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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1> 전주사고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지킨 선비 이야기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61>  전주사고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지킨 선비 이야기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 ‘유일본 전주사고 조선왕조실록과 어진을 지킨 전주 전북인(지은이 박대길, 펴낸 곳 신아출판사)’을 펴냈다.

조선왕조는 역사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을 4대 사고(史庫)인 춘추관, 성주·충주·전주사고에 분산시켜 보관했다. 그러나 1592년 4월(음력) 임진왜란 발발 20여일 만에 성주·충주사고, 춘추관에 보관됐던 실록은 불에 탔다.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이 위기에 처했다. 그해 6월 정읍의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등은 실록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 20여명과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등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
이후 안의와 손홍록은 더 깊은 산 속인 은봉암, 비래암 등으로 옮겨가며 1년여 동안 지켜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매일의 상황을 ‘수직일기’(守直日記)로 남겼다. 그들은 실록이 정읍을 떠나 여러 곳을 거쳐 강화도까지 옮겨질 때도 사재를 털어 동행하면서 실록을 지켜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왕조는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복본해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인조 때 무주 적상산으로 옮김), 오대산사고 등 더 안전한 산중에 보관했다. 우여곡절 끝에 실록은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실록형지안 (實錄形止案)'은 실록의 열람이나 이동 사항에 대한 목적 · 절차 · 규정 등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실록을 사고(史庫)에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봉안형지안을 비롯해 포쇄(曝曬 : 먼지나 습기 등을 털거나 말림) 때마다 점검한 내용을 기록한 것, 고출(考出 : 참고로 살펴보기 위해 내어 봄) 때의 것 등 여러가지 사례별로 형지안을 작성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임진왜란 이전은 매우 드물고, 조선 후기의 것이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588년(선조 21)과 1591년의 ' 전라도 전주사고포쇄형지안'이 있고, 1594년의 '해주사고포쇄형지안', 1599년 및 1601년의 '영변사고포쇄형지안 '등이 전한다.

'전라도 전주사고포쇄형지안'은 예문관 검열 김홍휘(金弘徽)가 8월 22일에 배사(拜辭)하고 8월 27일에 전주 도착, 9월 1일에 포쇄를 했음이 나타나 있다. 

전주사고 형지안으로 또 하나 남아있는 것은 1591년 작성됐다. 포쇄관은 예문관 검열 李이광정(李光庭)이었으며, 1591년 8월 24일 전주에 도착한 후, 8월 28일 사고(史庫)의 문을 열었다. 본 형지안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右立案八月 二十日拜辭同日發程同月二十四日到全州同月二十八日史庫開閉曝曬 爲白遣合行立案者 萬曆十九年辛卯八月二十八日曝曬別監通士郞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臣李光庭(手決)”

'미암일기'는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쓴 친필 일기로,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 그가 죽기 전일까지의 약 10년 동안의 기록이 담겨져 있다. 선조 연간에 벌어졌던 정치적 사건을 비롯, 당대의 생활상까지 생생하게 기록했다. 
임진왜란으로 사초가 대부분 소실되자, '선조실록' 편찬에 실질적으로 사초 역할을 할 만큼 당대에도 중요한 기록으로 인식됐다. 흥미로운 여러 기록들이 나오지만 실록을 봉안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장면도 주목된다.

 일기에는 전주사고에 실록을 봉안(奉安)하러 오는 봉안사 일행을 맞이하는 정황이 일자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1571년 (선조 4년) 4월 27일의 일기를 보면, '실록청의 공사(公事)가 예조로부터 내려왔다. 실록을 사고에 보관할 길일은 이달 25일이다. 세초연(洗草宴)은 5월 초 1일이다. 봉안사가 오는 것은 초 3일이고, 전주 사고에 봉안하는 것은 16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라고 한다'
4월 30일에는 ‘이날 아침에 듣자니, 대간이 계를 올려 청하기를, 실록 봉안사를 이렇게 하삼도가 흉년으로 피폐할 때 내려보내면 거듭 민폐를 끼치게 되니 추수 후로 미루어달라고 하자 상이 따르셨다 한다’
라고 해서 실록 봉안이 연기된 정황을 기록했다.  
그러나, 5월 2일의 기록에는, ‘길에서 전주의 경주인(京主人)을 만나 서울 소식을 들었는데, 우의정 홍섬의 논의로 인하여 상께서 대간의 계를 따르지 않고 결국 봉안사를 보냈으므로 이달 초 3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온다는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고창과 무장쪽으로 가지 않고 곧장 완산으로 향했다.(路遇全州京主人 持京問來 以右議政洪公(暹)之議 上不容臺官之啓 而竟遺奉安使 故今月初三日 自京發來云 余以此不向高敞茂長 一路直向完山矣)’라고 하여, 5월 3일에 실록 봉안사가 서울을 출발함을 기록하고 있다.

5월 10일의 일기에는 봉안사 일행이 온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묘시(卯時)에 내가 도사와 수령을 거느리고 실록을 맞으러 갔다. 오리정(五里亭) 근처 배귀인 처가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봉안사가 황화정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진시(辰時)에 오리정의 막하로 나아가 조복으로 갈아 입었다. 사시(巳時) 초에 비가 멎었다. 실록이 운반되어 이르자 감사 이하가 몸을 굽히고 공손히 맞았다. 아래에서부터 먼저 말을 타고 행하고 감사가 가장 뒤에 행하였으니 실록과 가까운 쪽을 우두머리로 세운 것이다. 대청의 뜰로 들어서서는 땅이 젖었으므로 모든 관원들이 중문의 처마에 의지하여 섰다. 실록의 사궤(四櫃)가 올 때마다 모두 지영(祗迎)의 예를 행했다. 봉안사는 동쪽 계단 아래에 서고 감사 이하가 사배의 예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 나는 서헌(西軒)으로 돌아왔다'

 유희춘은 봉안사 박순(朴淳, 1523∼1589)을 맞이하여고 비를 무릅쓰고 전주에서 출발, 삼례역을 거쳐 저녁 무렵에 여산군에 도착해 군수를 만났다. 그때 직접 봉안사를 만나러 전라병사의 군관과 부안현감, 용안현감 등이 각기 움직였다.

이 책은 풍패지향 전주 태조 어진과 경기전, 전주사고의 설치와 조선왕조실록 봉안, "미암일기'를 통해 본 전주사고 실록 봉안사행, 임진왜란 유일본 전주사고 실록의 보존, 유일본 전주사고 실록을 지킨 사람들로 구분했다.

저자와 김순석 전주전통문화연수원장은 "이번에 발간한 책은 전란에서도 목숨을 걸고 실록과 어진을 지켜낸 전북인의 자긍심과 역사의식은 물론 우리의 찬란한 역사문화유산을 알려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을 향한 남북한 동질성 회복의 지렛대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이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역사문화유산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