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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스미의 미술산책

[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13〉 강요배 ‘동백꽃 지다’

동백꽃 뚝뚝 지는 소리가 새벽 고요를 흔든다. 떨어진 땅에서 더 붉게 살다 간다. 삭풍을 견디고 추운 겨울을 버티고 핀 꽃이다. 그리운 어머니를 사무치게 보고 싶게 한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애절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때문이다. 심금을 울린 이 노래로 동백꽃은 대국민 스타다. 동백꽃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의 정서가 녹아 있다.
이 빨간 동백을 더욱 붉게 만든 화가가 있다. 제주도 사람, 현대 민중미술의 중심작가 강요배(1952-)다. 민중미술이라는 고착된 카테고리로 엮는 것이 미안해지는 실존적 주체성이 강한 작가다.
제주 4·3 민중항쟁을 그린 여러 작품 중 가장 상징적인 그림이 ‘동백꽃 지다’다. 시대성과 역사 정신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은 세기를 흘러 불후의 명작이 된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 그랬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그랬다. 어떤 장르의 메시지보다 시간과 공간에서 합리적 시사성이 강렬한 이미지가 그림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이 이십 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날의 충격과 감동이 나를 그림의 세계로 이끌었다. 강요배 전시를 따라다녔다. 4·3항쟁을 그린 영화 ‘지슬’을 제주극장 구석에서 보면서 울었다. 필자의 감정만을 아니리라.
지슬은 제주말로 감자라는 뜻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 지내는 고통의 시간 상징적 의미의 식량, 감자다. 4.3 항쟁은 1947.3.1.일, 1948.4.3, 1954.9.1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서울에서 20년을 방황하다 선택한 강요배의 귀향은 4·3 항쟁 연작 시리즈와 제주 원시 자연의 뿌리 깊은 시간이 함께 했다.
‘동백꽃 지다’는 한라산, 곶자왈이라는 태고의 생명이 잉태되는 숲에서 턱- 떨어지는 비장한 동백이다. 숲을 공격하는 무기를 든 이들의 검은 그림자가 섬뜩한 공포다. 계곡에 떠내려오는 선홍색 꽃잎은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으로 처연하다. 그의 간결하고 힘찬 터치 감이 긴장감을 더한다. 제주 동백 특유의 강인한 잎사귀의 반짝거림이 영혼의 범접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다. 동백이 지는 숲의 숨죽인 침묵이 두렵다.
강요배의 팽나무는 칼바람을 버티며 살아온 민중의 목소리가 있다. 제주 바다의 거친 풍랑과 휘몰아친 마파람, 얽히고설킨 덩굴은 그의 말대로 ‘가싯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하는’ 존재들이다.
귀덕리 화사에 안착한 강요배의 그림은 이제 무위자연이다. 소소하고 정겨운 그림들이 많아졌다. 여전히 그의 그림은 슬프다. 허공에 뜬 달은 심연을 뚫고 웅크린 왜가리는 고독에 쩔었다. 투박하고 성근 제주 땅의 돌과 풀을 닮은 회갈색의 느낌 때문이다. 주체들 사이 대립과 저항에서 자연과 생명의 숨결을 지키는 서로를 바라보는 존재가 되었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보듬고 맑은 치유의 향기를 품는다. 동백의 핏빛 절규도 동박새를 기다리는 순수한 몸짓으로 승화되었다.
그림은 작가가 단순히 그린 것만이 아니다. 사상과 감정의 세계만이 전부도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된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한다. 구석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앉아 침묵을 지키는 사람, 그는 화가다. 그에게는 말이 필요 없다. 그림으로 말한다. 강요배는 그렇다. 그가 젊은 날 그린 서러운 동백이 지는 아픈 4월이 오고 있다./ 화가 김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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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1991,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6x162.2cm, 학고재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