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의 대량평부곡(大良坪部曲) 땅 고사(古沙)면 사기점에 이르면 고수자기의 뿌리·자기소(資器所)가 있다.
수곡(水谷)면 장암(場岩)리에 가면 질그릇 굽는 도기소(陶器所)가 있다.
고려자기는 그 시대에 만든 자기로 무늬와 빛깔 등이 곱고 예술성이 높은 그리고 만드는 방법이 정교하고 품질이 독특해 온 세계에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곳 사기점은 주원료인 백토(白土)와 세사(細沙) 질흙 등 좋은 규산질과 장석(長石), 석회석, 백상감(白象敢), 흑상감의 재료가 그 인근에서 풍성하게 출토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요업(窯業)이 성행하게 된 연유가 있었다.
살아생전, 이기화고창지역학연구소장은
버로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의 찻잔 수집가들이 고수자기 요지(窯地)를 방문했다고 했다.
1927년 일본의 세계적인 고 미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장성(長城) 화룡장(火龍場) 목로주점에 들렀다가 막걸리를 마시던 투박한 술잔이 토속성이 강한 고창 고수자기인 것을 알고 동경고미술협회에 보고했다고 전한다.
질박하고 튼실하게 구워진 고수백자 술잔이 일본의 대표적인 녹차잔으로 둔갑함으로써 뒷날 삿뽀로 동계올림픽 대회 찻잔으로 활용돼 세계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고수요가 됐다.
때는 이때 5월 5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전남 장성 상오리에 있는 한지 만드는 곳에 갔을 때 주막집에서 김봉수를 만나서 고창 탁주잔을 소개받았다.
'일정은 바빴다. 아직 장성이 남아 있다. 장성은 전남에서 제일 가는 종이 산출지다. 그곳에 닿은 것은 오후 3시가 거의 되었을 때였다. 다행히도 지업조합 이사 이정선(李廷善) 씨의 안내를 받아 종이를 뜨는 작업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곳은 상오리라고 하는데 주로 온돌용 장판 지를 만들었다. 작업장은 정말 볼 만한 것이었다. 길이는 겨우 두 칸 반 정 도나 될까. 굵은 느티나무로 만든 두 개의 큰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열 사 람이 달려들어 방아를 밟아 공이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그 무개로 포개어 진 장판지가 밑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원시적인 힘으로 만드는 종 이가 일본에는 없다. 지금은 새로운 법을 채용하여 건조할 때 철판을 사용 하지만 얼마 전만 하더라도 모두 야외에서 말렸다고 한다.
장판지는 두께에 따라 구별된다. 같은 전라도 안에서도 남도는 이것을 삼갑지(三甲紙) 내지 육갑지(六甲紙)로 나누고, 북도에서는 삼배지(三 倍紙) 내지 팔배지(八倍紙)로 나눈다고 한다. 여기서 숫자가 불어나는 것 은 두께가 불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기름을 먹인 이러한 종이가 조선의 방이 끌렸다. 이씨에게 안내를 부탁하여 그 집을 방문했다.
이름은 이치봉 (李致鳳) 씨. 주인은 전에 구마모토[能本]에 산 일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일본 사람들의 친절을 받은 적이 있으므로 당신들이 오신 것을 기뻐합니 다”고 했다. 우리를 흔쾌히 안으로 맞아들여 술상까지 차리고 대접해 주었 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 환대에 우리는 황송스럽기까지 했다. 잊을 수 없 는 것은 그 안마당에 있는 김칫독들과 외양간에 있는 여물을 담는 구유이다. 특히 구유는 느티나무로 만든 멋진 모양의 것이었다(뒤에 이정선 씨의 알선으로 이 구유를 양도받았다. 지금은 민예관에 장식되어 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 었다.
그런데 다시 길가의 목로술집에 걸려들고 말았다. 술에 걸려든 것이 아니다. 술을 마시는 그 백자 사발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름다운 두세 가지 물품을 입수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장성의 장날에도 나오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고창의 가마에서도 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주저하지 않 고 5백개 분을 주문하기로 결정했다. 이씨는 기꺼이 발송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날 장성에서 광주로 돌아왔을 때 밤은 상당히 깊었었다. 같은 이즈미야 여관에서 잠을 잤다.
5월 6일, 오늘은 나주로 가는 날이다'
-전라도의 골동품, 일본인 예술가를 사로잡다 – 야나기 무네요시, '전라기행'('공예' 82호, 1938.3 발표)
6대째, 230여 년의 가업을 물려받아 도자기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는 위대한 장인(匠人)의 숨결이 있다.
조상의 얼,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자랑스런 주인공은 라희술씨(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205).
17세부터 아버지 라만동 명인을 도와 도자기 굽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흙 만지고 노는 게 좋았다. 6남매 중 장남이었던 내게 자연스럽게 도예는 삶의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창군 고수면은 고려 때부터 자기로 유명했던 고장이다. 궁중에 바치던 고급품에서 일반 서민용 중급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해온 고수자기는 한때 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다시금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고수 삼거리에서 문수사 쪽으로 750m 지점에 있는 라희술씨의 공방이 바로 그곳이다.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각종 생활자기, 성찬기등을 옛 전통기법 그대로 구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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