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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2024년은 용의 해 전북 이야기를 알아보니] 무왕, 과부와 용의 교접으로 태어나 미륵사를 창건하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24년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를 맞아 한국민속상징사전 ‘용 편’을 펴냈다. 이 사전은 한국 민속문화 속에 깃들여 있는 용의 다채로운 모습과 상징을 총망라했다. 2024년은 ‘청룡의 해’로 청룡(靑龍)은 동쪽 방위를 지키는 수호신이자 만물이 근원인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의 성격이 강하다. 갑진년 청룡의 청량하고 신성한 기운을 듬뿍 받아 활기차게 비상하기를 기대해본다. 전북 관련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무왕(武王), 과부와 용의 교접으로 태어난 서동이 선화공주와 혼인하고 미륵사 창건

백제 무왕(武王)은 과부와 용의 교접으로 태어난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고 백제 무왕이 된 후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이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그는 재위 당시 영토 회복을 위해 신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또한 사비에 궁궐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조성했고,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다. 백제 말기에 전쟁의 승리와 문화의 중흥을 이끈 무왕에 관하여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탄생과 혼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불교적 영험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현재 충남 부여에는 무왕이 조성했다는 궁남지(宮南池) 유적이 남아 있으며, 2009년에는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선화공주가 아닌 무왕의 부인 사택왕후(沙宅王后)가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가 발견되면서 무왕 설화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검단선사가 용을 몰아내고 돌과 숯으로 못을 메워 그 자리에 선운사 세워

선운사(禪雲寺)엔 창사연기(創寺緣起)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창사했다는 설화는 진흥왕이 늙어서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왕비 도솔(兜率)과 딸 중애(重愛)의 이름을 따서 도솔암과 중애사를 창건하고 존상(尊像)을 봉안함으로써 선운사의 시초를 열었다는 이야기이다. 일설에는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의운화상(義雲和尙)을 선운산에 보내 선운사를 창건하였다거나 의운화상이 진흥왕의 큰 시주를 얻어 대참사(大懺寺)를 창건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검단선사에 의한 창사설화는 ‘본래 선운사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선사가 이 용을 몰아내고 돌과 숯으로 못을 메워 그 자리에 선운사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숯으로 연못을 메우는 과정에서 검단선사는 신통력으로 마을 사람들이 눈병을 앓게 하고는 사람들에게 연못에 숯을 던지면 눈병이 낫는다고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연못에 숯을 던지니 금세 못이 메워졌다고 한다. 검단선사에 의한 창사설화는 검단리의 소금 생산 기원 설화와 맞물려 전승되고 있다.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하고 나서 마을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마을명도 검단리라 하
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곤룡포

황룡(黃龍)은 오행 관념에서 나온 방위로는 중앙, 오행으로는 흙, 색채로는 황색에 해당하는 용을 말한다. 오방색에 따라 동서남북의 가운데 있는 중앙은 오행으로 흙[土]이고, 오방색으로는 황색이나 황금 또는 황금빛이다. 용은 최고 권위를 지닌 최상의 존재이다. 상상의 동물인 황룡은 사방 신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중재하는 역을 맡는 것은 물론 중앙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누른빛이 도는 황룡은 제왕 중에서도 중앙을 관장하는 황제(黃帝)를 묘사할 때 자주 보인다. 이 황제는 나중에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며, 이때 그가 탄 용이 바로 황룡이었다는 것이다. 황룡은 신선(神仙)이 타는 동물로도 자주 등장한다.
용이 가진 장엄하고 화려한 성격 때문에 용은 왕권이나 왕위로 상징된다.한국 복식에서 가장 권위 있는 최고 옷은 왕의 곤룡포(袞龍袍)이다. 왕이 일할 때 입는 정복(正服)인 곤룡포는 가슴·등·양어깨에 보(補)라고 하는 금실로 수놓은 용보(龍補)을 붙였다. 곤룡포에는 노란색의 황룡포, 붉은색의 홍룡포, 파란색의 청룡포, 검은색의 흑룡포 등이 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에 보면 조선 태조는 새로운 왕조를 연 뜻을 기리기 위해 파란색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고, 다른 왕들은 붉은 색의 용포를 입고 있다.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 있다. 중국의 왕은 천자라고 해서 황룡포를 착용했고, 조선의 왕들은 제후국이라 하여 붉은색 곤룡포를 주로 착용했다. 흑룡포는 사실 왕의 상복이다. 1897년 나라를 대한제국이라 칭하고 황제가 된 고종은 중국의 황제 복식과 똑같은 황색의 곤룡포를 입었고, 명성황후 또한 황색 원삼을 입었다. 황룡포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금실로 수놓은, 발가락이 다섯인 오조룡보를 달았다.

△‘견훤설화’의 각편에 따라 ‘야래자’의 양상이 동삼, 용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설화는 뱀으로 변해 찾아온 남자와 관계를 맺은 처녀가 비범한 아이를 낳았다는 내용의 야래자형 설화(夜來者型 說話)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후백제 견훤조에 그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유사한 이야기가 ‘청구야담(靑邱野談)’에 ‘괴물매야색명주鬼物每夜索明珠)’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견훤설화’는 ‘야래자설화’라고도 한다. 각편에 따라 ‘야래자’의 양상이 지렁이, 수달, 절굿공이, 동삼(童參), 용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절굿공이인 경우에는 태어난 아들이 없으며, 수달인 경우에는 머리가 노랗게 태어나서 ‘노랗지’라고 불린 아들이 청나라 태조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하고, 용인 경우에는 아들이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지렁이인 경우에 태어난 아들이 바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야래자를 죽이는 방법으로는 물에 소금을 타서 죽이는 방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전정읍시 영원면 지역에서는 야래자에 의해 잉태를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키우는 동안에 가난해서 어머니가 일을 나간 사이에 호랑이가 풀밭에 누워 있는 견훤에게 젖을 먹이는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남원 용마놀이

용마놀이는 남원에서 섣달그믐 또는 정월 대보름에 재앙을 누르고 풍흉을 점치기 위해 편을 나눠 승부를 겨루는 대동놀이다. 용마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기록인 ‘용성지(龍城誌)’에 옛날부터 재앙을 누르고,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위해 용마놀이를 하였다는 대목이 있는데, 고을 이름이 ‘용성(龍城)’이었다. 이 점으로 보아 용과 관련된 지역명이 등장한 백제시대 이후로 그 기원을 추정해 볼 수 있다.남원은 고대 마한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마한의 도읍지였던 달궁(達宮) 마을은 높이가 약 1,000m나 되는 고원 지대에 있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전혀 지을 수 없었던 입지 조건으로 인해 해마다 지리산 상봉(上峯)에 올라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이렇게 기우제를 지낸 까닭인지 용이 비를 몰고 내려와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마한 땅은 백제에 병합됐다. 백제 왕은 남원에 풍년이 들자 고대로부터 용 때문에 잘 사는 고을이라 하여 ‘고룡군(古龍郡)’이라 이름 짓고, 후손들에게는 용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도록 용마놀이를 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용마놀이는 백제시대 이래로 행해진 남원 지역 고유의 민속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