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천로는 어떻게 익산 선비로 알려지게 됐나'. 지난 23일 원광대 익산학연구소가 ‘16~17세기 익산 지성사(知性史)의 탐색’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는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젊은 연구자들이 익산 지역 인물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를 다룬 최혜미(강릉원주대 강사)의 발표는 자못 이색적이다. '이야기로 전해오던 차천로의 익산 은거에 대해 살핀 ‘차천로의 삶과 강촌별곡의 의미'가 이어졌다. 편집자
이 발표는 차천로가 익산의 선비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과정, 즉 차천로에 관한 대중적인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강촌별곡''은 조선 전기에 차천로가 관직에서 물러나 전라도 익산에 은둔하여 살 때 지은 은일 가사다. 그는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한다는 상소문을 광해군에게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이이첨일파에게 박해를 받게 된다. 1610년(광해군2)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라도 익산에 피신하여 은둔생 활을 시작하는데, 이때 자연에 묻혀 한가롭게 사는 전원생활을 읊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는 차천로의 말년의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하여 통용되는 대략적인 설명으로 인정된다. 통상 차천로는 만년에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정적에게 박해를 받게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익산에 피신하여 은둔하였으며 끝내 익산에서 별세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발표자는 차천로의 생애와 관련 자료를 살피면서, 차천로의 실제 삶과 익산의 연결 고리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에 착목하였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차천로의 문집인 '오산집(五山集)' 및 당시의 기록에서 차천로의 익산 은거와 관련된 증거를 찾을 수 없고, 만년에는 대체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서 장기간 은거했을 개연성이 낮으며, 이는 학계의 연구자들이 이미 지적한 내용이라고 했다.
발표자는 차천로에 대하여 문헌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 대중적인 지식이 구성된 것은, 1980년대에 진행된 연안차씨(延安車氏)의 차천로 선양사업과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연안차씨 종친회장을 역임한 차익교(車益敎) 회장이다. 그는 차천로가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10여 년 전에 수집가능한 자료를 최대한 동원, 차천로의 삶을 재구성했다. 그러나 차천로에 대한 전기자료가 거의 실전된 상황에서 연대기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생애 마지막 5년은 집안에서 전승된 정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익히 알려진 차천로의 익산 은거설의 거개를 이룬다.
그렇다면 차천로의 익산 은거설은 어떻게 대중적인 통설이 될 수 있었을까. 발표자는 1990년대에 과천과 당진 등 지자체에서 추진된 차천로 관련 향토 문화 사업에서 그 관련성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차천로를 소개하는 지자체의 웹페이지에 학계보다는 문중의 입장을 반영한 차천로의 생애 정보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차천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구성하였고, 마침내 대중적인 통설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 추정하였다. 발표자는 이러한 추적 작업을 통하여, 차천로의 사례가 대중적 통념에 접근하는 학술적 자세에 대해 일정한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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