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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김조순의 만마관 신축기(萬馬關 新築記)

김조순의 만마관 신축기(萬馬關 新築記)

'맹자'에 이르기를, "*나라를 견고히 하되 험준한 산과 계곡만 의존하면 안 되고, 천하를 두려워하게 하되 예리한 병기만 믿으면 안된다" 고 했다. 그렇다면 성은 과연 없어도 되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왕과 공이 험함을 만들어 그것으로써 그 나라를 지킨다" 
고 했다. 그렇다면 성은 과연 없어서는 안 되는가? 산과 계곡은 하늘이 만들었는데도 오히려 견고하지 못하거늘, 이른바 성이라는 것은 사람이 설치한 것이니 또 어찌 험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록 천하에 전쟁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전쟁을 한다면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성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고, 황제와 우임금 이후로 몇천백 년 동안 나라가 있으면 없앨 수 없었던 이유이다.
전주부 남쪽 40리에 '만마(馬)'라는 골짜기가 있으니, 계곡 가운데가 만 마리의 말을 수용할 만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땅이 매우 험해서 한 명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으로도 관문을 열 수 없으니, 만막(萬莫)이 옳다”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 보았는데, 마와 막은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 그러니 만마를 만막이라고 한 것은 *하마릉(下馬陵)을 하마릉(蝦螞陵)으로 잘못 전한 것과 같다.
그 산세는 빙 둘러 사방이 막히고 남북 쪽으로 오직 한 갈래 길이 있는데 산봉우리가 아주 높이 치솟아 원숭이도 건널 수 없을 정도다. 그 꼭대기는 조금 평평하면서 넓어 주위가 족히 10여 리는 된다. 샘이 솟고 초목이 무성하니 성을 쌓아 지킬 만하다. 전주부의 치소(治所)는 영남과 호남이 네 번의 전투를 치른 곳에 있는 바, 의지할 만한 험준한 곳이 없는 지형이다.
그래서 부민(府民)은 항상 이 계곡에 성을 쌓기를 원했고, 예로부터 부임해 지킨 방백(方伯)과 연수(連帥)들도 성을 쌓는데 뜻을 두지 않은 이가 없었지만 끝끝내 이루지는 못했다.
금상(순조) 경오년(1810)에 동어(桐漁) 이상황(李相璜) 공이 이 번방(藩邦)에 관찰사로 부임했다. 이때 새로 대기근을 겪었으므로 죽거나 도망간 백성이 반반이나 된데다가 공사(公私)가 온통 피폐해져서 갖은 병폐가 다 드러났다. 
하지만 공은 이곳에 이르러서 두려워하지 않고 해이하지 않았으며 온화하면서도 일에 두서가 있었다. 그후로 얼마 있다가 지역을 순행할 때 이 계곡을 지나며 빼어난 경치를 두루 보고 말하기를, "여기가 옛사람들이 논의는 했지만 미처 축성할 겨를이 없었다는 곳이런가. 국가가 태평한 지 오래됐고 이 고을은 영남과 호남의 요충지이다. 변고가 없으면 그만이지만 변고가 생긴다면 부성(府城)은 의지할 만하니,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믿을 곳이 없는 것보단 일이 발생하기 전엪미리 예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곧 '편부(便否)에 대한 열 가지 방책을 갖추어 막부의 장리(將吏)와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모여 의논했더니 이견이 없었다. 이에 일을 생각하고 공력을 생각해 감독관에게 명령하기를, "이 일은 큰 역사(役事)인 만큼 일시에 이루려고 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마침내 봉급을 내놓고 재력을 배분해 1년 여에 성을 쌓을 계획을 세웠다. 이미 또 말하기를, "병사가 없고, 양식이 없으면 수성(守城)할 수 없다" 라고 했다.
이윽고 병정을 모집하고 병기를 제공하는 한편 창고를 건설해 산꼭대기에 곡식을 옮겨두는 계책을 자세히 정해 조정에 청하니 전주 부민이 매우 기뻐했다.
 축성을 시작하고서 공은 돌아갔고, 2년이 지나 성이 완성되어 우뚝 솟아 남쪽의 큰 보장(保障)이 됐다. 
이에 전주부의 사람들이 다 징험할 만한 것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공에게 계속 글을 청했다.
공이 나에게 기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고서 또 말하기를, "과장된 말이 없도록 해주시게" 라고 했다. 오, 공은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리라.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천만 사람들이 원하던 일을 한 사람이 결단했고, 수백 년 동안 서두르지 못하던 일을 하루 아침에 시작했으니 공은 비록 자랑하지 않고자 해도 사람들이 그 공적을 적게 여기겠는가.
한 번 논해보겠다. 
지형이 험한 곳에 또 성을 쌓고 높은 성에 또 곡식을 쌓아두어, 태평한 시절은 백성이 그곳을 우러러보며 믿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백성이 그곳에 거처하며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는 *지리(地利)라고 일컬을 만하다. 
성을 쌓을 때는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축성한 후에는 백성이 함께 기뻐해, 힘은 퍼지고 마음은 견고해지니 인화(人和)라고 일컬을 만하다.
인화라는 것은 성이 없어도 가능한데, 더욱이 천예의 험지에 다시 성을 쌓았음에랴. 이 일은 한 번 거행되자 지리와 인화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니, 이 일을 미루어 말하면, 공은 저절로 '주역'과 '맹자'의 뜻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과장하여 말하겠는가. 

 *나라를...된다 : '맹자'의 '공손추'하편에서 인용했다.

*왕과... 지킨다 : '주역'의 '감괘(坎卦)'에서 인용했다.

*하마룽(下馬陵)을…전한': 하마릉은 장안의 남곡강 근처에 있다. 원래는 이곳에 동중서(董仲舒)의 묘가 있어 그 제자들이 여기에 이르면 모두 말에서 내렸으므로 '하마릉'이라고 했다. 그런데 후인들이 이를 하마릉(蝦螞陵)이라고 잘못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地利)라고...일컬을 만하다: 성을 쌓을 때는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축성한 후에는 백성이 함께 기뻐해, 힘은 퍼지고 마음은 견고해지니 인화(人和)라고 일컬을 만하다.(天時地利人和 , 天时地利人和 )
하늘이 준 때, 지리상의 이로움, 사람의 화합. 하늘이 준 때는 지리상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상의 이로움은 사람들 사이의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했다. 하늘이 준 때는 지리상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상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3리 되는 성(城)과 7리의 곽(郭)을 에워싸고 공격하나 이기지 못할 때가 있다. 에워싸고 공격할 때는 분명 천시를 얻었겠지만,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시가 지리의 이로움만 못해서이다.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못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굳고 날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식량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닌데도 내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은 지리의 이로움이 인화만 못해서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나라 안에 살게 하는 것은 국경을 굳게 봉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나라를 굳게 하는 것은 산과 골짜기의 험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며, 천하를 위압하는 것은 무기의 날카로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를 얻은 사람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많고, 도를 잃은 사람에게는 도와주는 사람이 적다. 도와주는 사람이 극히 적은 경우에 이르게 되면 친척도 배반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극히 많은 경우에 이르게 되면 천하가 귀순하게 된다. 천하가 순종하는 것으로써 친척에게까지 배반당하는 사람을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싸우지 아니하지만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孟子曰,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三里之城, 七里之郭, 環而攻之而不勝. 夫環而攻之, 必有得天時者矣. 然而不勝者, 是天時不如地利也. 城非不高也, 池非不深也, 兵革非不堅利也, 米粟非不多也. 委而去之, 是地利不如人和也. 故曰, 域民不以封疆之界, 固國不以山谿之險, 威天下不以兵革之利. 得道者多助, 失道者寡助. 寡助之至, 親戚畔之. 多助之至, 天下順之. 以天下之所順, 攻親戚之所畔. 故君子有不戰, 戰必勝矣.)」

이 이야기는 '맹자(孟子)의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나온다.
 ‘천시’란 어떤 일을 이루게 해 주는 유리한 때를 말하는데, 전쟁의 경우에는 작전을 개시할 유리한 시간을 말한다. ‘지리’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는 것을 말하며, ‘인화’란 민중의 단합된 마음을 말한다. 맹자의 이 이야기에서 도를 얻은 사람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많다는 뜻의 ‘득도다조(得道多助)’도 나왔다.
‘천시지리인화’는 다음의 전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이 준 때와 지리상의 이로움과 사람의 화합, 이 세 가지를 얻지 못하면 비록 전쟁에서 이긴다고 해도 재앙이 있게 된다.(天時地利人和, 三者不得, 雖勝有殃.)」('손자(孫子)' '월전(月戰)')

이 문장은 1814년(갑술년) 2월에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그는정조가 사후 나이어린 왕세자(순조)의 보좌를 특별히 부탁할 만큼 총애했던 신하였다.
정조가 죽고 왕세자가 임금이 된 후 1802년(순조 2년)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정을 주도했다. 19세기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조순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단풍나무 1000여 그루를 심고 스스로 ‘단풍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풍고(楓皐)’를 자호로 삼았다.
단풍나무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유독 궁궐에 많이 심어졌기 때문에 ‘풍금(楓禁)’, 즉 ‘단풍나무가 많지만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역(禁域)’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궁궐을 상징하는 나무였다고 한다. (도움말 전주시와 전주문화연구회의 국역 '풍패집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