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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백성들을 생각하며 붕어와 전복을 먹지 않는 기건

 

그 옛날 조선시대 관료사회에는 네 가지 해서는 안 되는 것과 세 가지 거절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는 관리들의 청렴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이를 사불삼거(四不三拒)’라 일컬었다.

, 고위공직자가 공직에 있을 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와 꼭 거절해야 할 세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사불(四不)은 부업을 하지 않을 것, 땅을 사지 않을 것, 집을 늘리지 않을 것, 마지막으로 부임지의 명산물(名産物)을 먹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삼거(三拒)란 꼭 거절해야 할 세 가지인데,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는 거절할 것, ()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는 거절할 것, 자신의 경조사의 부조(扶助)를 거절할 것을 의미한다.

사불의 첫째는 재임 도중 부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불이다.

영조 때 청렴강직한 호조 아전 김수팽은 어느 날 선혜청 서리로 있는 동생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화이다. 마당에 즐비한 항아리마다 염색액이 넘쳐나고 있어 김수팽이 무엇에 쓰는 것이냐고 물었다. 동생은 아내가 염색 일로 생계를 돕고 있다고 하자, 김수팽은 대노해 동생을 호통치며 발로 항아리를 차 뒤엎어 버렸다. 형제끼리 함께 나라에서 녹봉을 먹고 있는데 이런 부업까지 하면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겠느냐는 훈육이렸다. 한 번은 호조 판서가 바둑을 두느라고 공문서 결재를 미루자, 김수팽은 곧바로 대청에 올라가 판서의 바둑판을 엎어버린다. 그러고는 마당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졌으나 결재부터 해달라하니 판서는 죄를 묻지 못했다.

김수팽의 일화에는 조선시대 관리의 청빈 낙토의 얼과 혼이 담겨 있다는 기록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관료들은 이름하여 사불삼거(四不三拒)’를 불문율로 삼았다는 삶의 가치를 시사한다.

풍기군수 윤석보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산 것을 알고는 사표를 던졌다. 연산군 때 풍기 군수로 임명된 윤석보가 처자를 고향에 두고 혼자 부임하게 되자, 고향의 식구들은 궁색한 살림살이를 견디다 못해 집안의 물건을 죄다 팔아 밭을 샀다.이 사실을 뒤늦게 안 윤 군수가 식구들에게 말했다. 공직에 있으면서 자신을 위해 한 척의 땅이라도 넓혀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국녹 이외에 것을 탐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내가 관직에 올라 국녹을 받으면서 전에 없던 땅을 장만했다면,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리고는 즉시 밭을 되물리게 했다.

 

기건이란 분이 황해도 연안부사로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안에는 붕어가 유명해서 원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기건은 재임 6년 동안 붕어를 입에 대지도 않았고, 제주 목사로 3년 동안 있을 때 역시 전복을 아예 먹지도 않았다는 구전이다. 딱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데다 벽창호같이 고지식한 분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기건(奇虔, 1390~1460)은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됐다. 그 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됐다.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한번도 먹지 않았다. 또 제주목사로 나가서는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했다.

이어 내직으로 옮겨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 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개성부유수가 됐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의 유약함을 기화로 그해 권력을 농단하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했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고 공론의 보장을 요구했으며,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했다.

그 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했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 : 당달 봉사, 눈뜬 장님)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나올(羅兀 : 너울이라고도 함)을 창안해 부녀자들의 외출시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해서,

우리나라 풍속에서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뒤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계린(李季疄)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

기건(奇虔)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이사순(李師純)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박이창(朴以昌)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화(李樺권극화(權克和)를 아울러 중추원 부사로,

김답(金淡)을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조석강(趙石岡)을 경상좌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기건은 이사(吏事)에 조금 익숙하고, 여러 사서(史書)를 즐겨 보았다.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적에는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또 제주가 바다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질(癩疾)이 많았는데, 비록 부모 처자일지라도, 또한 서로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 없는 땅으로 옮겨 두어서 절로 죽기를 기다렸다. 기건이 관내를 순행하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바위 밑에서 신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보니, 과연 나병을 앓는 자였다. 인하여 그 까닭을 물어 알고서, 곧 구질막(救疾幕)을 꾸미고, 나병을 앓는 자 1백여 인을 모아 두되,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하고,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沐浴)을 시켜서 태반을 고치니 그가 체임(遞任)되어 돌아올 때에 병이 나은 자들이 서로 더불어 울면서 보냈다.(문종실록 7, 문종 142일 경오 1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

 

'중추원 사(中樞院使) 기건(奇虔)이 졸()하였다. 기건은 기현(奇顯)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했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이다.(세조실록 22, 세조 61229일 신축 1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

 

 

              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4월 2일조, 기건의 구질막 설치 동기와 그 명칭 출현 및 운영실태 등 관련 부분.

 조선시대 때 제주는 공립적 성격의 의료기구도 설치·운영됐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질막(救疾幕)이었다. 이는 제주목사 기건(奇虔)이 세운 것으로 오늘 날의 환자 수용구호시설과 같았다.

 고려·조선시대 때 수령의 성품과 행적은 민생의 편안함과 괴로움에 직결됐다. 수령이 선정(善政)을 펼쳤을 경우에는 주민이 두고두고 칭송·흠모했던 반면에 가렴주구 등의 악정을 행했을 때는 분노했고 심지어는 민란도 일으켰다. 중앙정부도 사신을 파견해 수령의 부정행위 여부 등을 감찰했으며 혹 민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진압·위무하는 한편, 수령을 처벌·파직해 주민의 분노와 억울함을 진정시켰다. 제주 지역도 행정단위의 변화에 따라 각종 수령이 파견됐다. 이들의 성품과 행적도 제주 사람의 민생과 그에 따른 희비를 좌지우지했다. 이들 제주의 수령 가운데 현재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정관이 제주목사 기건이다.

제주목사 기건하면 전복과 관련해 선정을 펼쳤던 목민관(牧民官)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종 25(1443) 제주목사로 부임해 와 세종 27(1445) 이임하기까지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제주사람의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기건이 전복을 먹지 않게 된 것은 전복을 캐다가 번번이 사람이 희생되는 등의 제주 실정을 직접 목격했던 점이 크게 작용한 듯싶다.

 그는 제주목사로 오기 전 연안군수(현 황해도 연안군 연백읍)를 지낸 적도 있었다. 이때도 주민이 붕어 공물(貢物)에 바칠 붕어잡이에 힘들어 하자 부임 3년 동안 붕어를 한 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기건의 경우는 자신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지역의 주민이 바로 눈 앞에서 고달파하는 것을 못 참는 성정(性情)을 지녔던 것 같다.

오늘날에 와 기건은 전복 관련 선정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편이나 그보다 더욱 주목돼야 할 선정은 구질막의 설치라 하겠다. 구질막은 기건이 제주의 한센병 환자를 수용구호코자 세운 의료기구였다.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2월 29일, 기건의 선정 드러나는 졸기(卒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