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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1> 전북예술회관 '예(藝)다방'과 성악가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1> 전북예술회관 '예(藝)다방'과 성악가 천길량

전북예술회관의 예(藝)다방, 33년 만에 사라져

1982년 전북예술회관 당시부터 문을 열었던 1층의 '예(藝)다방'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만 33년만의 리모델링공사가 머지 않아 시작될 예정으로, 공식적으론 '예다방'이 없어진 셈이다.

2015년 12월 30일자로 중앙다방('예다방'의 전신)이 전북예술회관 바료 옆 30미터 지점 우리은행 후문 옆 백년옥 2층으로 이전했다. 

필자는 바로 이곳에서 조병희,  송성용, 권갑석, 권영도, 탁광, 하반영, 진학종, 이기반, 최명희씨 등 작고한 문화예술인들과 김남곤, 송영상, 서재균, 김득남, 안도씨 등 문화예술인들을 만난 기억이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다방이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전주의 미원탑처럼 '예다방'하면 많은 사람들의 약속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전라예술제를 앞두고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전북미술대전의 출품을 앞둔 예비 작가들이 쌍화차 한 잔을 마시면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 곳이기도 했다.
 이성재화백은 "전북미술대전 등 각종 행사를 앞두고 반드시 거쳐가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 사라지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전북도는 이곳에 휴게실 또는 커피숍 등 편의 시설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다.  최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분관으로 돼 있다가, 최근 들어 전북도로 운영 주최가 바뀌었다.

천길량, 제8대 한국예총 전북지부장에 선출

성악가 천길량(千吉良, 1923~1988)은 한국예술총연합회 전북지부 제8대 지부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회원간 인화 도모'를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예술인만의 단체가 아닌 도민 전체의 예총으로 만들어 지역사회문화 기반을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전북예총회관 건립'을 재임기간의 목표로 삼았고 이를 통하여 큰 지지를 이끌어 냈다. 또한 그는 지금의 전북예술회관을 건립하는 주춧돌을 놓은 주인곡이다.

예술인의 숙원인 전북예술회관 건립 앞장 서

1974년 천길량은 '전북예술회관 건립운동'에 본격 나섰다. 

예술회관 건립문제는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동호인들의 숙원이었으나 그 뜻이 이뤄지지 못했었다. 

이 같은 문제해결을 위해 그는 전북예총의 최대과제로 채택하고 전북도지사에게 전북예술회관 건립을 강력 건의했다. 도지사 역시 동의했고, 100만원을 건립기금으로 쾌척했다. 

또한 해당 단체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건립기금 마련에 착수했다. 그의 이 같은 열정적인 활동에 전북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은 기꺼이 동참했다. 전북예술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음악회 등 공연과 전시회가 열렸다.

'전북예총은 기금모금을 위해 1차 사업으로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전북실내체육관에서 신결동(申抉童)씨 등 12명의 국악인간문화재가 총출연하는 '추석국악대공연'을 갖는다.

그동안 전북예술회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인 황인성 지사가 100만원의 기금을 쾌척했으며 예술인들이 열심을 보여 130여만원의 기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가난한 예술인들만으로 5,000만원을 모금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전북신문 일부)

'천길량은 '전북예술회관 건립"에 대한 당위성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전북문화예술인들은 물론 전라북도, 도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했다.

그의 열정적인 전북예술회관 건립 운동에 많은 문화예술인이 참여했다. 또한 국악협회와 미술협회 회원 등 예술인들이 총궐기하였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우선 이사회를 3월4일에 갖고 사업계획을 논의한 끝에 '전북예술회관 건립 발기인회'를 발족시키기로 했다.

전북예술회관 건립 추진을 위한 '전북작가 초대미술전'이 1974년 11월 예총전북화랑에서 개막됐다.

 전북예술회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천길량은 초대미술전의 성공 개최를 위해 작가들의 참여를 독려한 결과 5개 부문에 걸쳐 65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기꺼이 내놓았다. 

두 번째 사업으로 전개한 이 미술전 역시 기금조성에 큰 비중을 두었다. 

초대미술전에 참여한 작가는 동양화 14명, 서양화 28명, 조각 5명, 공예 5명, 서예 13명 등 모두 65명이며 이 가운데 중앙에 있는 전북작가들도 출품했으며, 서예에 있어 장동순(張垌淳) 국회의원과 윤제술(尹濟述)씨가 작품을 내놓았다.(전주문화재단 참조)

 전북예술회관·도립미술관 건립 뒷이야기

전북도립미술관은 2004년 10월 개관과 동시에 굵직한 기획전을 선보이며 대중성과 전문성을 갖춘 공공미술관으로서 지역에 뿌리내렸다.

도립미술관 개관 전까지만 해도 전북을 대표하는 미술공간은 1982년 2월 문을 연 전북예술회관이었다. 전주시 경원동에 위치한 예술회관은 현재도 미술가들이 개인전을 위해 가장 선호하는 전시공간으로 그 역할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전북 미술을 상징하는 두 공간의 건립 배경은 조금 다르다. 

최근들어 '전북미술약사'를 통해 '전북예술회관 건립 비화'와 '전북도립미술관 건립 비화'를 발표한 향토사학자이자 서예가인 이용엽씨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단위 회관을 예술인들 힘으로 마련한 긍지와 자부심이 예술회관이라면, 도립미술관은 중앙에서 정치인의 노력으로 예산부터 먼저 확보한 뒤 계획을 세우는 기현상으로 건립됐다"고 밝혔다.

예술회관 건립에 대한 요구는 전북미술대전이 바탕이 됐다. 

미술대전 횟수가 거듭될수록 출품작은 늘어났지만 전시 장소가 협소해 입상작을 여기저기 나눠 전시하는 처지였다. 

이에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 전 전북도지사에게 '장소의 협소함'을 호소, 1975년 6월 '예술회관 건립추진회의'를 발족하게 된다.

예술회관 건립 추진위원들과 황 전 지사는 전국의 원로·중진작가들의 작품을 기증받아 서울 국립공보관 전시실에서 '예술회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한국 원로·중진작가 미술전'(1975년 12월 13일∼12월 18일)을 개최했다.

 "좀처럼 단합이 안되는 것으로 인식돼온 예술인들이 일치단결해 자신의 숙원사업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룩하려 한 것은 새마을 정신의 산 표본이며 예술계 전체의 경사"라는 당시 문공부(현재 문광부) 장관의 축사가 말해주듯, 예술회관 건립은 지역 예술인들의 숙원이었다. 이 전시를 비롯해 '도내 작가 미술전'을 열고 도민들에게서 성금을 모으는 등 전북 예술인들은 스스로 2,000만원의 기금을 모았다.

반면, 도립미술관 건립에 얽힌 이야기는 김태식 전 국회의원의 회고록 '정치아리랑'에 잘 나와있다.

따지고 보면 2000년 9월 전북일보와 우석대학교가 공동주최한 한 전시에서 원로화가 박남재씨가 한 축사가 도립미술관 건립의 주춧돌이 됐다.

"우리 전북은 말끝마다 예향의 도라고 자랑하지만 무슨 우리 전북이 예향의 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 공립미술관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도가 우리 전라북도다."

이날 전시에서 "박남재 화백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돌아가겠다"며 축사를 간단히 끝낸 김 전 의원은 "회화나 서도예술을 우리 도의 특화상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문광부에 바로 연락을 취해 박남재 화백이 던진 숙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도립미술관이 완주에 들어서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에 부지를 요청했지만 시가 방도를 내놓지 못하면서 전주 권역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공원 내 부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도립미술관 건립과 관련, 예술회관에 비하면 전북의 미술인들이 얼마나 무관심했고 소극적이었는지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