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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0> 전주 한벽당 3개의 편액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140> 전주 한벽당 3개의 편액

‘전주와 완주의 32가지 ‘완산승경(完山勝景)을 알고 있는가.

예로부터 전주와 완주

 일대에는 ‘완산승경(完山勝景)’, ‘전주팔경(全州八景)’, ‘전주십경(全州十景)’ 등이 전해 내려왔다. 

‘전주팔경’은 ‘완산팔경(完山八景)’, ‘전주십경(全州十景)’은 ‘완산십경(完山十景)’이라고도 한다. 전주의 옛 이름이 완산이기 때문이다.

‘승경(勝景)’은 ‘뛰어나게 좋은 경치’를 말한다. ‘완산승경’ 가운데는 좋은 경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전주팔경(全州八景)’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완산승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다.

‘완산승경’은 모두 32곳에 이른다. ‘완산승경’ 가운데는 ‘전주팔경’ 5곳이 포함됐다. 

하지만 ‘완산승경’은 옛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없는 곳이 여러 곳이다. 구진융마, 만마도관, 사대병암, 운제백련, 은석동학, 죽림천엽 등은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예로부터 전주와 완주는 원래 같은 고장이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으며 완산으로 불렀다. 

전주와 완주가 완산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래 1,380년 동안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신라시대에도 완산주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행정 구역상 나눠져 있을 뿐이다.

이철수의 ‘완산승경(完山勝景)을 보면 ‘완산승경’은 모두 32곳에 이른다.

 ‘완산승경’ 가운데는 ‘전주팔경’ 5곳이 포함됐다.

‘완산승경’은 △기린토월(麒麟吐月, 전주시내 기린봉), △유연낙조(油然落照, 전주시 중화산동 유연대), △완산칠봉(完山七峰, 전주시내 완산칠봉), △한벽사경(寒碧四景, 전주시 교동 한벽당), △동성수납(東城睡衲, 전주시 교동 승암산 동고사), △남고모종(南固暮鐘, 전주시 동서학동의 남고사), △사대병암(四大屛岩,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의 사대원), △은석동학(隱石洞壑, 전주시 색장동의 은석골), △다가비설(多佳飛雪, 전주시 다가공원), △오목요대(梧木瑤臺, 전주시 교동 오목대), △간납자규(諫納子規, 전주시 남노송동 간납대), △진북쇄월(鎭北灑月, 전주시 진북동 진북사), △가련청람(可連晴嵐, 전주시 덕진동 가련산), △덕진채련(德津採蓮, 전주시 덕진공원 연꽃), △건지송뢰(乾止松籟, 전주시 덕진동과 송천동의 건지산), △삼천세우(三川細雨, 전주시 삼천동의 가랑비), △단암공영(丹岩空影,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의 단암사), △모악요하(母岳繞霞, 완주군 구이면의 모악산), △죽림천엽(竹林千葉,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마을) , △만마도관(萬馬道關,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의 만마관), △법사장한(法史長恨, 전주시 금상동의 회안대군 묘소), △구진융마(九進戎馬,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구진벌 전쟁터), △동포귀범(東浦歸帆,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의 동포), △대아수간(大雅垂竿, 완주군 동상면 대아저수지), △고달귀운(高達歸雲, 완주군 구이면과 상관면의 고달산), △보광유경(普光幽徑, 전주시 동서학동의 보광사), △경각심홍(鯨角深紅,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의 경각산), △대천파설(大川波雪, 완주군 삼례읍 한내천), △황방폐월(黃尨吠月, 전주시 황방산), △위봉폭포(威鳳瀑布,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의 위봉폭포), △운제백련(雲梯白蓮, 완주군 화산면 운제골의 백련), △대둔천잠(大屯千岑, 완주군 운주면의 대둔산)이다.

호남의 절경 '삼한(三寒)'은 무주 한풍루(寒風樓), 남원 광한루(廣寒樓), 전주 한벽당(寒碧堂)이다.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전주 옥류동고개 옆 한벽당(寒碧堂, 전북 유형문화재 제15호)은 일찍이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고, 각시바우, 서방바우에서는 아이들이 고기잡고 멱감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때면 갑자기 불어나는 물로 아찔했던 기억도 있다. 아주 오래 전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 여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지금도 게첨돼 있는 등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애시당초엔 여기를 최담(1404년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직제학 등을 지냄)의 호인 월당(月塘)을 따서 '월당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한벽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寒碧)’이라는 어구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될 뿐. 

그러나 ‘한벽청연(寒碧晴烟)’으로 '완산팔경'의 하나였던 이곳이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고고한 선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은 좁은목을 지나 이곳 한벽당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한옥마을 앞으로 우회하게 된다.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이름을 붙은 연유다. 

예전에는 동고산성 자락과 남고산성 자락이 이어져 한벽당에서 보면 마치 폭포가 떨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한벽당 앞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가히 절경이라 했으며, 전주향교가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전주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전주천을 바라보며 시조를 읊었을 터이다. 

양귀자씨의 단편소설 ‘원미동 사람들’에도 그 일부의 모습이 소개된다.

완산 남천교를 지나며(過完山南川橋)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

'호남제일성' 풍패의 고을에
수양버들 그날 속에 무지개 다리가 걸렸네.귀하신 풍류객이 서로 다퉈 나와서
맑은 바람 낡은 달 밤에 좋이 오가던 다리.

第一湖南豐沛邑 
垂楊影裏駕虹橋 
風流貴客爭相出
最好淸風明月宵

*남원출신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1769~1823는 조선조 여류 작가로, 18살에 집안의 주선으로 한 동네 사는 총각 하립(1769~1830)과 혼례를 올린다. 

'백낙서(白樂瑞)란 자는 전주의 아전이다. 운현(雲峴, 흥선대원군)이 일찍이 전주에 놀러갔을 때 매우 곤궁했는데 백낙서가 후하게 대접했다. 갑자년 이후에 총애를 믿고 흉악한 짓을 일삼아 해독이 도(道) 전체에 끼쳤다. 엄세영(嚴世永)이 전라우도 암행어사로내려가서 민승호(閔升鎬)의 뜻을 받아 그를 죽였다. 그때 전주 남천(南川)의 돌다리가 붕괴되었는데 그의 재산을 적몰(籍沒)하여 그 다리를 고치는데 충당했다'

황현의 '매천야록' 1권 갑오 이전(1864~1887)에 기록, 이 무렵에 전주 남천이 붕괴됨을 알 수 있다. 아래로 남천교 이야기가 소개된다.

'기축(고종 26, 1889)년 정월에 이르러, 통인(通引) 노릇하는영리(營吏)의 어린 아들 하나가 늙은 관노한테 버릇없다고 꾸짖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발길로 차 넘어뜨렸다. 이에 노비와 사령들은 의논하여 늙은이가 이러한 욕을 당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고 죽음을 결심하고 그 통인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에 모든 아전들은 크게 두려움을 느껴 감사에게 아뢰고 군기를 내어 그들을 박살하기를 청했다. 당시 이헌직(李憲稙)이 감사로 있었는데, 마음이 약해서 제지하지 못하고 또한 권한이 아전들의 수중에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아전들은 각기 가족을 이끌고 가서 무기고를 부수고 군기를 내어 대적하고, 반석리(盤石里)를 불 질렀다. 이 동리는 남천교(南川橋) 남쪽에 있는 마을로 5백여 호나 되며 관노와 사령들이 살고 있었다. 횃불 한 개로 재를 만들었으며, 피살자가 수십 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억울함을호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알려졌으나 아전들이 감사 이현직을 위협하여 관노와 사령들이 난을 음모했다고 속여 조정에 보고토록 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실제 상황을 조사한 바 마땅히 아전들에게 죄가 있음을 알았으나 아전배들이 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고, 또한 서울에 있는 권문 세도가의 극성을두려워하여 간략히 서둘러 마무리 짓고 주모자 몇 명을 유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반석리(盤石里)'는 전주 완산구 북쪽에 있던 마을. 관노와 사령들이 살던 집성촌 마을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을 받아온 한벽당도 시대가 변하면서 아픔을 겪어야 했다. 등 뒤로 전라선이 지나며 굴이 뚫렸는가 하면, 허리 옆으로는 17번 국도가 생기면서 예전의 풍취는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한벽당' 이름이 들어간 3개의 편액 

전주천을 배경 삼아 발산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 위 절벽을 깎아 만든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물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진, 한벽교 옆 '한벽당'.

전북 출신 대가들의 웅혼한 글씨를 한 자리서 볼 수 있는 곳은 이웃하고 있는 '한벽당'과 '요월대'다.

‘한벽당(寒碧堂)’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년) 선생이 썼고, ‘요월대(邀月臺)’는 석전 황욱(石田 黃旭, 1898~1993)선생의 작품이다. 

강암의 ‘한벽당’은 정갈한 예서체를 사용했고, 석전의 ‘요월대’는 강인한 그만의 서예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오르막길의  '한벽당' 행서 편액은 작가 미상이 아닌, 이병희가 쓴 것으로 드러났다.

전주 한벽당(전북 유형문화재 15호)엔 모두 3개의 '한벽당' 편액이 남아 있다

전주천 가의 '한벽당' 편액은 강암 송성용의 옳고 곧은 성품이 잘 나타나는 정갈한 예서체다.

누각 안쪽 '한벽당' 편액은 김예산이 썼다. 친필로 9세에 썼다는 ‘의섬김예산구세근서(義城金禮山九歲謹書)’의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서 마주보는 ‘한벽당’ 편액은 낙관이 보이지 않아 서자(書者) 미상으로 알려졌다. 행서임에는 분명하지만 조선시대를 풍미한 조맹부체와 흡사한 걸작이다.

한벽당 행서 편액은 작가 미상이 아닌, 이병희가 쓴 것으로 확인됐다.

전북역사문화학회외 전북도가 펴낸 '전라북도금석문대계 6(증보판)'은 이를 쓴 사람이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라고 했다.

서자를 알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거나 눈으로 확인해야 했지만 어려워 탁본을 했다. 그래서 농천(農泉) 이병희(李氏丙熙之印)으로 판독됐다.

조선·근대. 작가이며, 대구 출생으로 군수를 지냈다. 호는 농천(農泉), 농암(農巖)이다. 행서와 초서에 능했으며, 창덕궁 연경당 , 화순 임대정 원림 수륜대와 강릉 선교장 활래정 주련을 휘호한 바 있다.

한벽당 바로 옆 '요월대(邀月臺)'는 1986년 12월 20일 60년만에 '전주부사'의 기록과 고증을 토대로 복원했다.

'요월대(邀月臺)'는 달과 노니는 누각, 달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일제 때 건립됐다. 

글씨는 1987년 석전 황욱선생이 썼다. 왼손 악필법으로 편액을 썼다.

'요월대'를 보면 문득 세상사가 생각이 난다. 잘난 사람 곁에서 늘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렇고 작고 보잘것없는 '요월대'가 있기에, 한벽당이 더 돋보인다.

'요월대' 앞 바위에 음각한 글씨와 다리 건너편에서 본 요월대. 한벽당과 달리 밖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스스로 감춰버린 정자 '요월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한벽당 보다 이곳에서 달맞이를 더 즐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여주지 않는 구중궁궐의 규수와 같은 자태로 숨어있다. 그래서 오늘 '요월대'가 더 소중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