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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스미의 미술산책

[새전북신문 연재물] 김스미의 미술산책 〈12〉 에곤 실레 ‘죽음과 여인’

죽음이란 삶의 일부다. 죽음을 생각하며 진지한 삶의 당위성을 설명하지만, 언어유희일 뿐이다. 누구도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 해석에 기대어 편안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죽었다 깨어난다. 잠이라는 세포의 휴식 시간을 생각하면 인간은 늘 죽음을 연습한다. 그럼에도 죽음이 두려운 것은 소중한 것에 대한 막연한 분리불안 증세다. 인간의 삶도 어쩌면 길게 꾼 꿈같은 시간이다. 오늘 열심히 살면 된다. 내일 부활이 오지 않는다 해도...
세기말 유럽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는 너무도 정직하게 인간의 속마음을 표현했다. 외설로 감옥에 갈 정도로 에로티시즘이란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도발적인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었다. 다행히 작품은 첫 전시회부터 주목받았다.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 등 적극 후원하는 이도 있었다. 예술작품의 이해가 보편화된 시대적 성장이었다.
‘죽음과 여인’은 4년간 동거한 모델 발레리와 헤어지는 아픔과 분노를 그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절규하는 여인의 절망이 화면 가득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이의 허망한 눈동자가 삶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여인의 가느다란 팔이 보여 주는 건 실낱같은 희망이다. 이별의 슬픔을 삶과 죽음의 대비로 빨간 옷과 블랙으로 극명하게 보여 준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그는 빈에서 활동하다가 스물여덟에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독감으로 짧은 삶을 살았다. 15세에 아버지의 매독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경험한 강박관념이 그림의 무의식적 배경이다.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는 거울을 보며 그린 100여 점의 유화 드로잉 자화상을 남겼다. 청춘의 불안한 눈동자, 말라비틀어진 몸, 구겨지고 널브러진 자세다. 구불구불한 거친 선은 에로틱함보다는 그로데스크다. 그의 그림은 감추어진 충동이 드러나고, 젊음의 결핍과 냉소가 있다. 무표정한 얼굴은 인간의 욕망을 포장하는 위선에 대한 측은한 미소다. 에곤 실레를 보려고 작년 프리즈 서울아트페어에 이삼십 대 관객들이 대거 몰려 장사진을 쳤다.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명화는 실물을 봐야 감동이 물결이다.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그와 동일시했다면 관객이 남는 장사다. 청춘은 아픈 거다. 한국인의 커피 사랑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쓴맛이다. 쓰라린 경험이 있어야 단맛이 더욱 달콤하리라. 자기의 불안한 상념을 그대로 표현한 불꽃 같은 그의 예술혼은 레이첼 그라임스의 음악으로, 영화로 제작되어 야릇한 눈망울의 스타로 영원히 빛나는 아이콘이다.
예술은 그림의 직접적인 모티브와 관계없이 해석은 관객 몫이다. 그 어떤 지성도 갑작스러운 이별이나 죽음 앞에서는 혼란스럽다. 대책 없는 죽음은 멋진 문구로 위로되지 않는다. 불안과 억압은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논리다. 이것이 현실로 표면화될 때 견디기 힘들다. 에곤 실레의 위대함은 이 감추어진 내면의 본성을 드러내고 괴로워했다. 미움받아도 되니까 용기를 내서 나를 토닥거리고 살아야 한다. 자살률 1위의 나라 청소년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죽음이란 삶의 프로그램이다. 때가 되면 누구나 죽는다. 평범한 사람도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결국 먼지가 되어 떠난다. 아주 민주적이고 평등하다. 그래서 죽음이 강렬한,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이다./ 화가 김스미

 

<죽음과 여인>, 1915-1916, 유화, 150x180cm,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