형태로는 처음 확인된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리제 사리병을 순도가 높은 석영유리로 제작하고 내부에는 은제금도금 사리받침대를 세웠으며, 이것을 다시 은제도금라마형사리기와 은제도금팔각당형사리기에 이중으로 봉안하였다”면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당시 최고급 재료와 기술로 제작됐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도자 장인 심룡은 조선 개국공신 이름이 기록된 ‘이원길개국원종공신록권’(국보 제 250호)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심룡이 목숨 걸고 만든 이 백자는 도자기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백자의 기원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었다.
‘고려백자를 계승했다’와 ‘세종 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다. 고려백자 계승설을 입증해준 것이 바로 ‘이성계 발원 사리함’이다. 양구는 조선백자 생산의 요지인 동시에 백자의 주원료인 백토의 주 공급처였다. 2006년 그런 배경에서 양구백자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양구는 조선 초기부터 자기를 제작해 중앙에 공납했다. 15세기 경기도 광주에 분원이 생긴 이후 가장 많은 양의 백토를 가장 오랫동안 공급한 곳이 양구다.
양구가 조선백자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는 많다고 했다. 조선시대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예빈실, 순승부(세자부), 궁궐 물품을 관리하는 장흥고에서도 양구 그릇을 사용했고 세종대왕 태를 담아두는 그릇(장태)도 양구산이라고 했다.
방산면을 중심으로 양구 일대에 분포돼 있는 양구 백토는 화강편마암이 그 자리에서 풍화되면서 만들어진 흙이다. 그만큼 불순물이 적다. 철분 함량이 0.5~1%로 백색 순도가 높고 점성이 강해 성형력이 좋다. 양구에서 분원에 공납했던 백토의 양은 매년 500~550석(石) 규모였다. 정 관장은 ‘1석=16㎏’이라는 것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동안 백토를 세는 단위인 ‘석(石)’에 대해 정립된 내용이 없었다.
양구군 해안면이 시래기 주요 산지로 꼽히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보기 드문 고산 분지이기 때문이다. 해발 1,100m 높이의 산으로 둘려 쌓여 있고, 분지의 바닥도 해발 400~500m에 위치해 있다.
큰 일교차와 한랭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명품 시래기를 길러내는 천혜의 환경을 갖췄다.
움푹 파인 지형 때문에 펀치볼이라고 불리는 이곳이 무공해 양구 시래기의 산지이다.
양구는 토질이 좋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있다.
'한국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과서 저작권 보상금 개선 시급합니다 (5) | 2024.10.19 |
---|---|
교과서 저작권 보상금 개선 시급합니다 (0) | 2024.10.19 |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7> 다리군수 유범수 (0) | 2024.08.07 |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5> 정읍 풍류방 진산동 영모재 토끼와 꽃담 (0) | 2024.08.06 |
승려 의겸과 제자들이 그린 전북의 문화유산 (1) | 2024.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