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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채용신의 평생도 2폭과 5폭을 보니

지금 나는 어디에서 '평생도'를 그리고 있나. '평생도'는 조선 시대 양반 관료들이 걷고 싶었던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하나의 본보기로 담겨 있는 그림이다. 요즘 유행하는 '인생네컷'처럼 인생을 10개의 병풍으로  그린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의 '평생도' 병풍에서 감명을 받는다.
국립전주박물관은 10월 29일까지  ‘아주 특별한 순간 - 그림으로 남기다’전을  갖는다. 전시 마무리는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가 채용신이 10폭 병풍에 담은 ‘평생도’다.
일흔이 넘은 채용신의 머릿속에 눈부시게 찬란했던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상경해서 태조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은 그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순간을 대대손손 남기고 싶었으리라. 채용신은 무과출신 관료이면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제작 총괄하는 주관화사를 역임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전북 지역과 인연이 깊다. 조상 대대로 전북 지역에서 생활했고, 낙향 후에도 전주와 익산, 정읍 등에서 화실을 열고 활동하는 등 지역 인물들의 작품을 남겼다. 고종의 어진 제작 후, 고종이 직접 변산의 채석강에서 유래해 ‘석강(石江)’이라는 호도 선물했다고 하니, 채용신과 고종의 관계가 각별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평생도'는 1924년 경의 작품이다. 그는 직업화가답게 초상화 외에도 고사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기록화 등 화목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주문에 응했다.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를 설립, 이곳에서 아들, 손자의 도움을 받으며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생도'는 그의 실제 일생이 시간 순서에 따라 잘 시각화돼 있다. 제1폭은 8세 무렵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아 글공부를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입학도’이다. 제2폭과 5폭에 전북 관련 내용이 나온다.

제2폭은 31세(1880년)에 치른 혼례 모습을 그린 ‘혼례도’로 교배례(交拜禮) 순서가 그려졌다.

(2폭) 婚禮圖

公之聡明才藝聞於四境 納幣願聘者不知其數. 竟結緣於(完山)李氏家卽古碧堤郡也.

혼례를 올리다

공의 총명함과 재주가 사방에 알려져 예물을 보내 사위 삼으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마침내 완산 이씨와 결혼하였으니 집은 옛 벽제군(碧堤郡,지금의 전북 김제)이었다.

31세인 1880년, 채용신은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신부의 집은 벽제군(지금의 전북 김제)이었다. 가마니가 높게 쌓여 있는 모습으로 보아, 부농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평생도 속 혼례 이미지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행렬을 그린 것이 많은데, 채용신 평생도 속 혼례는 이미 말을 타고 도착한 후 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배례를 그리고 있다. 마당에 흰 천막을 치고, 병풍 2좌를 서로 겹쳐져 ㄷ자로 둘렀다. 하나는 10폭 산수화, 다른 하나는 8폭 화조화 병풍이다. 흔히 혼례에는 모란도병풍이 사용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병풍은 모란은 아니고, 새 두 마리가 괴석과 함께 등장하는 화조도로 보인다. 그 앞에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신랑과 신부가 그려졌다. 대문에서 신랑을 맞이하는 행보석(行步席, 손님, 신랑을 맞이하는 좁은 돗자리)이 탁자에 이르기까지 깔려 있다. 청사초롱과 촛불을 밝힌 것으로 보아 혼례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은 저녁이다. 원래 혼례는 저녁때 하는 것이라 그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몸을 청결히 한다는 의미에서 손을 씻고 자리에 임하는 의식을 위해 준비해 놓는 세숫대야와 수건이 그려져 있고, 닭과 기러기가 보자기에 싸여 소반과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등 혼례에 필요한 용품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문밖에는 신랑이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흰색 말과 마부들이 휴식하고 있고, 둘러 앉아 손에 여러 개의 기다란 종이를 들고 투전(鬪牋) 민속놀이를 즐기고 있다. 또한 나무 울타리가 둘려져 있는 마을의 공동 우물이 채용신의 부인 전주 이씨 집 대문 밖에 그려져 있고 그 곁에 두레박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



(5폭) 寫御容圖

庚子春拜命中樞院議官 在職壹年. 其歲奉御命 敬寫太祖高皇帝聖貌於興德殿中,上愛益重之 屢蒙 金玉之恩典. 聖上與東宮殿下立於左 右丞相尹容善立於公前 於是公揮筆如神 滿朝皆大驚

어진을 그리다

제5폭 ‘사어용도(寫御容圖)’는 50세(1900년) 때 경운궁 흥덕전에서 태조 어진을 모사했던 일을 재현한 장면이다. 고종과 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채용신은 왕의 얼굴 묘사에 여념이 없고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보이는 사람들이 곁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 많은 관료와 호위군관이 모여 있고 문밖에는 고종과 순종이 타고 온 가마가 대기중이다. 태조어진 모사는 그가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크게 얻은 계기가 되었던 이력으로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경자년(1900년, 51세) 봄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어 1년간 재직했다. 그 해에 어명을 받들어 흥덕전에서 삼가 태조 고황제의 어용(御容)을 그렸다. 황제는 (공을) 아끼고 더욱 소중히 여겨 여러 번 금옥을 하사하는 은전을 내렸다. 황제와 동궁 전하가 좌우에 서고 승상 윤용선이 공의 앞에 섰다. 이에 공이 귀신같이 붓을 휘두르니 만조백관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채용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진을 그렸던 순간이리라. 궁중 화원으로 활동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51세의 나이에 어진을 그렸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이후,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전북 지역으로 내려와 전업 초상화가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1899년 12월 31일에 이근명이 상소해 황제 즉위 후 고종의 정통성이 확립되려면 경운궁 선원전에 태조 어진을 봉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종은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이모하라고 지시했다. 1900년은 조경단 조성과 더불어 태조 어진 모사를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태조 어진을 그린 것은 경운궁 흥덕전(興德殿)에서였다. 1900년 3월 22일, 영정모사도감 도제조 윤용선(尹容善)은 조석진(趙錫晉)과 채용신으로 하여금 모사할 것을 보고했다. '이번 음력 3월 23일 신시에 영정을 내온 다음 화사 조석진, 채용신으로 하여금 모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석진은 당시 궁중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채용신에 대한 그 무렵 궁중화원 활동 기록은 없다. 당시 채용신은 전주에서 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작품은 거의 없지만, 당시 채용신을 추천하는 기록에 '全州畫員 蔡龍臣'으로 불리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전라도관찰사에게 칙서를 내려 일이 지체되는 폐단이 없도록 전주군에서 노자를 지급해 속히 채용신을 서울로 올려보내달라고 했던 기록을 보면, 채용신은 당시에 전주 관아에서 고용한 정식 화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채용신이 전주에서 올라올 때는 노비 한 명을 데리고 왔고, 왕실에서는 채용신이 어진을 그리며 연고가 없는 한양에서 생활하면서 드는 기름과 땔감, 양식과 찬거리 등에 대해 비용을 계산하여 지급하고자 의논했음을 알 수 있다.
'경자년 정월 초 10일 전주 화원 채용신이 다시 노비 한 명을 데리고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이 사람은 서울에 사는 사람과 달라 일을 마칠 때까지 양찬(糧饌, 양식과 찬거리)을 이에 맞춰 지급하려 하온데, 등유는 매일 오석 씩, 온돌의 땔감은 반 단씩 선례에 따라 내려주고 화원의 시재(試才) 시 주는 양찬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일체를 돈으로 마련하여 내려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방 소속 화원이었던 채용신을 어진 모사 작업에 추천한 것은 의정부 찬정 민병석이었다. 그는 1899년 12월, 태조 어진 모사를 주관할 화사로 채용신을 추천했다. 자신의 상을 비롯, 김성근, 홍순형의 상을 그렸는데 보는 사람들이 감탄을 했기 때문이다. 태조 어진을 그리는 장면에는 수 많은 인파들에 둘러싸여 있는 채용신이 보인다. 당시 어진을 그렸던 장소는 경운궁 흥덕전으로, 북쪽에 일월오봉도와 화조도 병풍이 그려져 있고, 그 앞쪽에 채용신이 사모에 녹색 관복을 입고 서쪽을 바라보고 앉아 붓을 들고 홍룡포(紅龍袍)를 입은 태조 이성계를 그리고 있다.
면류관을 쓴 고종과 순종이 가까이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 옆에는 금관조복을 입고 홀을 든 인물들도 함께 지켜보고 있다. 채용신처럼 몸을 숙이고 어진 주변에 앉아 붓을 들고 있는 인물들은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화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용신 뒤의 2명, 왼쪽의 2명 등은 손에 붓을 태조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채용신은 넓은 판자 위에 올라가서 어진을 제작하는 이러한 환경은 1928년 김은호가 순종 어진을 모사하는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어진을 그리는 중인 김은호와,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어진을 그리는 중인 채용신은 비교가 된다. 어진을 그릴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채용신이 어진을 그린 것은 1900년이고, 평생도 속에 그 순간을 기억해서 그린 것은 이미 20여년이 지난 1924년경이었다. 아마도 일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순간을 그리면서 다소 과장하여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주목되는 또 한 가지는, 서양식 검정색 군복을 입은 우리나라 신식 군대 뿐 아니라 민머리로 그려진 일본군도 같이 그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경운궁을 지키던 일본군의 모습이 화면 가장 아래에 그려졌고, 총을 대열한 모습, 내부 구조까지 상세하게 묘사된 가마와, 가마를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쉬는 가마꾼들의 모습까지 경운궁 흥덕전에서 어진을 그리던 날의 주변 상황도 자세하게 표현됐음을 알 수 있다. 평생도에는 조선 사회에서 양반 관료들이 추구했던 꿈과 열망이 그대로 집약돼 있다. 좋은 집안에서 출생하여 가족의 축하 속에 돌을 맞고 무난히 과거급제하여 청요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한 번쯤 지방에서 수령 생활을 한 뒤 당상관에 오르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고의 관직인 정승을 지낸다면 관료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번성한 자손을 거느리고 회갑이나 회혼례를 치를 수 있다면 더없이 축복받은 삶을 산 것으로 칭송받았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찬란한 순간과 멋진 풍경이 화가의 붓을 통해 재탄생했고, 한 여름날 음식을 나누어 먹기 위해 모인 선비들의 만남도 그림으로 남았다. 왕실에서도 뜻깊은 행사들은 글뿐 아니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겼다. 의미 있고 특별한 순간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거쳐온 모든 곳이 내게는 신성한 장소였고 거기서 행복의 꽃이 피어나고 생명나무가 자라났다. 사람들이 인생을 숙제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숙제 같은 인생을 축제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나는 어디에서 '평생도'를 그리고 있나./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