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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문학을 통해 선비 황윤석과 한학자 엄명섭을 만나다' 황윤석의 '이재시선2', 엄명섭의 '경와시선'

 

문학을 통해 선비 황윤석과 한학자 엄명섭을 만나다황윤석의 이재시선2’와 엄명섭의 경와시선이 발간됐다.

 

황윤석의 이재시선2

 

'이재 시선(頤齋詩選) 2(지은이 황윤석. 한글 옮긴이 이상봉, 펴낸 곳 지만지 한국문학)'18세기 호남 선비 황윤석의 일기 '이재난고' 가운데 중요한 시들을 가려 묶었다. 그는 10세부터 세상을 떠나는 63세까지 53년간 57책에 달하는 일기를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약 1,630제의 시가 들어 있다.

호남을 중심으로 한 18세기 지방의 세태와 도시적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던 한양의 분위기를 함께 읽을 수 있다. '이재 시선 2'는 황윤석의 19세부터 29세까지의 시 100제를 수록했다.

학문과 과거 시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부터 공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마음가짐, 학문과 입신양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점차 성장해 가는 젊은 선비 황윤석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다(절구 두 수)

 

누군가 묻기를 옛날에 현명했던 사람들은 모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진짜 선비가 되지요.

그대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부디 우리나라 사람과 송나라 사람을 보세요

 

내가 말하길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스스로 넉넉함이 있어서니

과거 합격 한 가지에만 매여 있지 않았지요.

만약 그대 처음 말이 옳다면

요즘 사람들 모두 송나라 때 선비와 같겠지요

 

비단 주머니 (두 수)

 

동그란 무늬 비단을 오려서

입구를 오므릴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었네.

향내 나는 먹과 귀한 붓을

모두 이 안에 담아 둬야지.

 

한 번 묶자 용()이 큰 연못에 웅크린 듯하더니

한 번 풀자 봉새가 왕의 정원에서 뛰노는 듯하네.

그 안에 보배를 담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밖으로 꽃송이를 토해 낼 수 있었을까?'

 

그는 28세인 1756, 과거 시험에서 낙방하면서 고향 고창에 돌아오면서 지은 시다. 연이은 낙방과 앞날이 보이지 않았지만 고향에서 조용히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들과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107일 새벽에 출발했다. 삼례에서 시를 지었다.

 

눈 온 뒤 호산은 멀고,

□□ 하늘은 맑네.

부귀영화 못 누리는 것 근심할 필요 없으니, 이미 저절로 평생은 정해진 것을

옛 서가에 남은 책들 있으니

새해에는 송아지로 밭 갈아야지.

부모님 모시고 자식 가르치리니

동생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이 책의 저본이 되는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10세 되던 해부터 세상을 떠난 때인 63세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기다. 거의 모두 초서(草書)로 썼는데, 전체 규모는 총 57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는 호남 지역 사회에서 선비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강화하는 한편,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한평생 노력했다.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지역 사회의 선비 가문 출신으로서 가졌던 삶의 자세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난고'는 중앙 정치 무대로의 진출 노력과 좌절을 기록한 한 지방 선비 가문의 일대기이자 서양 문물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해 간 한 전통적 지식인의 자서전이며, 18세기 한양의 활기찬 학문 풍토에 동참한 박학한 선비의 박물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1729(영조 5) 428일 전라도 흥덕현 구수동(현 고창군 성내면 조동)에서 황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엄명섭의 경와시선

 

'경와시선(지은이 엄명섭, 한글 옮긴이 엄찬영 , 강동석, 펴낸 곳 지만지한국문학)'은 근대 유학자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 19062003)의 시를 소개한다. 그의 문집 '경와사고(敬窩私稿)'에 수록된 800여 수의 시 가운데 127157수를 가려 뽑았다. 시에 드러난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와 문화, 유학자로서의 모습 및 가치관 등을 이 책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곡성, 장수, 전주 등 전북도 일대에서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유학을 잇는 스승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훗날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해 자신의 글을 각종 문체별로 손수 적어 정리했는데, 바로 이 책의 저본이 되는 '경와사고'.

 

'나무 빗에 대해 지음

 

나와 함께 보낸 어언 삼십 년

날마다 매 순간 서로 가까웠지

돌이켜 생각하건대 그간의 의리

난 지금도 그때를 잊을 수 없네

군데군데 빠진 빗살에 너도 늙었고

안타깝게도 나 역시 흰머리 가득하다

공이 있어도 잘한다고 자랑 없으니

누가 너와 같은 천성을 지녔으랴

 

스스로 힘씀

 

이미 십 분의 아홉 길 산을 쌓았는데

한 삼태기 더하고 더는 속에 공을 다투네

일이란 시작해야만 끝을 완성할 수 있으니

이 마음으로 도를 모아야 절로 여유 얻으리라

 

분발해 힘씀

 

귀와 눈이 총명해 이 몸에 갖춰져 있으니

책을 가슴에 품은 나에게 어찌 가난하다 하겠는가

심신을 절로 풀어놓으면 안으로는 마음을 속인 것이요

명실을 크게 부풀리면 밖으로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평소 구태 버리지 못하면 악행이 맥에 머무르고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나태하면 병이 뿌리에 생기네

오늘날 시에 적은 이야기를 하늘에 맹세하리니

반백 년 남은 삶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으리라'

 

그는 일제강점기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현대까지 유학의 이념과 가치를 올곧게 지키며 학문을 닦은 도학자였다.

1906년 아버지 엄주용(嚴鑄容 1871~1932)과 어머니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용재(池龍載)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전남 옥과(곡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율곡(栗谷) 이이 선생과 간재(艮齋) 전우선생을 사숙했고, 해방 후 학문이 완성 되어가는 불혹에 전주 옥류동(玉流洞)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금재(欽齋) 최병심 선생을 찾아가 예를 올리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 후 1960년대 장수군 번암면 대성산방(大聖山房), 1970~80년대 전주향교 명륜당과 동재, 1990년대 전주 송천동에서 송천서사(松川書舍), 우가재(尤可齋)에서 교학 활동을 했다.

2000년 다시 전주향교에서 두어 해를 머무르며 초학을 지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200398세의 일기로 교학을 마치었다.

선생은 공교막부(孔敎莫負) 네 글자를 사명으로 삼고, 항상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無不敬=생각함에 사특함이 없고, 공경치 아니함이 없다) 여섯 글자는 몸에 가까운 벽에 걸어 놓고 일상에서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