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취약계층들은 더욱 돈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놓이고 있다. 그래서 금융 당국이 긴급 생계비 대출을 출시했다. 100만 원 한도로 연체 이력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청한 당일 즉시 빌려준다. 신용 평점이 하위 20% 아래이고 연 소득이 3천500만 원이 안 되는 사람이 대상이다.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취약계층에게는 그래도 단비 같은 소식이다.
'유지불유(誘之不牖)하고 교지부전(敎之不悛)하고 호종기사(瑚終欺詐)하여 위원악대간자(爲元惡大奸者)는 형이임지(刑以臨之)니라.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끝내 허물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사기만을 일삼는 간악한 자는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 조선 정조 때 이노익(李魯益, 1767∼1821년)이 전라감사로 재직할 당시 감영 아전인 최치봉(崔致鳳)의 악행을 다스리면서 했던 말이다.
“근래 백성들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채(私債)가 특히 심합니다. 흉년에 가난하고 초췌한 백성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마침내 모두 부잣집으로 몰려가서 사채를 빌려 두 배의 이자로 갚고 있습니다. … 만약 갚지 못하고 본인이 먼저 죽으면 기필코 다시 그의 자손과 친족에게 거둡니다.”
이는 승정원일기’ 1725년 7월 16일자의 기록이다. 조선은 대출사업이 매우 성행했던 나라다. 조선 초기부터 쌀이나 비단 등으로 대출사업용 펀드(대금)를 조성했고 18세기부터는 화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출자금 조성 행위를 ‘입본(立本)’이라고 하고, 대출사업을 칭하는 용어는 급채(給債) 방채(放債) 흥리(興利) 식리(殖利) 등이 있으나 식리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대출이자를 ‘이식(利息)’이라 하고, 50%가 넘는 고금리를 ‘장리(長利)’라 불렀다. 대출사업자의 공사(公私)에 따라 공채(公債)와 사채(私債)로 구분했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를 ‘흥리인’ 혹은 ‘식리인’이라 불렀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대출사업은 관에서 주도했다. 지방관들이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민간에 대출해 이자 수입으로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였는데, 특히 지역의 방위비 조달을 위해 가장 많이 활용됐다. 부족한 지방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대안이 없었으므로 지방관의 대출사업은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고, 탐관오리와 민간인들의 결탁으로 많은 폐해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대출금리 책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 초기부터 다소 예외는 있었으나 공채와 사채의 대출금리는 각각 20%와 50%가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대출금리와는 달리 ‘무명자집’에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대출금리가 연 100%에 이르고 1년 후 원금과 이자를 합친 금액을 다시 원금으로 계산하여 연 100%의 이자를 매긴다. 향도미(香徒米)라는 상품은 쌀을 대출받는 방식인데 금리가 200%에 이른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일반 서민들의 고통이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사위 윤사로(尹師路)와 한명회, 윤필상 등의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승려들과 사마시 출신들(생원, 진사)의 자치 협의기구인 사마소(司馬所)도 사채업에 종사했다. ‘허생전’의 등장인물 변승업 역시 사채업으로 많은 돈을 모든 것으로 추정된다.
“판서 이노익(李魯益, 1767∼1821년)이 전라감사가 됐다. 전라감영 아전 최치봉(崔致鳳)이란 사람은 간활하고 악독한 아전들의 괴수였다. 전라도 53읍에 읍마다 반드시 2~3명 간활한 아전이 있어 모두가 최치봉과 결탁해 믿고 맹주(盟主)로 삼아 지냈다. 최치봉이 해마다 돈 수십만냥을 각 읍의 간활한 아전에게 나눠줘 창고의 곡식을 환롱(幻弄·꾀를 부려 농락함)해 팔아 돈으로 바꾸고 고리대(高利貸) 밑천으로 삼으니, 만민이 그 해독을 입었다”
최치봉의 만행은 더욱 심해져 목민관은 물론 감사까지도 최치봉을 단속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더구나 최치봉은 중앙 재상과 결탁해 아무도 그의 비행을 폭로해 처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노익 감사는 달랐다. 그는 최치봉의 비행 사실을 열거하면서 53개 고을 아전의 ‘괴수’인 최치봉을 사형에 처했다. 여담이지만 최치봉을 처단했음에도 전라도 아전의 병폐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해 결국 동학혁명으로 연결됐다는 점은 역사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다산 정약용은 “아전 중 악독하고 간활한 자의 우두머리는 모름지기 행정관청 밖에 비(碑)를 세우고 이름을 새겨 다시는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탐관오리의 비행을 기록한 비를 세워서 만인에게 공개하고 재발하지 못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른바 ‘기악비(記惡碑)’라는 것으로 죄인의 이름을 비에 새겨 범죄 재발을 막자는 뜻이었다.
최치봉은 가장 대표적인 사채업자였다. 그는 전라도 전체 53개 읍에 2,3명의 아전들을 포섭하여 스스로 맹주가 됐다. 그리고 매년 수십만 냥을 조성하고 자신이 포섭한 아전들에게 지원하여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를 하게 했다. 특히 청렴하고 법을 잘 지키는 관리들은 중상모략하고 탐관오리들인 경우 그들의 비리가 담긴 기록물들을 모두 빼내어 삭제해 주면서 자신의 위상을 세웠다. 그러던 중 이노익(李魯益)이 전라감사로 부임한 지 10일 만에 최치봉을 잡아들여 죄를 묻고 곤장을 친 후 3, 4개 고을을 옮겨 다니며 수감했는데 결국 고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산 정약용은 “타일러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끝내 허물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사기만을 일삼는 아주 간악한 자는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악덕 사채업자인 최치봉을 제시한 것이다.
긴급 생계비 대출은 좀 살펴볼 부분도 있다. 일단 신청해도 바로 100만 원을 주는 건 아니고요, 처음에는 50만 원만 내준다. 그리고 이자를 반년 이상 성실하게 납부했을 때만, 추가로 50만 원 더 대출해 준다. 여기에 이자율은 15.9%나 된다. 금융 교육을 이수한다면 0.5%포인트 깎아주고 이자를 성실히 납부하면 6개월마다 2번, 3%포인트를 낮춰준다고 한다. 대출 한도도 적은 데다, 금리가 너무 높다는 지적이 나왔다. 금융 당국에 물어봤더니 저축은행 등 2금융권과 대부업 등의 금리를 고려했다고 했다. 또 온라인 불법 대부업체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대출 금액이 40만 원인 점을 고려해 100만 원을 한도로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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