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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사람들

이복수, 원로화가의 애정이 벽화 되살렸다

이복수, 원로화가의 애정이 벽화 되살렸다
2001-08-25     임용묵

국보급 평가를 받았지만 69년 보수공사와 86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됐던 금산사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벽화 ‘백의관세음보살상’이 최근 복원돼 세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적광전 벽화 ‘백의관세음보살상’은 1928년 일본 평범사(平凡社)에서 발간된 ‘세계미술전집’에 소개될 정도 미술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 이 전집 제23권 88쪽에는 벽화 사진과 함께 “금산사 대적광전내 진후면벽(陳後面壁)의 배면에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소위 오도자(중국 唐人)풍의 주의(晝意)를 따른 것으로 필력이 대단히 웅건하고 생동감 넘쳐 현재 조선조 불전의 벽화중에는 이 그림에 비할만 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또 “강희년간(康熙年間·숙종, 1600년대)초에 건물과 동시에 그려진 것”이라고 제작연대를 추정했다.

 

조선시대 최대 걸작으로 꼽혔지만 보수공사와 화재로 소실됐던 금산사 벽화가 다시 밝은 햇빛을 보기까지는 서양화가 이복수씨(80)의 벽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 덕분이었다.

 

이씨는 벽화가 파괴되기 7년전인 지난 62년 금산사에 머무르며 가로 세로의 크기가 2.8m, 3.2m에 달하는 대형벽화를 드레싱페이퍼에 실물크기로 옮겨두었다. 이씨는 또 벽화 파괴후 관세음보살상 그림의 잔영들을 사진으로 촬영, 보관해 왔다는 것.

이씨는 미술사적 가치가 큰 관세음보살상 벽화를 복원해야한다는 생각에 지난 98년 9월 작촌 조병희선생 집에서 금산사 주지 도영스님을 만나 36년간 복사본과 자료사진을 건네줬다.

“62년 처음봤을 때 대형임에도 그림의 선이 거침없었고 구도상 균형이 완벽한 걸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아 곧 없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흘간 절에 머무르며 벽에 종이를 대고 본을 떴어요”

이씨는 이 벽화가 보존돼 있을 당시 금산사를 찾는 불자들이나 관광객들이 이를 보고 무두 감탄했으며 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쳐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가의 혼이 담긴 역작을 그대로 다시 그려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그나마 원 벽화에 기초한 백의관세음보사살 그림이 복원돼 기쁠 따름입니다. 오늘에야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 한 자부심도 갖게 됐어요”

 한 노화가의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벽화에 대한 애정과 복원에 대한 열정이 백의관세음보살상이 40년만에 제자리를 찾게 한 셈이지만 미술계에서는 이 그림이 옛 원형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해 미술적 가치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전북일보 2001-08-25     임용묵>

도내 서양화단의 원로, 이복수 선생 타계
 
도내 및 한국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자임해온 원로 화가 이복수 선생(전주 인후1동)이 향년 82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평소 지병을 앓아온 선생은 2004년 10월 24일 새벽 전북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지난 69년 전라북도 미술협회 제 3대 부지부장을 역임한 선생은 이듬해 제 2회 전라북도 미술대전 서양화 부문 은상을 수상하며 또렷한 작품세계를 세상에 알렸다. 특히 그는 76년 11월 화필을 잡은지 35년만에 첫 개인전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83년 2회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처럼 선생은 쉽사리 개인전을 열지 않았으며 한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 심혈을 기울이곤 했다.
그의 탄탄한 서양화풍은 지금까지 후배 작가들에 의해 맥을 잇고 있으며 인자한 성품 역시 후배 작가들에 의한 외경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50년 전북 재전미술 동호인을 창립할 정도로 애향심이 남달랐던 선생은 한국예총 회장 미술공로상과 전주시 문화예술상, 제 9회 목정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금산사 대적광전의 벽화 역시 선생의 작품. 
계속된 투병생활 속에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은채 작업을 계속해온 선생은 도내 원로작가들로 구성된 상촌회 회원전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현재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상촌회전에는 선생이 생전에 남긴 작품 ‘풍경’이 전시중이며 그 작품이 고인의 일생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선생의 빈소는 전북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9시, 장지는 전주시 화신공원 묘지. 유족으로 영태(화가), 영일, 영모씨 등 3남이 있다. 연락처 011 9643-4377.

전북도민일보 강영희기자  2004.10.24 15:47 

 

전북, 현대 회화사의 산 증인 이복수 화백의 미술 세계

이용엽(향토사학자)

 
생애사

이복수(利福洙, 1922~2004) 화백은 완주군 고산면(당시는 고산군 남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으나 어려서 일찍 모친이 작고하면서 전주에 살고 계시는 조부(이순재, 李順載, 1869~1943) 댁에서 자랐다.

조부는 한학자로 전·예·해·행·초서에 능하여, 전주향교의 ‘명륜당 중수기’를 썼고 전주초등학교(전주보통학교) 강당 앞에 있는 김도흥의 선덕비 등을 썼다. 1992년 8월 2일 〈강암서예관〉에서 열린 <전북서화 어제와 오늘 전>에 10폭 병풍을 출품 전시한 바 있어 도내에서 널리 알려진 서예가였다.

이복수 화백은 이런 조부님 밑에서 먹을 갈아주고 글씨 공부를 하였다. 전주제일보통학교(현 전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에 작은아버지가 살고 있어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 낭화(郎華)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상업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미술(서양화) 수업에 흥미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서화에 소질이 있어 할아버지로부터 글씨를 배웠기 때문에 학교에서 미술 수업에 열중하여 미술을 시작했으나 당시의 스승이 누구인지 자세히 밝혀진 게 없다. 그러나 이복수 화백 미술의 바탕은 평생을 글씨에 심취하였던 조부의 영향으로 서양화의 수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942년 일본에서 낭화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와 전매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전매청에는 천칠봉(전주북중 졸업 후 동광미술연구소에서 유화 공부를 하고 후에 박동순의 영향을 받은 사실풍의 서양화가)과 같이 근무하였다. 동갑내기 친구인 허병(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전북도청 근무)과도 자주 만나 스케치를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필자는 야외 스케치를 하면서 많은 사진을 촬영하다 보니 미술인들의 기록사진을 많이 촬영하면서 전북회화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작촌 조병희 선생(시인이며 향토사학자) 댁에서 전북회화사에 많은 자료 수집과 연구를 하신 이복수 화백을 작촌 선생의 소개로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자주 접촉하면서 이복수 화백의 전북회화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많은 미술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전북미술의 역사를 널리 알게 되었다.

당시 전북미술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중이었는데 서화의 자료는 어느 정도 정리한 상태였으나 서양화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 고민하던 중이라 어려운 현실을 의논하니 이복수 화백께서 그동안 수집한 해방 이후 도록 등 각종 수집 자료들을 모두 전해주면서 정확한 〈전북미술사〉를 정리해 달라는 격려도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후 이복수 화백이 전해준 자료는 전북도립미술관 개관 시 기증했다.

이복수 화백을 자주 만나 전북미술사(서양화)에 대한 문의를 하면 상상도 하지 못한 미술의 이면사를 폭넓게 말씀해 주셨다. 그중 김제 금산사에 있는 대적광전 벽화와 관련하여 직접 그 벽화의 본을 떠서 보관하고 있으며, 그 벽화가 소개된 일본 평범사 발간 〈세계미술전집〉 잡지를 보내주면서 설명해주어 전북의 새로운 회화사를 알게 되었다. 이 벽화는 세계적인 명화로, 국보로 지정되기 직전 보수공사에 부주의로 파손되고 그 파손 부분을 수습하여 이불로 덮어 놓았으나 그 후 또 화재로 완전 소멸되었다. 이 화백은 이 벽화가 미술전집에 소개된 것을 보고 흙벽이라 후일을 대비하여 본을 떠서 보관하고 있었고, 나중에 이 벽화의 복원에 벽화본과 자료 일체를 사찰 측에 기증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일화도 듣게 되었다.

해방 전후 전북의 회화사

이복수 화백은 서양화가 이전에 전북미술사의 숨은 연구자였다. 그로부터 전해들은 전북서양화의 근원을 정리해본다.

일제강점기 소화 18년(1943년 9. 30.)에 ‘제1회 전북회화보국전람회’ 명칭의 공모전이 개최되었다.(당시 특선, 최고상에 서양화의 전영래(전주사범)가 수상자라는 사실은 당시 ‘특선 상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동양화에서는 나상목이 특선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제1회 전북회화보국전람회’(약칭 도전)는 전라북도지사가 수여한 상장이 유일한 기록인데 상장에는 전북지사와 심사위원 연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도전의 공모 내용이나 제반사항은 전해오는 자료가 없어 이 도전은 1회로 끝난 것으로 추정되나 총독부 지시로 각 도에서 시행한 전람회인지 아니면 전라북도에서만 도지사가 회화 부문에 관심이 있어 자체 계획으로 시행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전주에서는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영목천구마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임실 부호의 아들 박병수가 전주 고사동에 전국에서 제일가는 화실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미술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함께 어울렸던 김영창(전주사범학교 졸업 후 1931년)이 선전에 입선하고 일본에 건너가 ‘영목천구마 회화연구소’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박병수와 뜻을 모아 ‘동광미술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일제 유산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반성 아래 이를 탈피하고 새로운 결의를 해서 창작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의혹으로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된다.

1945년 10월 해성학교(현 성심여중)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제1회 동광미술전람회’를 개최하여 해방을 맞은 이 지역 미술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전북화단은 1941년 9월 해방 후 최초로 ‘제1회 전북미술전람회’가 미국 공보관 콘센트 건물에서 개최되었다. 주최나 주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고, 다만 양규춘의 글(중앙대 대학원 석사논문)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나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전주에서는 1946년 4월 20일 녹광회가 창립되면서 도내 최초의 그룹 활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참여자는 김용봉(회장), 김영창, 허병, 이의주, 최칠우 등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창립전 1회로 마쳤다.(이복수 화백의 기록에서)

동년 대한민국 국전이 개설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던 선전이 관전으로 미술의 동용문이 되었다. 1945년 8·15 해방으로 한동안 중단되었으나 대한민국이 수립된 다음 해에 국전이 개설되었다. 선전 출신이 주로 주관하는 국전이었다. 이 국전 창립전에 이 고장 출신 유경채(전주사범) 씨가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50년 3월 1일 전주에서는 ‘재전 미술동호인 합동전’이 열렸는데, 전주시 고사동 ‘카멜클럽’에서 김용봉, 하반영, 이경훈, 이복수, 이병하, 천칠봉, 문윤모 등이 7인전을 열었다. 얼마 후 6·25사변으로 모든 예술 분야는 해체되고 말았다.

1928년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서 이순재(1904~1988)가 선전 양화부에 「이른 봄」을 출품하여 도내에서 최초로 입선을 해 이 지역에서 서양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어서 8회, 10회에도 입선하였다.

그는 1925년경 학적부 소실로 확인 불능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동년에 동경 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동광신문’과 ‘전북일보’에서 삽화를 그렸으나 ‘동광신문’이 폐간되자 도청 총무과 촉탁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김영창(1910~1980)이 10회(1931) 선전에 입선하면서 서양화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 지역 서양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농업 위주의 조선왕조 붕괴로 도시 공업화를 통환 근대화가 일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환의 시대를 맞아 선구자들은 주로 동경 유학이라는 풍토를 거쳐 양화를 공부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는 중앙 화단과는 또 다른 ‘호남화파’라는 예술적 온상 위에 1900년대 초 전북인에 의한 양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25년 전주고보(현 전주고)에 일본문전 입선 작가인 삼린평(森麟平, 모리린빼이)이 부임되었다. 이는 전주는 전통회화가 뿌리 깊은 도시라 일본 정부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일반 미술교사가 아닌 전문 중견작가를 배치한 것으로 사료된다.

1928년에 전주여고보(현 전주여고)에 불란서 유학파인 ‘대진일자’가 부임하면서 전통회화를 벗어난 양화라는 새로운 문화가 유입된다.

1937년에는 전주사범학교에 복택광(卜澤廣, 우리지아 히로시)와 이등정명(伊虅正明, 이도 마사아끼)이 부임하면서 새로운 미술학도를 배출하여 이 지역에 양화의 뿌리가 정착하게 되면서 전통회화보다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통회화는 일대일 개인지도 방식인 데 반해 양화 교육은 한 학급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교육을 시키며 특히 사범학교 수업은 곧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수업이었으므로 사범학교 수업을 통해 양화는 전 도내에 보급되었다.

그 외에 해방 전까지 일본에 유학한 전북 작가와 이 지역에서 전주고보 및 전주여고보, 전주사범의 미술교사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은 작가들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서양화의 붐을 일으킨 신상미술회

1954년 6월, 동경제국 미술학교 출신의 이경훈이 주축이 되어 서양화의 창달과 저변 확대를 도모하는 취지에서 신상미술회(神像美術會)를 창설하였다. 전주에서는 두 번째로 설립된 이 신상미술회의 회장에는 이경훈이 추대되고 김용봉, 천칠봉, 권영술, 이복수, 이병하, 김용구, 문윤모, 김현철, 한소희 등 10명의 회원이 있었다.

전주 미국문화원에서 문총 전북지부, 미국문화원 등의 후원으로 창립전을 열고 계속해서 매년 1, 2회 전시를 함으로써 신상미술회는 명실공히 전주에서는 최초로 서양화 붐을 유발시키는 그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6·25 휴전이 성립되던 다음 해인 1954년 6월에 전주에서 신상미술회가 드디어 발족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정열적이고 패기가 넘쳐흐르는 작가 이경훈 화백이 주동이 되어 이 고장 전북에 거주하는 작가들로서 휴머니즘적이며 오리지널 적인 순수성을 지닌 작가들로 조직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이 지난 일로 새삼 격세지감의 감회가 없지 아니하나 이는 당시 이경훈 화백의 열정적인 주선으로 구성된 것이다.

당시의 전주 번화가 풍남백화점 거리에 미국문화원이 있었는데 당시 문총 주최로 전북일보와 삼남일보사 후원으로 ‘제1회 창립전’이 개최되었다. 보잘것없는 낮은 양철 콘센트집이었다.

전주에서도 몇 안 되는 단체로서 도 공보부나 문총에 등록된 유수한 조직이었다. 이들 작가들은 소위 전전(戰前)파로서 일제 식민지 미술교육의 구상적 표현의 표방에 바탕을 두어 자기표현에 충실한 작가들이며, 순수한 일본인 작가들의 양심적 모랄의 영향을 받아 거짓이나 과장된 표현 내지 허식된 작업을 기피하는 작가들이라 인정된 것이다.

창립전이 1954년 6월에서 1960년 8월 제10회까지 지속해 오다가 시대의 변천과 각자의 생활 근거지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난점으로 잠시 중단 사태에 빠진다. 그러한 이유로 신상회 전시는 6, 7, 8회는 도록이 없이 전시하고 10회 전시가 마지막 전시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간 회원들이 헤어져 살면서도 항상 회원전을 지속하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고 기회를 모색하고 있던 차에 작고한 김현철 화백이 와병 중이면서도 기필코 재개전을 열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추진되어 회원들을 재정비 보강하여 신화원·홍승표·박민평·김춘식·이동근이 전병하 화백이 경영하던 ‘비사벌 화랑’에서 1979년 9월에 제13회 합동전을 개최하였다. 재회전을 열면서 새로운 회원들과 더불어 다시는 중단하지 말자고 각자가 선서하기도 하고 서로 격려도 했지만 자연의 섭리 앞에 어쩔 수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전북도가 어느 지역 못지않게 조형예술의 발달을 가져온 근원의 하나로는 일찍이 이러한 선봉적인 작가들이 후배들에게 올바른 심미의식을 심어 그 뿌리를 내리게 한 연유라고 본다.

기성작가를 제치고 국내의 화단에서 인정받고 있는 신진작가들이 전북이 낳은 비중은 큰 것이다. 그들이 권위와 자부로서 자존심을 찾기에 앞서 선배들의 그런 밑거름이 없었던들 오늘날의 그 영광이 어찌 존립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성할 일이다.

한국동란 3년을 겪은 후로 모든 분야가 다르겠지만 특히 예술하는 사람처럼 역경 속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절실히 느끼는 족속은 없을 것이다. 온 한국의 화가들이 똑같이 먹을 것이 없고 방이 없고 제작자료까지 없는 데서 작품은 나온다고 한다. 제3자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곤란의 계속 가운데에서 그들의 제작은 하나의 무서운 투쟁이요, 험난한 현실과 맞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중앙 화단에서 그러하듯이 재전 화단에서도 엿볼 수 있는 예술 분야에 있어서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여러 세파적인 분쟁과 잡음을 청산하고 회화 예술을 한다는 본질적인 문제에서부터 새출발하겠다는 의도하에 금방 전북 화우 동지들이 타이틀을 그대로 신상미술회창립 제1회전을 개최하게 됨은 비단 향토 전북의 자랑뿐만 아니라 한국 화단의 서광이요,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마음껏 축하하는 바이다. 이상 서론으로 작가 동지들에 대하여 생각나는 대로 나의 소감을 말하고저 한다. (중략)

이복수(李福洙) 화우 : 회화의 공부에 있어서 기본적인 기초에서부터 토대를 세워보겠다는 동지의 작가적인 태도를 존경한다. 앞으로 꾸준한 노력과 점차적으로 시야를 넓혀가기를 바란다.

‘고민하는 사실의 세계’ 신상미술회 제1회전을 보고, 유병희, 삼남일보(1954. 6. 8.)

이복수 화백은 증언한 바와 같이 ‘신상미술회’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전 2회와 다수의 ‘신상미술회’ 창립전 초대전을 가졌으며 전라북도 미술대전(도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도전 초대전에도 계속 출품하였으며 제9회 ‘목정문화상’(미술 부문)과 ‘전주시예술상’을 수상하고 전북 서양화의 역사를 기록한 미술사학자로서 전북 미술의 산증인이었다.

전북 화단 장식한 도전(道展)

- 1969. 10. 27. ~ 11. 8. 전북도전 창립전 열려 -

69년의 전북미술계는 다른 해에 없었던 「제1회 전북도전」이 탄생됐고 8명의 향토 미술인이 국전에 특선 내지 입선을 하여 고무적인 해였다.

그러나 몇 해를 두고 벼르고 벼르던 도전이 도 당국과 예총전북지부 미술협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10월에 예총화랑에서 벌이게 된 것은 심사위원 선정과 추천작가 추대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으나 향토 후배들의 길을 트고 또 전북미술의 발전을 위해서 큰 수확이었다.

이 도전에서 많은 신진이 나왔는데 금상에 장용선(서양화), 은상에 윤명호(동양화), 문선자(행서), 박찬갑(조각), 기영서(사진), 양형오(건축) 등의 입상자를 낸 바 있다. 또 10월에 있었던 제18회 국전에 천칠봉 씨가 서양화 「창경원의 풍경」으로 특선을 차지하여 추천작가가 되었고, 동양화에 송계일, 허람건, 김화래, 문선자, 송하영, 권갑 씨 등이 입선하여 전북미술의 명맥을 유지했다. 전북 미술인들의 개인전은 순창 박남재 씨가 3월에 전주 「상록수」 다실에서 유화전을 가졌고, 교대 홍순무 씨가 11월에 「솔」 다실에서 120호의 「풍년」 등이 유화전을 가졌으며, 이춘자 씨가 군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박씨는 이 개인전에서 구도나 색감을 무리 없이 전개시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퍽 안정된 느낌을 주었고, 홍 씨는 신문 소설에 삽화를 그리며 이 개인전에 일찍이 전북에 없었던 120호의 「풍년」 등 주로 농촌생활의 주변에서 향토색을 짙게 부각시켰고 김화래 양은 묵국 등 필묵을 휘두른 「규수」의 솜씨가 퍽 다듬어졌다. 또 이 고장의 서도를 지도하고 육성해가는 송성용 씨의 문하생들로 구성된 연묵회 회원전이 「사리문」 다실서 10월에 열렸는데 여류 회원들의 행서나 족자도 전시돼 퍽 이채를 띤 수확이었다.

특히 여류 서도회는 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모범된 일로서 매월 1회 이 고장이 낳은 국가적 서예가 송성용 씨 댁에서 사숙하여 서예와 조상의 유고시 등을 외우는데 회장 고단 씨를 버릇 김순영, 원영애, 이명림 씨 등 20여 명의 회원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69년의 전북의 사단은 크나큰 진전은 없었으나 박상윤 씨와 채원석 씨가 국전에 입선했고, 한국사진기자단 전북지부가 5월에 결성(지부장 김영채, 총무 김명곤)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복수 화백은 전북도전에 ‘구천동계곡’으로 출품하여 특선을 하였고, 그의 딸 이연수는 최연소로 한글 부문에 입선을 하였다. 매스컴에서는 부녀간 입상이란 사실이 화제가 되었고, 그 후 13회 도전에서는 이 화백의 장남 이영태가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여 부자간 서양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경향신문〉 81. 10. 14. 기사에 의하면 이영태 교사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뜻을 두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전북대 농대를 입학하여 70년대 중등학교 미술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면서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했지만 강한 집념으로 남몰래 그림에 몰두한 것이 오늘의 영광을 갖게 된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아버지 이복수(서양화가, 전주전매지청 서무과장) 씨는 아들이 그림에 손대는 것을 무척 반대했었다. “아버지의 작업을 통해 많은 고뇌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길의 추구를 반대하셨을 것입니다.”라고 이씨는 말한다.

〈전북일보〉 1969. 12. 18. 허남세 기자

이복수 화백의 작품세계

신상미술회 창립전에서 이복수 화백에 대한 유병희 화백의 화평을 보면 “회화의 공부에 있어서 기본적인 기초에서부터 토대를 세워보겠다는 동지의 작가적인 태도를 존경한다. 앞으로 꾸준한 노력과 점차적으로 시야를 넓혀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복수 화백은 미술 수업에 뚜렷한 스승이 없이 일본의 ‘낭화상업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배운 미술 이론과 실기 교육이 그의 미술교육의 기초가 되어 학교 졸업 후 직장(전매청)에서 같이 근무하는 천칠봉(전고 졸업 후 동광미술연구소 출신) 화백과 도청에 근무하는 동갑내기 친구 허병(전고에서 삼린평에게 수학) 화백과 같이 휴일이면 야외 스케치를 다니면서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상미술회 등 그룹전에서 선배나 동료들로부터 회화의 감각을 익혔고, 미술 잡지와 기타 자료들을 구입하여 주경야독하면서 회화 이론을 공부하고 야외 스케치를 위하여 사진 기술을 익혀 미술 자료를 정리하였다.

또한 증언한 바와 같이 신상미술회 창립 회원으로 성실하게 활동하면서 신상미술회의 기록과 시내 미술계의 활동 사항도 기록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1969년 전북도전이 탄생되면서 창립전에 공모전 출품으로 특선하면서 추천작가로 초대작가로 매년 한 차례도 빠짐없이 출품하는 성실함을 보였다.

 

 

원형 잃어가는 국보

-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벽화 -

 

69년 보수 때 세 조각 나 일본 구미등지 화가들도 격찬

“선의 변화 무상한 걸작”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사의 대적광전 보물(제476호) 벽에 그려져 있던 관세음보살상이 국보로 지정되기 직전에 원형을 잃게 됐다. 일본의 세계미술전집에까지 소개된 이 벽화는 세로 20m, 가로 12m 크기로 채색 없이 선으로만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눈동자에 정기가 넘치고 있다. 이 그림이 원형을 잃게 된 것은 지난 69년 4월, 전북도가 3천여만 원을 들여 대적광전을 보수하면서 벽을 헐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사찰 측은 이 그림의 원형을 살리려고 정성을 쏟았으나 떼어낸 벽이 3조각이 나면서 그림도 망가져 버렸었다. 벽이 헐리기 전 동양화가들이 이 그림을 여러 차례 복사했지만 선이 원형을 따를 수 없었고, 사찰 측은 이 조각난 벽화를 그대로 솜이불과 판자 등으로 포장, 뒤뜰에 세워두고 있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200여 년 전부터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객승 한 사람이 하룻밤을 쉬어 가자고 금산사를 찾아들었다. 주지승은 흔연히 나그네 중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객승은 간 곳이 없고 불공을 드리려고 법당에 들어선 스님 앞에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스님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보살의 눈동자가 따라다녔다. 새벽의 절간에는 “살아있는 보살이 나타났다”고 온통 소란이 벌어졌다. 주지승은 하룻밤을 묵고 간 객승이 답례의 뜻으로 밤사이 등불을 켜고 그린 그림인 것을 알고 나그네를 수소문했으나 끝내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 벽화는 동양은 말할 것도 없고 구미각국의 화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러 차례 감상도 했었다.

30여 년 전 모 프랑스 화가는 이 그림을 1천5백 달러에 팔라고까지 제의했고, 일본 화가들도 사찰을 새로 지어 주겠다고 그림과의 교환 조건을 내세웠던 일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국내 화가들도 이 벽화의 모형을 떠가는 일이 많았는데 지난 62년 전주의 이복수 화백이 당시 중앙의 모 고관의 부탁을 받고 이 그림을 복사해 그중 한 폭을 자기가 비장하고 있는데 선의 표현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적광전이 헐리기 전 이 벽화를 마지막으로 감상한 이상완 화백은 “선의 변화가 무상, 인조력이 아닌 천연력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었다.”고 격찬했다.

 

〈중앙일보〉 1971. 6. 28. 이현천 기자

 
보수공사와 화재로 유실됐다가 지난 4월 복원된 대적광전의 벽화 관세음보살

[금산사(金山事) 파손벽화 재현(再現)을] - 전북 도민들, 관세음보살상에 아쉬움 -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을 재현시키자.” 전북 도내의 불교 신자들과 뜻있는 도민들 간에는 이미 파손돼 없어져버린 금산사 대적광전(大賊光澱) 벽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 관세음보살의 재현을 갈망하고 있다.

‘살아있는 관세음보살’, 얼핏 들어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은 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동자 하나를 데리고 구름 위에 사뿐히 서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그 눈동자에 정기가 넘쳐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 살아있는 착각을 하게 한다.

 

생동감 주던 높이 9자에 폭 6자

흰 선만 써 국보(國寶) 지정 직전 보수 때 붕괴

화가 이복수(李楅洙) 씨 속사판 간직

그러나 이 명화는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전북도가 지난 69년 3천여만 원을 들여 실시한 대적광전 대보수공사 때 벽을 모두 헐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도 당국은 당초 보수공사를 하면서 벽화를 다치지 않기 위해 벽면 보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나 업자의 부주의로 벽이 모두 망가져 버렸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소재 금산사는 신라 대승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돼 후백제 왕 견훤이 그 아들 신검에 유폐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는 아적에는 동양 최대의 실내 입불이 봉안돼 있는 대웅전을 비롯, 국보 1점과 보물 7점 등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특히 보물 47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은 그 뒤 벽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 더욱 유명했다. 언제 누구에 의해 그려진 것인지 분명치 않은 이 그림의 크기는 높이 9자에 폭 6자. 연한 녹색바탕에 흰 선으로만 그려진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넋을 잃는다.

이 벽화의 사진과 함께 설명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오도자풍(吳道子風)의 그림으로 필력이 웅건해서 현존 이조불전의 벽화 중에는 비할 바가 없다」고 이를 극찬하고 있다. 이러한 명화가 국보 지정을 눈앞에 두고 파손돼 없어진 것이다. 요행히 이 그림은 지방 화가 추정 이복수(秋情 李福洙) 씨가 도과 직전에 복사해서 간직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는 이 같은 사태가 올 것에 대비, 지난 62년에 연13일간에 걸친 작업 끝에 원형 그대로를 드레싱 페이퍼에 옮겼다.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은 <세계미술전집>에 수록된 사진을 보고 그려 넣었다.

대가의 혼이 담긴 역작을 그대로 다시 그려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러나 이나마도 대적광전 벽면에 옮겨놓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일보〉 1978. 3. 7. 이현천 기자(전주=송은엽 기자)

 

 

 

이복수 약력

 

1922. 전북 완주군 고산면 남봉리 출생

1942. 일본 오사카 낭화상업학교 졸업

1942. 전매청 입사

1950. 미술동호인 합동전(카멜클럽)

1954. 신상회 창립전

1956. 전북대학교 개교 4주년 기념 시화전

1969. 전북도전 개설 출품(특선)

1976. 제1회 이복수 개인전(설다실)

1982. 예총전북지부(전북예술회관 개관 기념전)

1983. 제2회 이복수 개인전(전북예술회관 1층)

1999. 전주시 예술상(문화예술부문)

2001. 상촌회회원전(전북예술회관 2층)

제9회 목정문화상(미술부문) 수상

2004. 별세

2021-09-17 19:10조회 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