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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2023.10.14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전북서예 유산의 길을 따라' 답사기행

세계서예비엔날레가 14일 전주와 완주 일대에서 '전북서예 유산의 길을 따라' 답사기행 행사를 가졌다.
제14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지난달 22일부터 22일까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북예술회관 등 전북 14개 시·군에서‘생동(生動)’을 주제로 열린데 따른 행사가.
이에 새전북신문

이종근기자가 2023 세계서예비엔날레 '전북서예 유산의 길을 따라' 답사를 안내했다. 답사코스는 전주객사, 한벽당, 이삼만생가 터 바위 위의 글씨, 비비정, 호산서원 순으로 이어졌다.

△전주객사

전주객사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기록으로는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이규보가 전주목의 관리로 부임했을 때인 1199~1200년 무렵 전주객사를 배경으로 지은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전해지고 있다. 이 기록을 참조하더라도 전주객사는 적어도 1199년(고려 명종 25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동국이상국전집' 제9권에 '전주 객사(全州客舍)에서 밤에 자다가 편협한 회포를 쓰다'를 창작했다.

'남자라면 다같이 고생과 영광이 있건만(一般男子有枯榮)
가슴속에 쌓인 덩이 모두 불평뿐이네(堆阜撑胸意未平)
종일토록 영중에 무릎 꿇고(盡日營中猶曲膝)
날이 새면 창 밖에 나가 스스로 호명하네(五更窓外自呼名)
여러 차례의 광언 눈썹을 지지고 싶고(狂言屢發眉堪炙)
편협한 분개 사라질 수 없어 병이 생기려 하네(褊憤難消癭欲生)
백 가지로 잘못을 찾아보지만 굽힐 수 없나니(百計覓瘢難屈處)
이 마음 길이 물과 같이 맑다오(寸心長共水爭淸)'

중국 주지번(朱之蕃)이 전주 객사의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 보물)’이란 현판 글씨를 썼다고 전한다.‘풍패(豊沛)’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이며, 황제의 고향을 의미한다. 이는 초서체의 호방하고 힘찬 필체로, 가로 4.6m, 세로 1.7m의 크기다. 객사는 왕권을 상징하는 읍성 내 건물 배치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좌묘우사, 左廟右社), 전주의 한 중심에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뜻하는 거대한 편액을 설치했다는 것은 그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 현판은 필자가 국내에서 본 현판 글씨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글씨인 듯 싶다. 북한에 있는 것으로는 평양 금수산에 있는 ‘을밀대(乙密臺)’ 현판 글씨가 아주 크다고 전해진다. 이 편액은 전체적인 장법과 음양의 조화가 서로 어우러진 명품 글씨다. 편액에 대해 오래된 읍지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됐다. ‘명나라 학사인 난우 주지번은 풍패지관이라는 넉 자를 써서 편액하다’

△한벽당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한벽당(전북 유형문화재)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崔霮)이 태종 1404년에 지은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데,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고 하여 ‘한벽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벽청연(寒碧晴煙)’은 ‘완산8경’의 하나로 수려한 풍광으로 이름나 수 많은 선비들이 찾았다.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서 마주보는 ‘한벽당’ 편액은 낙관이 보이지 않는다. 행서임에는 분명하지만 조선시대를 풍미한 조맹부체와 흡사하다. '전라북도금석문대계 6(증보판)'은 이를 쓴 사람이 농천(農泉) 이병희(李丙熙)라고 했다. ‘농천(農泉) 이병희지인(李氏丙熙之印)’으로 판독됐다. 그는 근대 명필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서예가로, 화순 임대정 원림 수륜대와 강릉 선교장 활래정의 주련을 휘호한 바 있다. 누각 안쪽 편액은 김예산(金禮山)의 친필로 9세에 썼다는 ‘의섬김예산구세근서(義城金禮山九歲謹書)’의 낙관이 있다. 강쪽 편액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의 친필이다. 또한 한벽정 동편의 요월대(邀月臺)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친필이다.

△이삼만생가 터 바위 위의 글씨

한벽당의 서쪽 발이산 자락에는 자만동과 옥류동이 자리하고 있다. 자만동에는 조선왕조의 서기가 뭉친 곳으로 목조대왕이 태어난 자리임을 표시하는 이목대비가 있고, 바로 옆에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를 의미하는 자만동금표가 서있다. 옥류동에는 금재사당 옥동사를 비롯,서당인 구강재와 월당최담유허비가 있다.
옥류동 월당최담유허비 바로 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년~1847)의 고택이 있던 자리이다. 창암은 조선후기의 3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이곳 바위 위에 글씨 연습을 하다 잘 써진 글씨는 직접 바위에 새겼다. 취리한중 건곤일월, 수풍(水風), 백화담, 연비어약, 옥류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땅속에 매몰되거나 유실된 것도 있다.


△비비정과 호산서원

완주군은 비비정(도 문화재) 안내 표지석에서 ‘조선 선조 6년(1573)에 창주첨사(昌洲僉使) 최영길에 의해 창건됐고, 그 후 영조 28년(1752)에 전라관찰사 서명구에 의해 중건됐다. 현재 편액은 강암 송성용(1913-1999)이 쓴 것이고, 애초 송시열이 쓴 비비정 편액과 비비정기 원판은 현재 임실 비비정에 걸려 있다. 용맹한 장비(張飛)와 충성스럽고 효성이 극진했던 악비(岳飛)의 뒷글자 비(飛)를 따서 비비정(飛飛亭)이라고 했다. 바로 옆 호산서원은 만경강과 호남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아주 멋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호산서원 편액은 유재(裕齋) 송기면(1882~1956)이, 비비정 아래에 ’호산청파(湖山淸波)‘ 글씨는 석각으로 송시열이 썼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