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장님을 고쳐주신 기사이적(요 9:1~11)이 전한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지닌 연못이자 예수께서 장님의 눈에 침으로 갠 진흙을 발라준 뒤에 이 물에 씻게 하여 눈을 뜨게 한 곳이다. 이로써 실로암은 장님이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연못, 어두움을 밝힐 빛을 비쳐주는 신성한 연못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실로암'은 1981년에 신상근목사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이다. 이 곡은 사람들에게 장님이 눈을 뜨게 한 실로암처럼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준 은혜로운 찬양이다.
조선시대 효자 '오준'에 하늘이 감동해 샘을 만들어 주니 그 이름이 '효감천(孝感泉, 전북 기념물)'이니 한국의 '실로암'이다.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는 극진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해서 내려준 효감천이라 불리는 효자 샘이 전해온다. 이는 효를 상징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샘물로 경주 분황사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룡변어정 護國龍變魚井, 경상북도 문화재 재료 제9호로 등록돼 있는 이 석정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
호국변어정 護國變魚井 , 경북 문화재 자료 9호)과 함께 우리나라에 둘 밖에 없는 문화재로 지정된 우물이다.
‘삼룡변어정’은 신라시대부터 사용했다고 전하는 우물이다.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려는 것을 쫓아가 다시 가져왔고, 이후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천 년이 지난 우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물이 차오른다.
조선 중종 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4권에는 효자샘에 얽힌 얘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준(吳俊 : 동복 오씨 세보에서는 吳浚으로 전한다)은 아버지가 종기를 앓고 있는데 입으로 빨았고, 병이 위태해서는 똥을 맛보았으며, 죽게 되니 몹시 슬퍼하면서 예를 다했다. 이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오준(호 감천)은 1444년에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에서 태어나 1494년에 세상을 떠났다. 28세 되던 해에 부친이 등창병으로 백약이 무효하자 3일 동안 입으로 환부 피고름을 빨아냈다. 차차 나아지던 병환이 합병으로 위급해지자 병세를 알아보기 위해 대변을 맛보고 자신의 대퇴부 살을 베어 약으로 바치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끝내 부친을 여의는 슬픔을 당했다. 극진히 예를 다하여 장례식을 마치자 모친이 병환이 들어 눕게 됐다. 지성으로 간호했으나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봉양해 4일간 연명시켰으나 운명하셨다. 부모 섬기기를 최대의 덕목으로 삼았던 조선 유교 사회에서 이 정도의 효자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오준이 효자 명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살아생전 못지않게 시묘살이는 신비한 호구동정(虎狗同庭)전설과 함께 전해온다. 잇달아 부모를 잃은 오준은 묘 아래에 여묘막을 짓고 조석으로 시묘했다. 하루에 죽 한 그릇만 먹고 소금과 간장은 입에 대지 아니하니 온몸에 흰 털이 솟아났다고 한다. 여묘막으로 호랑이가 내려와 집에서 따라온 개와 함께 거했는데 매월 삭망(15일)마다 호랑이는 사슴을 잡아와 제수로 바쳤다. 여묘막 근처에 맑은 물이 없어 5리 밖에 있는 산중턱까지 새벽마다 물병을 메고 물을 길어 나르니 손발이 붓고 터졌다. 마침내 그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해 청천백일에 뇌성벽력이 진동하더니 여묘막 앞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이 소문을 들은 고을 원님이 달려와 인부를 동원해 샘을 돌로 쌓아주고 '효감천'이란 비를 세웠다. 하루는 운이(雲伊)라는 여인이 샘에 와서 빨래를 하다가 벼락을 맞아 즉사한 일이 생기자 효감천은 경외의 대상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어느날 오준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백암 마을(지금의 전남 장성군 북일면)에서 함정에 빠져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상복 차림에 상장을 짚고 새벽길을 30리나 달려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창칼로 호랑이를 죽이려 했다. 오준이 큰 소리로 "내 범을 해하지 말라"하니 마을 사람들이 "당신의 범이면 저 함정에 들어가라"했다. 오준이 함정에 들어가자 호랑이는 주인을 만난 개처럼 꼬리를 치며 반가워했다.
호랑이 등을 타고 여묘막에 돌아오자 이 소식을 들은 현감이 나라에 보고했다. 성종은 통선랑 군자감 직장(通善郞 軍資監 直長)의 벼슬을 내리고 복호(復戶 : 조선시대에 충신이자 절부에게 사역과 밭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일)를 내렸다. 오준이 51세로 죽자 성종은 정려를 내리고 예조에서는 제문을 지어 향사에 모시고 불조전을 명했다.
그 후 유림들이 오준의 효를 추모해 사당을 짓고 사당의 명칭을 의논하던 중에 벌레가 대나무 잎에 창효(彰孝) 두 글자를 새기니 이로 인해 창효사(彰孝祠)라 정했다. 후손들은 해마다 정월 보름과 10월 보름에 제를 지내며 선생을 기린다. 또한 4월 초엿새, 8월 초엿새에는 샘을 청소하며 효를 이어간다.
효감천 뒤편에는 효행에 관한 비석들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다. 이 샘물 뒤편에 효행에 관한 글이 담긴 비석들을 새롭게 단장했다. '하늘이 지극한 효성에 감동 벼락을 쳐 땅을 파서 여막 옆에 샘물이 솟게 하니 효감천이라 한다(天雷湧泉廬下)', '하늘이 효자를 위하여 파준 우물에서 운이라는 여인이 추한 빨래로 샘을 더럽히니 그 자리에서 벼락맞아 죽었다
(雲伊汚泉震死泉邊)', '살아계실때 다하지 못한 효를 돌아가신 후에 묘옆에 움막을 짓고 정성을 받쳐 3년간 효를 다했다(雲伊汚泉震死泉邊)' 등 참고해 볼만한 문구가 많이 있다.
모든 자녀들이 한번쯤 이곳 효감천에 와서 물을 마시고 효를 배워 부모님을 잘 모시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으면 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듯 달력을 주고받으며 서로 복을 빌어 주고 훈훈한 온정을 나누던 우리만의 정겨운 세모 풍습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두루마기 사이로 새하얀 달력을 허리에 끼고 신작로 길을 걸어오시던 아버지의 겨울이 저만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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