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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오희문의 장녀, 1594년 신응구와 혼례식을 올리다'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총서2‘조선시대 혼인의 사회문화사’ 발간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장녀는 1594년 8월 13일 신응구(申應榘, 1553~1623)와 혼례식을 올렸다. 그러나 신응구는 혼사를 의논하기 전부터 이미 오윤겸의 오희문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 시작은 바로 오희문의 장남 오윤겸(吳允謙, 1559~1636)과 교유하면서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오희문가와 왕래를 하게 된 것은 1593년 임진왜란 직후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학술총서2‘조선시대 혼인의 사회문화사’는 오늘날과 다른 조선시대 전통혼례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조선사회에서도 시대별, 지역별로 달랐던 혼례문화를 분석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혼례를 통해 우리의 공동체 문화를 읽어내고자 한 책이다. 특히 혼인절차와 함께 실제 혼례문서나 일기 등 ‘혼례실행자료’를 통해 다양한 지역과 가계의 혼례의식과 혼인 후의 생활을 비교하여 조선 사회가 지키고 추구하고자 했던 혼례문화를 살펴본다. 전북 관련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 오희문 식구는 신응구에게 경제적으로 깊게 의존

오희문은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1592년 4월) 전라도도 남행(南行)중이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흩어져 전북 장수에서 약 6개월 동안 피란했다. 이후 10월에 가족들이 충남 예산의 김매(金妹, 김지남에게 시집) 댁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올라온 뒤부터는 정유재란(1597) 전까지 약 20여 명의 식솔들과 함께 예산, 홍주(홍성), 임천 등 충남 지역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임천은 1593년부터 1596년까지 4년간 오희문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곳으로, 그 중심에는 오희문 의 첫째 사위이자 아들 오윤겸과 절친했던 함열현감 신응구가 있었다.
1592년 9월 30일 장수 관아에서 피란하던 오희문은 처자식들이 생존해서 예산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10월 8일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으며, 약 6일 후인 13일에 홍주 사곡(蛇谷)에 있는 첨사 이언실의 사내종 돌시(乭屎)의 집에서 식구들을 마주했다. 이후 위아래 식구들이 너무 많아 한집에 머물 수 없었기에 사인(士人) 이광복(李光輻)의 사랑채를 빌려 잠시 거처하다가 10월 18일에 홍주에 있던 서당에 흙집을 짓고 마구간을 만들어 이사했다. 그곳에서 겨울을 난 뒤에 식량난으로 고생하던 오희문 집안에 서신 한 통이 날아든다.

‘함열현감(咸悅縣監) 신공(申公, 신응구)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참봉(오윤겸)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형의 집일을 한 번 생각할 때마다 한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하고자 하니 즉시 가까운 곳으로 와서 살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으니, 후하다고 할 만하다.(1593. 5. 11)’

1593년 5월 11일, 바로 아들 오윤겸에게 경제적인 부분을 지원해 줄 것이니 함열 근처의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여 동고동락하자는 함열현감 신응구의 편지였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6월 21일, 오희문은 식솔을 이끌고 임천(林川) 소지(蘇驇)의 빈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물론 전부의 이유는 아니었을지라도 당시 오희문의 기록에 계속해서 곡식과 음식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함열현감의 영향으로 거주지를 이동했을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함열과 임천의 거리는 도보와 배편을 이용하여 편도로 반나절 정도가 걸릴 정도로 멀지 않았다(현재: 육지로 돌아서 24km). 이후 신응구는 임천으로 이사 온 오희문 가에 백미, 조, 콩, 조기,
간장, 조개젓, 미역 등의 다양한 음식과 신발, 종이 등의 생필품을 다량 지원해주었으며 편지를 보내 안부를 살피고 자주 왕래했다.


이와 관련, 오희문은 함열현감에 대해 지극한 고마움을 내비치고 있다.

‘양식을 구하는 일로 함열현감에게 막정(奴)을 보냈다. 함열현감은 비록 윤겸의 친한 친구라지만, 나에게는 본래 친속도 아니고 일찍이 알던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집을 대접함이 남들에게 하는 것보다 지극히 후하여, 한 달 안에 두세 번 사람을 보내서 부탁해도 전혀 난색을 표하지 않았다. 한집 10식구의 목숨이 오로지 여기에 힘입고 있으니, 이 큰 은혜를 어찌 갚는단 말인가. 그저 깊이 감사할 뿐이다.(1594. 2. 23)’

이처럼 당시 오희문의 식구는 신응구에게 경제적으로 깊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신응구는 오희문을 초대해 바다로 경치를 보러 가기도 하고 웅포에서 고기잡이를 즐겼으며, 함열현 북쪽에 있는 고사(高寺)에서 연포회(軟泡會)를 열어 음식을 대접했다. 임천에 있는 보광사(普光寺)와 향림사(香林寺)에서도 승려들이 만든 두부로 연포탕을 만들어 먹는 등 이들은 자주 모임을 가졌다.
한편, 오희문과 부인 연안이씨가 딸들의 혼처를 꼼꼼히 선정하는 모습도 주목 된다. 부부의 나이가 30세 가량 차이나는 경우, 정처에게서 아들이 있었을 경우는 혼사를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는 부인 연안이씨의 강력한 주장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 남원 안터 순흥안씨, 부안 우반 부안김씨 등 ‘의절(납폐)’식 사용

지역별 혼서의 차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고문서집성’에 수록된 623건의 혼서 중에서 작성자와 작성년도가 명기되어있는 혼서 314건 51가문을 대상으로 위의 오례식(‘국조오례의’)과 주자가례식(‘가례의절’)의 반영 정도와 표기법을 전수조사 했다.
흥미롭게도 크고 작은 특징들이 나타났다. 전라도는 6가문 23건의 혼서 중에 영광 입석 영월신씨와 나주 회진 나주임씨의 ‘오례의+의절’식을 제외하고는 남원 구례 삭녕최씨, 남원 안터 순흥안씨, 부안 우반 부안김씨, 해남 연동 해남윤씨 모두 ‘의절(납폐)’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라도 지역의 혼서는 다섯지역 중에 가장 간결하고 단순화되어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유희춘을 도와 살아있는 수기러기를 잡아 보내준 김제수령 정황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 전반에 걸쳐 전라, 경상, 충청, 경기 등 그 지역에 상관없이, 또한 관직을 지냈건 아니건, 부유하던 가난하던 양반 모두 신부의 거주지에서 혼례식을 올렸다. 이처럼 해지기 전의 늦은 시간 신부집의 대청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현상은 시대와 지역, 신분과 부의 정도를 망라하는 조선의 보편적 혼례문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도 신부의 거주지나 고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기원은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정하게 전승되어 내려온 혼례 문화의 대표적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576년 당시 해남에서 손자의 혼사를 주관하며 전라도 해남에서 ‘미암일기’를 작성하던 유희춘을 도와 혼수준비에 증여, 대여 등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 중에서 그 지역을 알 수 있는 다. 말안장(鞍甲)을 보낸 홍양현감 권우(權遇)와 말을 선물했던 지인 권영(權詠)의 손자이자 광주판관인 권화(權和), 신랑 입장 때 쓸 발립(髮笠)과 3명의 관노를 대여해준 윤구(尹衢)의 사위인 담양부사 이중호(李仲虎, 1512~1554), 살아있는 수기러기를 잡아 보내준 김제수령 정황(鄭滉, 정철의 형)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청암찰방, 함흥판관, 순창군수, 광주목사 등도 전라도 각지에서 물품을 부조해주었다.


△신랑이 여가에 귀속되거나 머무르는 ‘남귀여가(男歸女家)’와 ‘서류부가(壻留婦家)’

남귀여가(男歸女家)와 서류부가(壻留婦家)는 신랑이 여가에 귀속되거나 머무른다는 뜻으로 전래되었으며, 조선시대에서도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태종실록의 전조의 구속(舊俗)에는 혼인하던 예법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외가(外家)에서 자라게 했다.(前朝舊俗, 婚姻之禮, 男歸女家, 生子及孫, 長於外家)는 기사에서 옛 풍속으로 남귀여가를 언급하고 있다.

‘지금 국가 자녀의 혼인에 모두 친영의 예를 행하나 사대부 가는 고루하여 서류부가 한다. 고로 처를 취했다 하지 않고 장가를 들었다 한다. 이는 양이 음에 따르는 것으로 크게 남녀의 의를 잃은 것이다.(유형원, ’반계유록‘ 권25, 昏禮申明親迎之禮)’

남귀여가혼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고구려 서옥제(壻屋制)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혼인이 성사되면 여자의 집에서 집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壻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해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궤배(跪拜)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쌓아둔다.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간다.
이러한 서옥제에서 남자가 여가에서 생활이 20세기 초까지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 들어가는 친영적 시집살이가 정착되지 않았으며, 1950년경 이후에 그 기간이 점차 짧아지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야 3일 우귀 및 당일 우귀가 보편화되었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1971년 순창은 3일 우귀, 장수는 3일 우귀, 또는 당일, 3일 우귀를 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