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정미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어머니는 솔바람 거친 좁다란 논두렁 길을 걸어 양푼 대야를 이고 오셨다. 촉촉한 삼베 보자기를 걷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우리를 황홀케 했다. 조청에 찍어 먹는 달콤한 가래떡은 1년에 한 번 설날에만 맛봤다.
나는 항상 윗마을 정미소를 동경했다. 건장한 주인 아저씨가 쌀가마를 들었다 놨다 하시며 도정을 살피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다소 권위적이고 무서웠지만 가래떡을 뽑을 땐 거룩해 보였다. 세월이 흘렀다. 방앗간 아저씨도, 어머니도 고인이 됐다. 양철지붕은 녹슬고 기울어졌다. 지난 수업에 김계남 님이 보여준 친정집 정미소를 오늘 함께 그렸다. 선 드로잉 실습엔 양철 지붕이 적격이다. 그림을 모아 놓고 평가할 때 계남 님은 사인 위에 ‘아버지의 정미소’라고 썼다. 모두 잔잔하지만 큰 그 의미를 좋아했다. 아마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순간 뭉클했기 때문이리라.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지랄같이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눈물을 짜며 허공에 대고 ‘아버지!’라고 낮게 소리친다. 걷다가도, 자다가도. 계남 님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직장으로 달려간다. 짬을 내 취미 생활하는 열정이 멋지다. 천안 본가는 한때 4대가 함께 살았다는데 누구나 옹기종기한 그 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도 문화센터에 가시게 해 요즘은 스케치 그림을 일기처럼 보내 오신단다. 그립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함께한 그 시절도.
[이해균의 어반스케치] 아버지의 정미소/경기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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